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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사' 세대는 '이재용 체제' 견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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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응사' 세대는 '이재용 체제' 견딜 수 있을까?" [비즈니스 프리즘] 이재용 체제 삼성, 어디로 가나? ②

<응답하라 1994>. 2년 전 방영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다. 1990년대 초중반 대학 문화가 잘 묘사됐다. 학생운동이 퇴조한 문민정부 초기, 한국 대학생이 이념 고민과 취업난에서 자유로웠던 드문 시기다. 개인주의가 두드러졌고, 대중문화가 꽃 피웠다. 'X 세대', '신세대' 등의 표현이 유행했다.

대학 밖이 먼저 변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두 해 전인 1992년, 삼성이 대졸사원 공채제도를 바꿨다. 남녀 구분 없이 공개경쟁시험을 치르게 됐다. 전에는 남성과 여성 정원을 정해놓고, 따로 뽑았다. 이런 변화는 주요 대기업 가운데 최초였다. 곧 다른 대기업도 따라갔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것도 이 즈음이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놓고 다 바꾸라"고 일갈했다.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간 간부가 된 <응답하라 1994> 세대, '조직 규율'보다 '시장 규율'에 더 민감"

▲ <응답하라 1994>. ⓒtvN
이 무렵, 대학에 가거나 취업을 했던 세대가 이젠 기업 조직을 지탱하는 간부가 됐다. <응답하라 1994> 주인공들이 대리, 과장급이 된 2000년대 중반. 삼성경제연구소가 그룹 조직 진단을 했다. 비공개로 진행됐던 이 프로젝트 참가자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신세대' 간부들은 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다. 임원에게 대드는 일도 있다. 경영진 입장에선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조직의 위기인가.

"그렇지 않다"는 게 진단 결과였다. '신경영' 세례를 받은 '신세대'는 상사의 지시라고 해서 무조건 복종하지 않는다. 가치관이 다르다. 예전엔 상사의 지시가 무조건 옳았다. 이젠 회사의 이익이 우선이다.

만약 젊은 과장이 임원의 지시에 토를 단다면, 그건 조직 규율을 깨려는 게 아니다. 회사의 이익이라는 더 큰 가치와 임원의 지시가 상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사의 이익에 예민한 건, 시시각각 변하는 주식가격 때문이다. 회사 주가를 떨어뜨리는 결정은, 설령 임원이 내린 것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경영진 입장에선 이런 태도가 꼭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대략 이런 결론이었다.

'주주자본주의'가 신념인데, 삼성 공격하는 투기자본이 어떻게 비칠까

"회사의 주인은 주주이며, 회사는 주주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라는 이론이 처음 나온 건 1976년이다. <응답하라 1994> 세대가 걸음마 할 나이였을 때다. 마이클 젠선의 논문 <기업이론 : 경영자 행동, 대리인 비용 및 소유 구조>가 효시다. 이런 이론이 경영학 상식이 된 건 훨씬 나중이다. <응답하라 1994> 세대가 대학에서 이런 이론을 배웠다. 취업을 앞두고 IMF 외환위기를 겪었고, 취업 이후엔 코스닥 열풍과 소액주주 운동을 지켜봤다.


이들이 삼성 조직의 중추가 된 지금, 투기자본 엘리엇이 '주주행동주의'를 들고 나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기 위한 작업,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결정이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을 해친다는 게다. <응답하라 1994> 세대가 배운 대로라면, 꽤 타당한 논리다. 삼성물산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을 맡고 있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내놓은 논리도 이와 같다.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 글래스 루이스, 서스틴베스트 등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내놓은 권고 안도 마찬가지다. '주주 이익 극대화'라는 관점에선 하필 삼성물산 주가가 낮은 시점에 합병 결정을 할 이유가 없다.

삼성 조직의 균열 지점은 이 대목이다. 엘리엇의 공격 앞에서 삼성 수뇌부인 미래전략실은 '국익 수호' 논리를 편다. 엘리엇을 '먹튀', 그러니까 단물만 빨아먹고 도망가는 투기자본이라고 비난한다. 일리 있다. 투기자본이 재벌을 지배한다면, 숱한 일자리가 사라질 게다.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이야기할 때면, 늘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궁금증. 삼성이 언제부터 주주의 이익보다 국익을 앞세웠나. 더 큰 궁금증. 회사의 이런 설명을 <응답하라 1994> 세대 삼성 직원들은 어떻게 볼까.

지난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 이후, 삼성경제연구소가 진행한 그룹 조직 진단 결과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사장 및 임원들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래 직급으로 내려갈수록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이 우세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극대화인데, 무슨 엉뚱한 소리냐"라는 식이다.

딱 10년 전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비웃었던 이들이 지금은 임원이 됐다. 물론 일부는 자리가 높아지면서 시야도 넓어졌을 게다. 그래서 생각도 바뀌었을 게다. 하지만 다 그렇지는 않으리라. 이들이 투기자본을 비난하고 국익을 강조하는 삼성 수뇌부의 메시지에 얼마나 공감할까. 머리로는 동의할 게다. 투기자본이 '먹튀'하면, 회사도 손해니까. 하지만 투기자본을 비난하는 논리에 마음 깊이 동의할지는 의문이다. 이들이 배우고 믿어왔던 바는, 오히려 투기자본의 논리에 가깝다.

