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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평양까지' 130만 원, 이게 분단비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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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평양까지' 130만 원, 이게 분단비용입니다 [김동수의 북한 방문기] <1> "조국에 처음 오십네까?"
김동수 교수의 북한 방문기를 연재합니다. 김 교수는 평안남도 덕천 출신으로 미국 버지니아주 노폭주립대학교에서 27년 간 교수로 재직하며 평화와 통일 운동에 몸담았던 국제평화운동가입니다.

남북 간 교류가 사실상 막혀있는 가운데 김 교수는 지난 4월 21일부터 28일까지 북한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코인 선교재단'(COIN Mission Foundation)의 폴 유 목사 부부와 함께 북한의 곳곳을 방문했습니다.

재미교포로 북한을 여러 번 드나들었던 김 교수는 북한은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인민의 낙원"은 아니지만, 남쪽의 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과 같은 "생지옥"도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2015년 현재 북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 총 7편의 김 교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고, 나아가 남북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왼쪽부터 김동수 교수, 김 교수 부인인 백하나 교수, 폴 유 목사 부부 ⓒ김동수

필자는 1983년부터 대략 4년 간격으로 보통 일주일씩 북한(북조선)을 방문한 바 있다. 지리적으로 바로 붙어 있으면서도 가장 먼 나라, 역사·혈통·문화적으로 깊이 얽혀있으면서도 가장 두렵거나 적대시하는 나라. 이런 나라를 방문하는 것 자체가 문제시될 수 있거니와,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보고 어떻게 이해하며 이를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느냐에 따라 상당한 논쟁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선 필자의 이념적 위치와 서술방향 그리고 이 글의 목적 등을 밝히고자 한다. 본인은 기독교인이다. 기성교회의 교리와 제도보다 예수 자신의 삶과 가르침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따르려고 노력하는 개신교 신자이다. 직업으로는 인간의 존엄과 권리,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공정사회를 지향하는 실천학문으로서의 사회복지를 미국에서, 은퇴 후에는 한국에서 가르쳐 온 교육자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 문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민족양심을 가지고 보고자 하는 소위 진보적 지식인이다.

따라서 가능한 대로 우리가 가진 편견과 오해를 극복하고 비교적 솔직하고 공정하게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그 배경을 이해하고자 한다. 편파적인 친북이나 반북의 판정이 아니라, 다소 비판적이면서도 남과 북을 같은 민족으로 바라보면서 서로 화해하고 종국적으로 존귀한 하나가 되기 위한 사랑의 관점에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따라서 이 방문기는 민족화해의 길을 고민하는 한 기독교 지성인의 증언이 되기를 원한다. 어느 이념적 입장에 서 있든지 함께 고민하는 심정으로 이 방문기를 끝까지 지켜봐 주시길 바란다.

쉽지 않은 북한 방문길

앞에서 말한 대로 필자는 거의 10번 정도 북한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번 방문은 몇 가지 측면에서 좀 특이했다. 전에는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진 재미교포 교수단이나 미국 통일운동단체의 일원으로 방문했고 또 그에 걸맞는 공식적인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개별 방문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여행목적이 북한에 호의적이고 미국시민권자임에도 북한 방문이 쉽지 않음을 실감하게 됐다.

이번 방문에는 아내인 백하나 교수와 폴 유(Rev. Paul Yu)목사 부부가 함께했다. 아내는 원래 통일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는, 오히려 약간의 반감이 있던 지식인이었는데, 1984년 북한 교수들을 해외에서 만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지금은 필자의 강력한 통일운동 동지다.

유 목사는 재미교포 성직자로서 북한의 어려움, 특히 어린이들의 영양실조와 질병 등에 아픔을 느끼며 지난 10여 년간 식량 지원을 해 온 엔지오(NGO) 활동가이다. 필자는 한 선교기관과 관계로 그를 알게 됐고 그 후 그의 코인선교재단 (COIN Mission Foundation)을 돕게 됐다. 유 목사의 부인인 유은녀 씨는 음악교육자로서 어려운 걸음을 우리와 함께 나서게 됐다.

▲ 중국 측 압록강변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 ⓒ김동수

필자와 아내는 정치성 행사에 참여하는 일은 도식적이고 더 이상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유 목사의 실천적 지원 현장을 같이 가기로 결정했다. 또한 이번 기회에 여러 번 캐나다 단체를 통해 도움을 보내던 먼 친척을 만나 볼 기대도 가지고 있었다.

