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특정한 집단에 속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집단에 구성원으로서 얻어지는 정체성은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특정한 지역의 주민, 어떤 회사의 노동자, 학교의 학생 등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정체성은 개인이 '나'가 아닌 '우리'로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요즘엔 그걸 가르치는 학원까지 등장했다는 '인성'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사회적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전통과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수주의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공통의 귀속감과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문화적 안정감이다.
어찌된 일인지 우리 시대의 '보수'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이런 전통과 가치에 대해 무관심하다. 사람들이 가지는 문화적 정체성과 연대의 망을 해체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물질주의적인 화폐적 가치를 숭상한다. 고객과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요한다. 그들은 삶은 기회비용을 계산해야 하는 선택의 연속이며 선택에 따른 비용은 개인이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모든 사회적 관계는 시장의 논리로 환원된다. 당연히 경쟁의 원리가 온 사회를 뒤덮는다. 일상은 주식시장의 투자(투기라고 읽어라.) 논리가 지배한다. 새로운 가치를 전혀 창출하지 않는 주택과 토지 거래가 경제를 지탱하는 중심이 되어 버렸다. 은행은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유동성 공급보다는 이자놀이 하는 기관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텔레비전은 보험과 대출 광고로 가득 찬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보수는 온전한 의미의 보수가 아니다. 그냥 시장을 광신도처럼 따르는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보수주의자의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까지 비용이 크고 사회의 기본을 파괴하는 시장맹신주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주의로 몰아붙인다. 젊은이들이 가진 열정과 잠재력을 좌절과 절망으로 낭비하지 말자는 것이 이상주의일까? 어린 아이들이 사회적 인간으로 자랄 수 있는 놀이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 이상주의인가?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 주거할 공간을 주자는 것이 실현 불가능한 꿈일까? 아니다. 부동산 경기를 활성화시키고 가계대출을 확대하면 경제가 살아나고, 소위 '민생'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유토피아다. 경제가 나아진들 지금과 같이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실업, 불안정한 일자리 그리고 그에 따른 빈곤이 사라질 리가 없다. 낙수효과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착취를 가리는 환상이었을 뿐이다.
지배자들은 청년들에게 열정을 가지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계발하고 성실하게 노동하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이 앞장서서 노동의 가치를 경멸한다. 이제 노동은 실패한 삶의 징표일 뿐이다. 부동산 투기를 할 능력도, 주식투자로 돈을 불릴 감각도, 이자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물려받은 자산도 없는 빈곤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이다. 투기와 불로소득을 권장하는 사회에서 노동은 고통스러운 것일 뿐이다.
이런 나라에서 학문의 가치와 비판정신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연대의 가치를 체화시키는 것도, 모든 사회가 안고 있는 권위주의와 물질주의로의 경도를 제어할 수 있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더 많은 돈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비용일 뿐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대학을 취업하기 위한 자격증을 취득하는 학원정도로 생각한다. 교수들은 학문적 열정보다는 직업인으로 전락해간다. 이것은 대학이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는 증상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는 처방을 '대학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여 강요하고 있는 정부다. 정권을 장악한 집단은 앞에서 언급한 시장을 종교처럼 맹신하는 사람들이다. 시장의 원리가 어떻게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자기 파괴적 노선에 대해 최소한의 비판을 제기하는 대학도 마뜩하지 한다. 말을 잘 듣게 길들이고 싶어 한다. 그들의 신념에 따르면 대학도 시장의 원리를 수용해야 한다. 경쟁과 승자독식의 원리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대학은 학문의 장소가 아니라, 시장의, 정치의 장소가 됐다
이제 공적 기구로서 대학을 지원하는 것은 투자(investment)가 아니라 지출(expenditure)로 간주된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길러낸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가능한 줄이는 것이 좋은 비용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비용 또는 지출로 생각되면 은행이 돈을 빌려주었을 때 담보를 잡고 다달이 이자를 가져가듯이 끊임없이 감시하고 성과를 보고하도록 하게 된다. 이미 우리에게 내면화된 시장의 논리에 따르면 당연한 것이다. 대학에 돈을 지원하면 그 돈이 허투루 쓰이는 것은 아닌지 명확하게 감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신문에 오르내리는 연구자금을 횡령하거나 남용하는 교수들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생각은 확신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자. 교수들이 연구비를 착복하고 횡령하고 남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장에 대한 맹신이다. 시장맹신주의가 가져온 가장 큰 사회적 비용은 냉혹한 현금계산의 논리가 '도덕적 책임감'과 '성찰적 반성'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이미 노동의 가치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모두 사회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비생산적인 투기를 조장하고 있다. 그런 물질만능주의가 대학에까지 넘어 들어온 것이다. 교육부가 들고 나온 개혁은 이런 물질만능주의를 개혁하기보다는 개혁의 이름으로 그나마 남아 있는 대학의 도덕성과 성찰성마저도 파괴하려는 것이다. 이미 대학교수들의 연구역량을 양적으로 계산된 논문 편수에 따라 '계산'하고 교수들 사이에 경쟁을 조장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연구는 돈줄을 쥐고 있는 연구재단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연구의 성과는 촘촘하게 만들어진 양적인 성과보고의 틀에 맞추어져 진행된다. 대학들도 여기에 부화뇌동한다. 연구역량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학문적 성과를 돈을 주고 거래한다. 연구업적인 뛰어난 교수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액수 안에서 서로 경쟁하도록 조장한다.
