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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치욕의 역사, 이제는 넘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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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치욕의 역사, 이제는 넘어서야 [광복 70주년 특별 기고 ③]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비교로 돌아가 보자.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워진 오스트리아공화국은 유럽에서 '좌우대립'이 가장 격렬한 곳의 하나였다. 기독사회당(CS)과 사회민주당(SPÖ)을 중심으로 대립과 혼란이 계속되다가 1933년 3월 쿠데타로 의회가 봉쇄되고 파시스트 독재정치가 시작되자 SPÖ 해산 등 좌익 탄압으로 인해 1934년 2월 '오스트리아 내전'이라 불리는 전면적 무력충돌 사태까지 겪었다.


1945년 봄 독일의 패망 때까지도 오스트리아 좌우익 간의 피맺힌 원한은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런데 좌우익 지도자들은 국가 위기의 극복을 위해 내부 대립을 자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좌우합작에 나섰다. 우익을 재편한 인민당(ÖVP)이 첫 총선에서 의회 과반수를 단독으로 확보하는 승리를 거두고도 SPO와 정권을 분담함으로써 시작된 '대연정'은 1966년까지 계속되었다.


해방 조선의 좌우익 사이에는 그런 원한도 없었다. 굳이 갈등이라면 신간회 운동이나 해외 독립운동에서 나타난 정도의 경쟁심이나 개인적 불신감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좌우합작에 실패하고 분단건국과 전쟁에 이른 까닭이 무엇인가.


민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국제정세 판단을 잘못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파적 득실에 얽매여 대국(大局)을 그르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쉽다.


그러나 냉철히 살펴보면 지도자들의 잘못보다 주어진 상황의 차이에서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행로가 갈라진 더 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해방 당시의 잠재적 지도자 중 이승만, 김구, 김일성, 박헌영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는 좌우합작을 지지했다. 여운형, 김두봉, 백남운, 김규식, 조소앙, 원세훈, 김병로, 안재홍, 홍명희, 이극로 등등, 민족국가 건설을 지상과제로 여긴 사람들의 현실 인식과 노력은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에 못하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의 차이는 무엇인가. 위치가 차이를 가져왔다. 유럽 중앙에 있는 오스트리아는 '국제여론'의 주목을 받는 곳이었다. 어느 점령군도 국제적 기준을 벗어나는 횡포를 부릴 수 없었다. 구 통치기구가 종전 직후에 마구잡이로 찍어낸 돈이 우호적 세력의 수중에 있다 해서 점령군이 그 효력을 인정해주는 것 같은 일은 오스트리아에서 있을 수 없었다. 나치 협력세력을 끌어 모아 경찰력을 부풀리는 것 같은 일도 있을 수 없었다.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은 군정청의 비호 아래 친일파가 장악한 자금력과 폭력(경찰력 포함)에 억눌렸다. 이북의 민족주의자들은 그런 탄압까지 받지는 않았지만 소련의 힘에 기댄 공산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내줘야 했다. 그런 상황이 친일파와 극렬 좌익 등 민족주의에 거스르는 세력의 힘을 키워주었고, 민족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조차 유혹과 공포에 시달리게 했다.

극좌-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

이북에서는 소련군 진주 이후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좌우합작이 진행되었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절반씩 인민위원회에 참여하도록 소련군이 '지도'한 지역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소련군이 좌익에 힘을 실어주기는 했지만 우익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고 좌익이 주도권을 쥐게 해주는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남에서는 인민위원회 같은 자치조직이 일체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좌우합작의 진행을 위한 '현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리력에만 의존하고 민심을 도외시하는 미군정은 좌익에게 어떤 양보도 하려 하지 않는 극우세력을 친일파 집단을 바탕으로 키워냈다.


