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병철 후임'으로 내정된 이성호 국가인권위원장 후보자가 자질 논란을 비껴가지 못했다.
지난 달 20일 청와대로부터 지명된 이 후보자는 법관 출신으로, 인권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면 큰 결격 사유가 없다는 평을 들어왔다. 그러나 11일 국회 운영위원회실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이 후보자는 실정법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법관'의 모습을 보여, 진취적인 인권 기준을 마련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자아냈다.
"소수자 입장 아니라 여전히 법관 입장에서 판단"
이 후보자는 이날 '인권 전문성 부족' 지적을 의식한 듯, 모두발언을 통해 "법관일 때 법관 역할에 충실했듯 인권위원장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본격적인 질의에서도 법관 출신 인권위원장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 거듭 나오자, 그는 "인권위원장으로서 실정법 범위를 넘어 전향적으로 관습법도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 후보자는 과거 성별 정정을 신청한 성전환자에게 성기 사진을 요구한 데 대해 "대법원 판례 기준대로 하다 보니 외관을 갖출 것을 요구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강제적 성격을 띠는 '보정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사무관이 처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회 운영위원회 소속 정의당 정진후 의원은 "책임 회피하는 것 아니냐. 이 후보자 책임 아래서 발생한 일"이라며 "(피해) 당사자는 심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질타했다. 이 후보자는 "피해 보신 분에 대해 죄송하다고 생각한다"며 "사무관에게도 다음부터 그런 일 없도록 해달라고 했다"고 했다.
이 후보자는 인권위 권고 이후 성전환자는 신체검사 때 전문의 소견서 등 서류로 성기 상태 확인 검사를 대체할 수 있게 된 데 대해서는 "몰랐다"고 답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수현 의원은 "소수자 입장에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대법원 판례라며 딱 잘라 말하는 걸 보면 여전히 인식에 문제가 있다"며 "과연 실정법 기초해서 판단하지 않겠다는 게 지켜질지 의문"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같은 당 진선미 의원은 "30년 법조 경력이 득이 될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인권위원장은 그보다 훨씬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법 영역 안에서 고민한 분이 법원에 계셔도 되는데 굳이 인권위원장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법원장이 연거푸 공직자로 임명되는 데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후보자의 선배 법원장인 11대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은 권익위원장, 12대 법원장은 헌법재판소장, 13대 법원장은 감사원장에 발탁된 바 있다. '정부 요직에 가는 게 관행이 되면 법원장들이 소신 있는 판결을 하겠느냐'는 지적에 대해 이 후보자는 "인권위원장은 전에 가신 분들(법원장)과는 다르다"며 "부처가 아니라 독립 기구라 그와 같은 논란이 적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임자 현병철에 대한 평가, 적절치 않다"
이번 인권위원장 인선 과정이 투명하지 못한 데 대한 질책도 나왔다.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는 한국 인권위원회가 인선 절차를 개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3연속 '등급 보류' 결정을 내렸다. 청문회 전인 지난 6일에는 새정치민주연합 최민희 의원에게 "이번 위원장 인선이 내년 초 대한민국의 국가인권위원회 등급심사에서 이번 이슈가 반영될 것"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국제앰네스티 또한 10일 성명을 통해 이번 인선 과정을 비판하며 "인권위가 효과적으로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과 불편부당성, 그리고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ICC 등급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 이 후보자는 "내년 3월 전에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 등을 통해 최대한 (A등급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인선) 절차의 공정성을 위한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ICC 3연속 등급 보류 등 굴욕 속에서도 6년 임기를 채운 전임 현병철 인권위원장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전임자의 잘못에 대해 평가하고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말씀드리기 적절치 않다. 미처 생각지 않았다"고 답변을 꺼렸다. 이 후보자는 과거 용공조작 사건인 '아람회 사건' 판결 당시 판결문을 통해 선배 판사를 대신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고 밝힌 바 있다.
대치동 아파트 '다운 계약' 의혹
이 후보자는 다른 인사청문 후보에 비해 병역, 재산 문제 등 사생활 면에서 큰 흠결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날 과거 아파트와 중고 승용차 거래 시 취득세를 축소 신고한 사실이 밝혀지며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진 의원은 이 후보자가 부장판사 시절인 2001년, 서울 대치동 아파트를 7억4000만 원에 매수했으나 국토교통부 부동산 거래 신고는 2억2000만 원에 했다고 밝혔다. 실제 거래 금액보다 5억여 원을 낮게 신고해 결과적으로 취득세 1040만 원을 덜 냈다는 것이다. 2011년 서울남부지법원장 재직 시절 중고 차량 구입 시 약 70만 원의 취득세를 누락한 사실도 알렸다.
이 후보자는 이같은 사실을 모두 시인하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파트 거래에 대해 당시는 실거래가 신고 의무제 시행 전이었다며, "관행대로 부동산 중개사와 법무사가 처리하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명했다. 또 중고차 취득세 누락에 대해서도 "매매상에게 일정 금액을 주면 다 대행한 뒤 저한테는 등록증만 줘서 이번에 알게 됐다"고 했다.
김한표 "이 후보자 아들 상대가 남성이라면 어떻겠나"
이 후보자는 취임 시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싶은 일로 "아동‧청소년, 노인, 장애인 등 취약 계층에 대한 인권 보호와 아울러 이주민, 난민,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시정 등을 꼽았다. 이 후보자는 모든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겠다고 했다.
특히 최근 이슈로 떠오른 동성 결혼에 대해 이 후보자는 "소수자, 인권적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국민 정서나 국민 합의가 필요한 데 대해선 인식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새누리당 김한표 의원은 이 후보자의 이같은 입장을 반박했다. 김 의원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같이 살면 이 사회가 존재하겠느냐"고 물었다. 이 후보자가 "너무 극단적인 가정"이라고 답하자, 김 의원은 "아드님이 여성이 아닌 남성이 상대라고 하는 때가 온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며 다소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후보자는 "동의하고 싶진 않을 것 같다"면서도 "동성애를 찬성하는 문제와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건 다르다"고 밝혔다.여야는 모든 질의가 끝난 직후인 오후 8시 간사 합의에 따라 인사청문경과보고서를 채택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