역시 시장의 논리에 따르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연구의 질을 떨어트린다. 이제 교수들은 깊이 있는 연구보다는 정해진 기간 내에 '수량'을 채워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양적 기준에 근거한 '돈 장난'이 학문공동체를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한국 대학에 온전한 의미의 학문공동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구업적이 화폐적 보상으로 환원되고 교수들 사이의 무한경쟁으로 치닫게 되면 그나마 존재하던 학문공동체의 근거마저 무참히 파괴되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고등교육체계는 밑동부터 무너져 내릴게 뻔했다. 그런데 교육부는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교육부는 최근 '국립대학의 회계 설치 및 재정 운영에 관한 법률'과 동법의 시행규칙(교육부령)에 근거해 '교육부 교육·연구 및 학생 지도비 비용 가이드라인(안)'을 만들어 국립대학들에 내려 보냈다. 이 가이드라인은 지금까지 사립대학들과 비교해 낮은 국립대학 교수들의 급여를 보충해주던 교육과 연구 및 학생지도 명목으로 지급되던 급여성 보조를 '비용'으로 명시하고 있다. 학생을 지도하고 교육하며 연구를 해야 하는 대학교수의 활동에 대한 지원을 '투자'로 생각하기 보다는 '지출'을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출 또는 비용이기에 학생지도까지도 '건당' 점수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비용'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돈의 논리, 경제적 논리에는 도덕과 윤리가 없다. 오직 숫자만이 있을 뿐이다. 내용과 질보다는 어떻게 하든 수치로 표현되는 '결과'만 채우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참한 현실이다. 이제 교수들은 학생을 지도할 때 그 학생들 '건'수로 계산해서 얼마를 받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많은 교수들이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다. 그리고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도 아니다. 학생과 상담할 때 학생은 고객이다. 그 학생과 상담한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할 때 건수가 올라가고 이에 따라 점수가 부여되고 그만큼 돈이 들어온다. 이것이 교육부가 말하는 교육의 질일까? 이제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동료 교수들과 경쟁해야 한다. 이것이 교육부가 말하는 효율성일까? 상기 법은 12조 대학회계의 운영 원칙에서 '재정건전성의 확보'를 내세우고 있다. 재정 건정성이라고? 교수와 학생, 교수들 사이의 신뢰와 질 높은 학문연구를 담보로 한 재정건전성의 확보가 얼마나 효율적일까? 이 논리대로면 차라리 대학을 폐쇄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경제적 효과는 없이 돈만 잡아먹는 대학을 유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같은 12조 3항에는 '교육 및 연구 역량의 강화'를 대학회계 운영의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평가하는 지표들을 개발해 제시하고 있다. 교육관련 지표는 교수가 수업을 많이 하면할수록 높아진다. 연구역량을 측정하는 지표가 발표 논문 편수로 측정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조치들은 '역량'과는 무관하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은 그만큼 질의 하락을 의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량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얕은 지식을 논문으로 발표하고 학계의 연줄망을 관리할 수 있는 역량 말이다. 자기가 속한 학과의 수업을 늘리고 지키는 역량 말이다. 이제 대학은 학문의 장소가 아니라 부정적 의미의 정치의 장소가 되어 버린다.
교육부는 말한다…학자적 양심? 갖다 버리라고
학자는 논문 몇 편이 아니라 저술로 업적을 남긴다. 지금 한국에서는 발표한 논문을 묶어 출간하거나 잘 팔리는 대중서적이 아닌 학술적 저술을 내고 있는 대학교수를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교육부에 의해 강제된 양적인 업적 평가는 연구의 수준을 낮추고 깊이 있는 학문적 성취를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평가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몇 푼의 돈을 미끼로 한 수량적 평가가 아니어야 한다. 사명감? 비판정신? 학자적 양심? 교육부는 말한다. 다 갖다 버리라고. 그건 사치라고. 그리고는 넌지시 말한다. 말을 들어라, 그리고 경쟁해라, 그러면 돈을 줄 테니. 파우스트는 학문적 성취를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 그러나 대학민국의 교수들은 몇 푼 안 되는 돈에 '학문'을 팔라고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 의해서?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라 공공의 이름으로 국민이 낸 세금을 쓸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대학은 이렇게 무지막지한 시장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부끄럽지만 가이드라인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 정부가 틀어쥐고 있는 돈줄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면서 '알아서 기는' 것이 한국의 대학들이다. 정부와 언론은 대학교수집단의 부도덕함을 선택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대학의 기업화, 시장화가 그 답이라고 선전한다. 그것이 어떤 파국적 효과를 가져 올 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는 봉쇄한 채로 말이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 대학의 붕괴를 저지할 수 있는 힘은 국민들의 힘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그리고 본연의 역할로부터 멀어지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대학 구성원으로 연명하고 있다는 것이 비참하지만 국민들에게 '도와 달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다. 대학이 교수들의 철밥통을 보장하는 '일자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학 구성원들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것만큼 대학의 존재이유를 허물고 붕괴로 몰고 가고 있는 현재의 교육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이것은 대학구성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다.
(☞관련 기사 : 민교협의 정치시평 지난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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