이런 상황에서 이남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 일부를 포용하는 원만한 건국의 길을 모색했다. 친일파라도 다 같은 친일파가 아니었다. 식민지체제 아래 출세하고 호의호식하고 재산 모았던 사람이라도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 공조한 사람만 아니라면 해방을 계기로 과거를 반성하고 기득권을 양보하면서 건국 대열에 동참할 것을 바랐다.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가진 동아일보 그룹이 가장 중요한 포섭 대상이었다. 그래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한민당에 참여해 한민당을 민족주의 노선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극우세력도 처음에는 민심을 살폈다. 그래서 '임정 봉대'를 내걸고 김구를 '영수'로 받들면서 민족주의자들을 우대했다. 그러나 경찰과 군정청의 장악이 차츰 확실해지자 민족국가 건설을 회피하려는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6년 10월 당 해체에 가까운 대규모 탈당 사태를 통해 한민당은 극우정당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같은 무렵 이남 좌익에서도 분화 현상을 통해 극좌 노선을 분명히 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나타난 것은 '적대적 공생관계'의 궤도 진입이었다. 극단주의 노선은 이념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고 정치 아닌 선동을 통해 근거를 확보한다. 선동을 위해서는 '주적(主敵)'의 존재가 필요한데, 이남의 극좌와 극우는 서로의 주적 노릇을 해준 것이다.


이 공생관계의 기본 동력은 친일파와 미군정의 야합에서 나왔다. 미국은 통제하기 어려운 지역에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친일파는 민족국가 건설의 대세를 뒤집기 위해 민심을 억누르는 억압적 통치체제의 필요를 공유했다. 이들이 빚어낸 정치적 혼란에 일부 좌파세력의 종파주의가 편승해서 이남 정치계를 '좌우대립' 양상으로 몰고 갔다.


극우-극좌세력이 분명해지면서 좌우합작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중간파' 진영을 형성했으나 극우-극좌세력의 자금력과 조직력 앞에서 역부족이었다. 중간파를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이며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극좌와 극우의 공생관계가 위력을 발휘했다. 겉보기로는 '좌-우' 대립이었지만 실제로는 '중-극' 대립의 양상이었다.

1948년 들어 분단건국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는 시점에 김구가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이 양상에 마지막 파란이 일어났다. 중간파는 극우세력의 분단건국 획책 저지를 위해 이북 지도부의 협조에 희망을 걸었지만, 이미 분단건국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던 이북 지도부는 중간파의 노력을 이용 대상으로만 여겼다.

친일파, 친미파의 번식 원리

어느 사회에나 자기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인간들, 즉 불량분자는 약간씩 섞여 있는 법이다. 그로 인한 사회의 피해는 어느 정도 감수하는 편이 좋다. 불량분자가 일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할 때, 진짜 비인간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낳기 쉽다.


잘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불량분자가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골방에 틀어박혀 댓글질이나 하고, 더러 범죄를 저질러도 개인적 범죄에 그친다. 그런데 사회의 원칙과 질서가 무너질 때는 그들이 중심부로 진출하고 권력을 쥐기까지 한다. 국토를 파괴하는 일, 국고를 거덜내는 일이 조직적으로 벌어지는가 하면 공직자 인사청문회는 요식적 절차가 되어버리고, 국가적 참사에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해방공간 이남 사회의 사정이 그랬다. 해방 직후 마구 찍은 35억 원에 대한 미군정의 "OK" 한 마디로 일반인이 쥐고 있던 돈의 가치가 40% 잘려나가는 한편 친일파 집단의 막강한 자금력이 확보되었다. 식민지경찰 중에도 악질분자들이 갑절 크기로 커진 군정경찰의 주축이 되었다. 능력도 자질도 관계없이 영어마디나 하는 자들이 온 나라의 이권을 주름잡았다.

외세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식민지시대와 달라지지 않은 점이다. 일본 통치자들이 키워낸 친일파는 독립투사 때려잡는 순사, 헌병 보조원만이 아니었다. 조선 농업사회에서 대대로 존중되어 온 소작권을 무시하고 지주 소유권을 절대화했을 때 보통 심성의 지주들도 그 이득을 마다하지 않았고, 쟁의가 일어나면 총독부 관헌에 의지했다. '자기 것'을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친일파가 되어 갔다.

돌이켜 보면 조선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부터 나타났던 현상이다. 건강한 사회에서라면 사회에 큰 해를 끼칠 능력조차 가질 일이 없을 불량분자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활개를 친 것은 외세의 힘이 내부 질서를 까뭉갤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 불량분자들의 활약이 침략과 지배를 쉽게 해주기 때문에 외세는 그들에게 힘을 빌려준다. 그런 상황이 오래 가면 선량한 사람들 중에도 심지가 약한 사람들은 불량분자들의 행태를 따르게 된다.