첫 방문이든 수십 차례의 방문이든 누구나 북한에 가는 일은 약간의 불안과 기대를 가지게 하는 색다른 경험이다. 대부분의 남쪽 사람들이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곳에 들어간다는 해외동포로서의 특전, 그리고 그에 따른 재정적 부담과 도의적 책임감이 우리를 조용히 그러나 무겁게 누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130만 원

평양은 서울에서 500리(199Km) 길이니 부산까지의 거리(457Km)보다 훨씬 가까운 이웃 도시인 셈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 심양을 거쳐 평양에 입국하게 된다. 그런데 이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한 사람이 서울에서 평양까지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만 약 130만 원에 달한다. 중국 복수출입국사증(150달러), 인천-심양 간 왕복 항공료(290달러), 심양에서의 양일 체류비(약 165달러), 북조선 사증(160달러), 심양–평양간의 왕복 항공료(459달러) 등을 합하면, 육로로 가는 것보다 20배 이상을 지불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것이 분단 비용이다.

북한과 가까운 만주지방에는 크고 작은 규모의 교역 또는 투자사업을 하는 조선족 사람들이 있다. 그 중 유 목사 협조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심양시 퍼시픽호텔(Pacific Hotel)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오후 입국사증(비자)을 받기 위해 공시된 시간 훨씬 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심양 영사관에 들렀다.

영사관은 개인 주택과 비슷한 건물인데 사방이 철조망으로 요새화되어 있고 앞에는 네 명의 중국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다. 비자가 승인됐다고 미국에서 이미 연락을 받은 터라 간단히 처리될 업무지만, 철조망 작은 구멍을 통해 여권을 미리 제출하고 밖에서 한 시간 정도 차례를 기다렸다. 중국의 경우처럼 북한은 미 제국주의 국가 시민의 입국비자는 비싼 값을 요구한다. 미국과는 외교관계가 없기 때문에 비자 인장을 여권이 아니라 별도 문서로 처리한다.

▲ 북한 심양 영사관에서 비자 발급을 기다리는 사람들 ⓒ김동수

북으로 들어가기 위한 작업을 마친 뒤 일주일에 두 번 운행하는 고려항공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한 시간 정도의 비행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순안비행장에 안착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됐다. 'Pyong Yang'(평양) 이라는 크고 붉은 글자를 포함한 평양공항 청사를 배경으로 일행의 사진을 몇 장 찍다 여성 경비원의 경고를 받은 것이다. 공항 청사에 들어와서도 입국 수속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러자 한 경비원이 달려와서 방금 찍은 사진을 즉시 삭제하도록 조치했다. 입국절차를 밟으며 담당자에게 '왜 경고문도 없이 사진을 못 찍게 하느냐?'고 항의성 질문을 던졌다. 그는 필자를 힐긋 보고 나서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조국에 처음 오십네까?"

그뿐만이 아니다. 세관에서 필자의 디지털카메라와 휴대전화를 가져가 한참 조사하고 돌려줬다. 사진을 별도로 삭제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여행 중 읽었던 책 두 권을 압수당했다. 감시원은 "조국에서는 외부의 서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선생 나가실 때 다시 가져가도록 여기 보관해 놓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예전과는 다른 평양에서의 첫날 밤

해외동포원호회 사업국에 속한 재미동포 지도원 라인철 동무의 영접과 안내로 평양 시내로 들어왔다. 오른쪽에 <로동신문>이 있는 '해방산호텔'에 짐을 풀었다. 약간 낡은 호텔이지만 깨끗하고 종업원들이 친절하다.

라 지도원 동무와 운전기사 손 씨는 우리가 평양에 체류하는 내내 동행할 일꾼들이다. 새로 부임한 라 동무는 유 목사가 요청한 방문일정을 재조정하느라 수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모든 방문 계획이 불확실하다. 유 목사가 약간 염려하거나 실망하는 눈치다. 또 체류비는 물론, 차량 사용료를 계산하는 모양이다. 과거 필자가 아는 관례와는 다른 경험이다.

저녁은 근처 호텔 아리랑 식당에서 맛있는 한식으로, 밤에는 외국 손님에게는 잘 알려진 고려호텔 꼭대기 회전전망대에서 먼 길을 무사히 도착한 것을 자축하며 한 잔씩 술잔을 나눴다. 230만 명이 산다는 혁명도시 평양은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잠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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