부조리한 일이라도 선뜻 취재하기가 꺼려지는 일들이 있다. 아무리 기사를 쓰고 떠들어본들 그런 현실이 바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예상되는 일은 취재할지 말지 고민이 들고 지레 사기가 꺾이며 의욕이 바닥을 기는 게 사실이다.
법조 분야 취재를 하게 되면서는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그 비슷한 상태에 놓일 때가 있다. 지난 2014년 11월 13일 대법원이 지난 2009년 4월 쌍용자동차의 대량 정리해고가 불가피했다며 원심을 파기 환송했을 때가 그랬다.
이보다 아홉 달 앞서 쌍용차 대량 해고는 무효라고 했던 항소심의 판결 내용은 1심 재판부가 간과한 부분을 철저하게 조사해 내려진 결론이었다. 각종 회계 자료를 꼼꼼히 검토한 항소심 재판부는 정리해고를 위해 사측이 재무 건전성 위기를 지나치게 과장한 사실 등을 인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같은 사실 조사 내용을 부인하면서 정리해고는 불가피했다고 판결했다. 원심이 인정한 사실을 바탕으로 법률 적용이 적법했는지 따져야 할 대법원이 전혀 다른 사실 조사에 근거해 원심 판단을 허물어버렸다.
첫 판결이 잘못됐다고, 억울하니 다시 판결해달라고 해봤자 기회는 두 번 더 있을 뿐이다. 세 번째의 판결, 즉 대법원의 확정 판결은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극히 낮다. 기사 써봤자, 떠들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대법원 확정 판결은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결과가 나왔어도 '이게 현실이고 바꾸기도 어려우니 딴것이나 살펴보자'는 쪽으로 마음먹게 만든다.
대법원 최종심이 아니더라도 판결의 권위는 강력하다. 법학개론에 나오는 무슨 무슨 주의를 운운한 판결문은 일단 알아먹기부터가 힘들다. 그러니 따지고 들기도 어렵다. 상소하지 않겠다면 군말 않고 따르는 게 보통이다. 소크라테스가 하지도 않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정규 교육과정에서 가르치고, 이를 내세워 실정법과 판결을 무조건 따르라는 분위기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흔히 정치권이라고 부르는 입법 영역에 비해 사법 영역에 대한 비평은 드물고 관심도 적다. 특히 사법 작용의 최종 결과물인 판결 내용에 대한 비평은 법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도 별로 내켜 하지 않고, 언론도 다루기를 조심스러워 한다.
[프레시안 북스 지난 호 바로 가기]
두껍고 불친절한 책, 하지만 꼭 필요한 책
여러 변호사, 학자, 언론인이 번갈아서 쓴 덕분에 문체가 들쭉날쭉하다. 어떤 교수의 글은 논문 쓰듯 법학 용어가 난무하고, 어떤 변호사 글은 읽지 않고 귀로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였다. 술술 읽히다가도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면 턱턱 막히는, 다소 불친절한 책이고 쪽수도 법전에 버금간다. 하지만 꼭 필요한 책이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례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관련 판결·결정이다. 국가는 어떻게든 집시법 조항을 활용해 집회·시위에 '불법' 딱지를 붙이려 하고, 법원과 헌재는 시민과 국가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듯한 판결·결정을 내놓는 흐름이다. 하지만 분명히 진전은 있었다.
집회 참가를 위해 상경하는 농민들을 저지한 경찰의 원천 봉쇄는 적법하지 않다는 2007년 대법원 판결, 야간 옥외 집회를 금지한 집시법 10조는 위헌이지만 한동안 계속 적용하라는 헌법 불합치 결정, 경찰이 서울광장을 차벽으로 둘러싸 시민 통행을 막은 것은 위헌이라는 2011년 헌재 결정, 공공질서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에 한해 해산을 명할 수 있는데 미신고 집회라는 이유만으로 해산 명령을 내리는 건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2012년 대법원 판결 등을 이 10년간의 판결 비평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광화문광장에는 경찰버스 차벽이 여전하고, 경찰은 '미신고 불법 집회이므로 즉각 해산하라'고 시민들을 을러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리는 어찌 10년 동안 강산만 변했나.
이 책은 주로 '문제 판결'을 다루고 있지만 판결문만 비평하진 않는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공기업 사장직 인사 청탁과 함께 5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가 확정된 사건을 다루면서는 검찰 수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이 사건은 검사들이 사석에서 '검사는 고생해서 뇌물을 준 사람의 자백까지 받아냈는데 법원에선 무죄를 줬다'고 푸념할 때 자주 거론되는 사건이다.
하지만 검찰 조사 과정에서 곽 사장의 진술이 '10만 달러 줬다' → '검사가 무서워서 10만 달러 줬다고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 '3만 달러 줬다' → '선처해줄 걸 바라고 거짓말을 했다' → '5만 달러 줬다'로 다섯 차례나 바뀌었지만 수사 기록에는 마지막 두 진술만 기록돼 있다는 걸 지적한다. 번번이 진술을 바꾼 사람의 진술을, 자백 과정은 떼어놓고 결과만 보여주면서 믿으라고 하는 게 과연 정당하냐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이 뒤집힌 사건도 있다. 1·2심에서 사실상 무죄를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는데,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무죄 판결이 나온 것이다. 현준희 씨 사건이다.
YS 정권 시절인 1996년 4월 기자회견을 열어 감사원의 내부 비리를 고발한 현준희 씨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과 공문서 변조로 기소됐다. 1·2심은 선고유예로 거의 무죄나 다름없는 판결을 내렸지만 대법원에서 뜻밖의 판결을 내놨다. 공문서 변조 행위를 한 사람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대법원은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내부 고발자에 대한 인식과 배려가 부족한 판결이었다.
하지만 파기환송심 과정에서 현 씨의 공문서 변조는 진실 은폐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다는 걸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발견됐다. 2006년 서울중앙지법은 현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2008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대법원 판결 취지에 반하는 결정적 증거가 발견된다면 파기환송심의 결론은 대법원 판결에 기속되지 않는다.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 소송 파기환송심 결론이 대법원과 달리 나올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이 책에는 한국의 사법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다양한 사례가 담겨 있다. 이미 책을 한번 읽었고, 연달아 두 번 읽을 만큼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지만 계속 곁에 두고 참고할 계획이다. 지난 10년 동안의 판결 비평은 한국 사법 시스템의 현주소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취재거리를 찾도록 영감을 주기도 한다. 발간 주기를 절반으로 단축하면 책 두께도 줄어들어 좋을 거라는 희망 사항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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