외세의 너무 강한 힘이 문제라면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을 생각할 일이다. 19세기 들어 산업혁명의 성과로 부국강병을 이룬 서양 열강의 힘이 세계를 휩쓴 현상이다.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과 생산력 앞에서는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 같은 큰 나라도 고통과 치욕의 역사를 피할 수 없었다. 서양의 부국강병을 본뜬 일본의 힘 앞에 조선의 지사(志士)들이 아무리 좋은 뜻을 일으켜도 그 침략을 막을 길이 없었다.

'서세동점' 현상의 퇴조를 바라보며

서세동점 현상은 1945년에도 건재했다. 조선에서 힘을 휘두르는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두 나라가 힘을 휘두르는 방식은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 일차적으로 달려 있었다. 연합국 시절의 협력관계가 계속된다면 두 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함께 누릴 것이고, 배타적 영향력 확보를 위해 극한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나라의 관계는 원래 적대적이었다. 공산혁명 후 소련 승인이 제일 늦었던 나라가 미국이었다.(16년이 지난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후에야 소련을 승인했다.) 추축국을 상대로 한 전쟁 때문에 적대관계가 미봉되었을 뿐, 전쟁이 끝나면 적대관계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조선의 분단건국이 이뤄지기까지 3년의 과정은 바로 그 적대관계가 냉전체제로 현실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연합국의 분할점령국 중 오스트리아는 10년 후라도 제대로 독립을 했고, 전쟁 책임이 제일 큰 독일은 분할되기는 했지만 내전까지 겪지는 않았다. 이들 유럽국과 달리 동아시아의 조선과 베트남은 내전, 대리전, 국제전의 양상이 뒤섞인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서아시아의 중동은 '화약고'가 되었다. 냉전의 갈등이 아시아 여러 지역에 전가된 이 현상은 서세동점 현상의 계속을 보여준다.

20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주체적 진로를 찾아 나가려는 아시아 인민의 노력은 서양세력의 막강한 힘 앞에 좌절을 거듭했다. 가장 치열한 노력을 보여준 베트남인의 경우 '민족자결'이라는 간단한 목표 하나를 이루기 위해 30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중국도 오랜 고난의 행로를 걸어야 했고, 중동 여러 나라의 인민은 지금도 고난 속에서 헤매고 있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서세동점 현상의 해소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 말부터 한국 등 신흥산업국(NICs)의 눈부신 성장에 따라 해묵은 서양우월주의가 힘을 잃기 시작했고, 금세기 들어서서는 중국의 놀라운 성장세가 더 큰 충격을 일으켰다.

현실의 변화에 앞서 학문적 고찰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서세동점의 형세 속에서 조성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1960년대에 '종속이론'으로 지적된 후 1970년대 이후 '세계체제론'의 발전은 서양인이 주도한 근대 세계체제의 한계를 밝혀 왔다. 2008년 금융위기 무렵부터는 새로 형성될 세계체제의 방향 모색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은 서세동점의 충격 앞에서 망국에 이르렀고, 1945년의 '해방'도 서세동점의 형세 때문에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었다. 냉전의 첨병 노릇도 서세동점의 압력이 강요한 것이었다.


고난의 역사를 한반도에 빚어낸 서세동점 현상의 퇴조 앞에서 민족사회는 주체적 진로를 찾아 나갈 기회를 150년 만에 맞고 있다. 이 기회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가치관의 정비가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다. 고액 복권 당첨자가 그 행운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불행을 맞는 일이 많다고 한다. 복권이 가져다주는 돈에 실린 힘을 행복을 위해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잘못 휘둘러 주변사람들을 괴롭히고 그 고통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힘 자체에 대한 갈망을 가졌을 뿐, 그 힘으로 추구할 가치를 마음속에 품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현대사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서세동점의 압력 아래 왜곡된 현실 속에서 외세에 의지해 조그만 권력을 휘두른 자들보다,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좋은 뜻을 품고도 좌절을 겪은 이들의 자취에서 배울 것이 많다. 민족사회가 힘을 갖지 못했던 시절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힘'이 아니라 '뜻'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방송대신문> 1815~1817호에 3회에 걸쳐 싣는 것을 약간 수정해서 신문사와 필자의 양해로 전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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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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