'관리의 삼성'은 옛말

그래서 균열이 생긴다. 엘리엇의 공격 앞에서 삼성이 허둥지둥 한다는 지적이 잦다. 삼성 경영권 승계 및 엘리엇에 대한 방어를 지휘하는 미래전략실이 관련 이해관계자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있느냐는 게다. 발 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데만 급급하다보니, 스스로 말을 뒤집는 일이 생긴다. 예컨대 삼성물산 자사주 매각이 그렇다. 자사주는 회사의 재산이다. 총수 개인 재산이 아니다. 삼성의 평소 입장 역시 자사주 매각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런데 엘리엇이 공격하자 갑자기 팔았다. 오는 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을 해야하는 처지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의 신뢰는 깨진다. 결국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잇따라 합병 반대 권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삼성 조직은 확실히 전과 달라졌다. '관리의 삼성'은 옛말이 돼 간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졌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가 없는 탓이라는 게다. 꼭 그 이유 때문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개인의 공식 입장과 내면의 균열, 조직의 균열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 ⓒ연합뉴스


메시지와 가치의 상충…'잭 웰치 모델'과 "투기자본 반대"

엘리엇과의 표 대결을 앞두고, 주주들을 만나러 다니는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 그는 20년 동안 GE(제너럴 일렉트릭)에서 일하다 삼성에 스카우트 됐다. GE 근무 시절, 잭 웰치 회장이 그를 꽤 신임했다고 한다. 최근에도 그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법인을) GE처럼 만들겠다"고 말했다. '주주 가치 경영'을 극단적으로 밀어 붙인 게 잭 웰치 모델이다. 잭 웰치 전 GE 회장은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못 하는 일이 없었다. 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잘라냈다. '당장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구개발 투자를 대폭 줄였다. 주주들은 환호했지만, GE는 꾸준히 경쟁력을 잃어갔다.

"(삼성물산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단기 수익에 치중하면 안 된다" "주주의 이익보다 국부 유출 방지가 우선이다" 등이 삼성 미래전략실이 지금 하는 주장이다. 잭 웰치 식 경영을 배웠던 최치훈 사장이 주주들 앞에선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입으로 하는 말과 머리에 담긴 가치의 상충. 균열은 필연이다.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응답하라 1994>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삼성 미래전략실이 내놓는 메시지는, 삼성 조직 중간 간부들이 내면화한 가치와 모순된다. 그래서 메시지가 겉돈다. 조직 수뇌부에 대한 신뢰도 느슨해진다. 내가 믿는 가치와 다른 이야기를 하니까 말이다.


▲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 ⓒtvN

'황금의 삼각축'이 깨졌다…"의사결정자가 열린 공간에 나와야"

문제는 삼성 조직 구조에선 이런 균열을 봉합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회장의 리더십-미래전략실(옛 비서실, 구조조정본부)의 기획력-계열사의 전문성'. 그간 삼성이 한 덩어리처럼 움직인 건 이 같은 구조가 잘 작동한 덕분이었다. 미래전략실이 계획을 짠다. 회장이 승인한다. 계획에 힘이 실린다. 계열사 사장들은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계획을 실현한다.

'황금의 삼각축'이라 불리던, 이런 구조가 무너지고 있다. 회장은 의식불명이다. 새 회장이 공식적으로 나서기는 이르다. 그러니까 미래전략실은 힘이 빠진다. 계열사 정보가 종종 누락된다. 전처럼 계열사를 통제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는 어차피 필연이다. 언젠가는 겪을 문제였다는 말이다.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는 "시장과 사회를 직접 만나는 쪽과 의사결정을 하는 쪽 사이의 괴리"를 이야기했다. 또 "책임지는 쪽과 권한을 행사하는 쪽과의 괴리"도 거론했다. 모두 계열사와 미래전략실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법적 실체가 없는 미래전략실은 공식적인 대외접촉 창구를 가질 수 없었다. 계열사를 통해 정보를 입수해야 하는데, 결국 한계가 있다. 그 한계에 부딪힌 게 지금이다. 따라서 '황금의 삼각축'을 대신할 새로운 모델을 찾는 게 곧 경영권을 승계할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숙제다. 김 교수는 "의사결정자가 열린 공간으로 나와서 직접 듣고 설득하는 것"을 새로운 모델의 핵심으로 꼽았다.

제2, 제3의 엘리엇이 나타나면?…"균열은 필연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황금의 삼각축'을 대체할 모델은 결국 지주회사 전환뿐이다.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비춰볼 때 가장 안정적이다. 김 교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삼성은 지주회사로 전환할 생각이, 당장은 없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주회사 지분을 안정감 있게 확보하려면, 드는 돈이 천문학적인 까닭이다. 김 교수는 이 부회장의 지분 비율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지주회사 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분 지배력으로 존경받는 최고경영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부족한 지분을 채우는 것은 경영자의 비전과 리더십"이라는 설명이다. 삼성이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비춰볼 때 불안정한 지배구조를 고집하리라는 것.


이는 제2, 제3의 엘리엇이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철저한 투기자본이 보기엔 계속 허점이 나타날 것이므로. 그때마다 삼성 수뇌부는 '주주자본주의'와 상충하는 메시지를 던지며 방어할 것이다. 이른바 '국익' 논리다. 그런데 '주주자본주의'를 내면화한 세대가 삼성 조직 안에서 한 계단씩 올라가고 있다. '이재용 삼성 회장' 체제에선, 그들이 경영을 담당할 것이다. 입으로 뱉어내는 메시지(주주자본주의 비판)와 내면화한 가치(주주자본주의 옹호) 사이의 간극, 거기서 비롯된 균열, 삼성 앞에 놓인 풀기 힘든 숙제다.

- 이재용 체제 삼성, 어디로 가나?

<1> 초읽기 들어간 '이재용 시대', 4대 검증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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