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임모 과장의 자살에서 가장 먼저 밝혀야 하는 점은 동기입니다. 그의 자살 동기를 밝힐 수 있다면 그의 자살에 얽힌 이러저러한 의문들을 자연스레 풀 수 있을 뿐 아니라 해킹 사건의 진실에도 한 발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임 과장의 자살 동기에 대해 국정원은 어젯밤 발표한 '직원 일동' 명의의 성명에서 이같이 추정했습니다.
"국정원의 공작 내용이 노출될 것을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의대로 이(파일)를 삭제하고 그 책임을 자기가 안고 가겠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의 이런 추측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반문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국정원의 공작 내용이 정말 대북·대테러에 한정된 것이었다면 그걸 감추기 위해 파일을 삭제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반문이었습니다.
이런 상식적 반문에 대해 나온 대답은 국정원을 대신해 브리핑을 가졌던 국회 정보위 여당 측 간사인 이철우 의원의 추정인데요. 그는 "4일간 잠도 안자는 가운데 공황 상태에서 착각한 것 같다"고 추정했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간단한 추정이어서 재반박이 적잖이 나왔지만 여기선 짚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추정에 추정으로 맞서는 논란이기에 끝을 보기가 어려울뿐더러 그보다 더 중한 이유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임 과장의 파일 삭제 사실을 앞에 놓고 먼저 물어야 할 건 굳이 삭제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점이 아니라 '국정원 직원 일동'이 주장한 것처럼 임 과장이 자의대로 삭제하는 게 가능했느냐는 점이며, 국정원은 왜 자의대로 삭제하도록 놔뒀느냐는 점입니다.
되살펴 보죠. 위키리크스가 이탈리아 '해킹팀'이 해킹 당한 사실과 함께 해킹 프로그램 구매 고객 명단을 공개한 게 5일, 고객 명단에 '한국 5163부대'가 있는 사실이 확인된 게 9일, '5163부대'가 국정원이란 사실이 보도되기 시작한 게 10일이었습니다. 아무리 늦춰 잡아도 국정원은 '5163부대'가 공개된 9일부터는 관련 사실을 인지하는 건 물론 대책 실행에 나섰어야 합니다.
그 대책 가운데 하나는 국정원 내 당사자(들)에 대한 감찰이어야 했고, 감찰 개시와 동시에 당사자의 직무 배제 조치 또한 취했어야 합니다. 헌데 '국정원 직원 일동'의 주장에 따르면 임 과장은 통제되지 않았습니다. 국정원은 임 과장이 파일을 자의 삭제할 수 있도록 내버려뒀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가능한 일이었다면 국정원은 왜 통제하지 않았을까요?
이 의문점이 2차 의문점을 파생시키기도 합니다.
임 과장이 파일을 삭제한 시점은 아마도 자살하기 직전, 더 구체적으로는 17일 오후부터 집에 퇴근하기 전까지의 몇 시간이었을 겁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가 있는데요. 국정원이 17일 오후에 발표한 '입장문'이 근거입니다. 국정원은 이 '입장문'에서 해킹 프로그램 사용 기록을 국회 정보위원들에게 공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입장문' 내용대로라면 17일 오후까지 파일은 삭제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국정원이 파일 존재 여부를 확인, 재확인 하고 공개 방침을 천명했다고 보는 게 정상일 테니까요. 임 과장이 그 전에 파일을 삭제했다면 국정원은 기초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고 대국민 입장 발표를 한 셈이니 이건 코미디가 될 테니까 이런 상황은 배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 과장이 '입장문'이 발표된 후, 즉 17일 오후부터 몇 시간 사이에 파일을 삭제했다면 앞에서 제기한 의문은 재생될 뿐만 아니라 더 커집니다. 사용 기록 공개를 천명한 만큼 관리를 더 철저히 했어야 할 국정원인데 오히려 임 과장의 자의적으로 파일을 삭제하도록 방치했다는 얘기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국정원은 임 과장의 국정원 내에서의 행동을 통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정원 밖에서의 행동도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임 과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파문의 핵심 당사자라면 응당 신병 관리를 했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국정원은 방치했습니다. 임 과장이 퇴근 후 자살하기 직전까지의 동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자살 이후, 그의 가족이 실종신고를 낸 이후 시신을 찾을 때까지도 국정원이 상황을 관리한 흔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의 보도이기 때문에 사실로 확정하긴 조심스럽습니다만 임 과장이 출근하지 않자 국정원이 임 과장 집에 전화를 걸어 '왜 출근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이에 임 과장 부인이 실종신고를 했다는 보도를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임 과장의 직장, 즉 국정원은 임 과장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움직인 흔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경찰이 전면에 등장해 임 과장의 자살과 유서 존재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합니다.
국정원은 이렇게 임 과장을 통제·관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알려진 게 사실이라고 전제하면 국정원은 임 과장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뒀습니다. 국정원의 이런 처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의문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그리고 정말 이상한 국정원의 처사는 따로 있습니다.
국정원은 17일 발표한 '입장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 구절을 포함시켰습니다. '입장문' 내내 '국정원'을 주어로 쓰다가 딱 한 구절에서만 주어를 바꿉니다. 바로 이 대목이었습니다.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은 그 분야의 최고 기술자일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북한에 관해 하나라도 더 얻어낼 수 있을까 매일처럼 연구하고 고뇌합니다. 이들의 노력을 함부로 폄하해서도 안 되고 … 사악한 감시자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상하게도 국정원은 이 대목에서 당사자를 특정했습니다. '기술자일 뿐'이라고 특정합니다. 매일같이 연구하고 고뇌하는 기술자일 뿐이라고 특정했습니다.
국정원이 '입장문'을 발표할 당시 해킹 프로그램을 운용한 당사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해킹팀'과 연락을 주고받은 이메일 계정 '데빌엔젤'만 알려졌을 뿐 그게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숱한 보도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 어떤 언론도 국정원의 어느 파트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위원회까지 꾸려 전면 대응에 나선 야당 또한 국정원의 누가 해킹 사건을 벌였는지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고 있었는데 국정원이 자발적으로 '기술자일 뿐'이라고 특정했습니다. 국정원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굳이 '기술자'를 언급했을까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체크 포인트가 도출됩니다. 임 과장 입장에서 '기술자'를 특정한 '입장문'의 그 구절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그게 자신을 뜻한다는 걸 알았을 임 과장에게 그 구절은 어떤 의미로,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까요?
임 과장의 자살 동기를 밝히기 위한 단서는 바로 이것입니다. 국정원의 '입장문' 발표가 있었고, 그 직후 임 과장의 파일 삭제가 있었으며, 파일 삭제 후 자살이 이뤄졌다면 시발점은 '입장문' 발표이고, 화근은 '입장문'의 '기술자' 특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아, 미처 얘기하지 못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국정원은 '입장문'에서 '기술자'를 특정하면서 단수와 복수를 함께 사용했습니다. 앞부분에선 '담당하는 국정원 직원'으로 단수 표현했다가 뒤에서는 '이들의 노력'으로 복수 표현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참고할 사항이 있기도 합니다. 임 과장은 '4인 1조'로 된 팀원 중 한 명이었다는 보도입니다.
그렇다면 '입장문'의 그 구절에 부담 느끼고 임 과장의 자살에 충격 받은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기사는 7월 20일 <시사통> '이슈독털' 내용입니다. (☞바로 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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