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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한옥 마을, 서촌과 다른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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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북촌 한옥 마을, 서촌과 다른 이유가 있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한옥 집단 지구의 탄생과 디벨로퍼
1920년대 경성의 상황을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방의 가난한 조선인과 유지층들이 경성으로 이주하면서, 조선인 인구가 급증하였고 이들이 거주하려는 지역은 북촌이었다. 일본인 역시 인구가 급증하였는데, 이에 대한 대응 전략의 하나는 일본인 주거지를 북촌으로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촌 지역은 이질적 계층들이 한정된 토지를 놓고 경합하는 곳이 되었고, 당연히 자본력이 막강한 일본인에게 유리한 형국이었으며 많은 조선인은 분개하고 좌절하였다.

하지만,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을 제공하는 새로운 조직(회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근대적 디벨로퍼의 출현이다. 이들이 건설한 한옥은 기존의 한옥과 전혀 다른 형태였다. 이 한옥들은 과거와 달리 아주 작은 규모였고 한 채씩 지어진 것이 아니라 대단지로 개발되었다. 우리가 현재 삼청동, 가회동, 익선동에서 볼 수 있는 근대적 한옥 집단 지구가 탄생한 것이다.

여러 채의 작은 한옥들이 모여 개발된 한옥 집단 지구는 복합적 요인의 결과였다. 한옥의 구조적 특징과 더불어 디벨로퍼에게도 경제적 이윤이 돌아가는 사업 구조 등이 작용하였다.

▲ 정세권 선생이 개발한 가회동 31번지 한옥 집단 지구. ⓒ이주현

한정된 토지에 여러 사람이 모여 살게 되는 경우,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다. 과거 100평의 대지에 한 가구가 살았으나, 인구가 늘어 5가구가 들어와서 살 형편이라 치자. 이 경우, 첫 번째 해결책은 100평 대지 1층 가옥을 5층으로 개발하여 5가구가 기존과 똑같은 평형의 주택에 사는 것이다. 즉, 아파트와 같은 형태이다. 하지만 한옥의 구조적 특성상 고층으로의 개발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게 된다. 100평 대지에 5가구가 살 수 있도록 가구당 20평 크기의 주택 5채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경우 한 가구당 주택의 규모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나 더 많은 수의 가구가 거주하게 됨으로써 대규모 대단지 개발이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조선인 인구 급증에 대한 1920년대식 해결책은 큰 대지의 한옥을 철거하고 여러 채의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대단지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작은 평수를 여러 채 공급하는 전략)은 부동산 디벨로퍼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다. 예를 들어 역삼동 원룸 시장을 살펴보면, 실평수 10평형 원룸의 월 임대료가 대략 100만 원 수준이나, 5평형의 원룸은 60만 원 선이다. 주택 수요를 분석하면 당연한데, 소득 분포를 볼 때 월 100만 원을 내고 살 수 있는 계층보다는 월 60만 원 을 낼 수 있는 소득층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5평 원룸에 대한 수요가 많다면, 하나의 재화(원룸)에 대한 경쟁 역시 5평 원룸이 10평 원룸보다 더 높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가격에 반영된다. 비록 5평 원룸 월세(60만 원) 자체는 10평 원룸(100만 원)보다 낮더라도, 평당 임대료를 계산하면 5평 원룸의 평당 임대료(12만 원=60만 원/5평)는 10평 원룸(10만 원=100만 원/10평)보다 20%가 높다. 따라서 소유자인 디벨로퍼 입장에서는 10평 원룸 한 채를 소유하는 것보다 5평 원룸 2채를 소유하는 것이 유리하다. 소득이 100만 원(10평 원룸 한 채)에서 120만 원(5평 원룸 두 채)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디벨로퍼 입장에서는 주택 규모를 더 작게 하고 여러 채를 만들수록 이익이 될 수밖에 없다. 평당 임대료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920년대 경성 거주 조선인들의 생활은 지속해서 궁핍해졌기에, 조선 서민들이 원하는 주택의 규모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정세권 선생의 1932년 글이다.

"10년 전(1922년) 30칸 안팎 되는 집이 무난히 팔리던 때에는 그래도 오늘날 신문지상에서 나타나는 생활난의 부르짖음은 적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신문 지상에 오직 생활난 이야기만 보도될 뿐이고, 이르는 곳마다 들리니 생활난의 비참한 절규가 아닌가. 가옥매매도 너덧 댓간의 집을 찾는 사람이 가장 많아 10간 내외의 집이 매매될 뿐, 그 이상의 큰 집을 찾는 이가 적다." (정세권, '나날이 위미(萎靡)되어가는 가옥 매매로 본 조선인의 경제', <실생활>, 1932년 8월호)

따라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볼 때, 한옥 집단 지구의 출현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한옥 집단 지구는 대단지에 여러 채의 한옥들을 거의 같은 시기에 건설하였기에, 개인 혹은 작은 회사가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당연히 일정 규모의 자본력을 갖춘 회사여야 했다. 그리고 부동산 개발은 상당한 위험성(사업 파산의 경우가 높음)과 더불어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것이었기에, 규모가 있고 전문성있는 디벨로퍼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 급증기에 작은 주택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디벨로퍼의 출현은 해외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중후반, 뉴욕은 유럽의 이민자들이 미국에 유입되는 통로였다.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뉴욕은 주택부족무제(특히, 저소득 서민 주택)에 시달렸다. 이 와중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주택 건물(Tenement라 불리는 우리의 다세대 주택과 비슷한 주택 건물)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건물들은 경제적 이윤만을 추구했던 제리 빌더(Jerry Builder)라 통칭되는 일면 악독한 디벨로퍼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들은 당시 주택에 대한 규제가 매우 부실했던 틈을 타, 아래의 도면과 같이 집들을 잘게 쪼갰다. 가급적 방수를 최대한 늘려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조선의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큰 한옥을 부수고 작은 한옥 여러 채를 건설한 것과 비슷한 경우다.
▲ 뉴욕의 사진 작가 제이콥 리스는 이민자를 포함한 저소득층의 삶을 사진으로 담았고, 이는 당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한 층에 12가구가 살도록 방들이 쪼개진 형태인데, L(Light)은 밝은 방, D(Dark)는 어두운 방을 의미한다. 1914년 출간된 [How the other half live]에 수록된 도면 이미지.


하지만 이들의 건축물은 심각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미약한 규제를 틈타, 위 도면 이미지의 일부 D(Dark)방과 같이 햇빛이 일절 들어오지 않고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방들을 공급하였기 때문이다. 제리 빌더는 폭발적인 주택수요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에 치중하였기에 입주민이 살 집의 구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적 환경적 문제점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제공한 한옥은 과거 한옥의 문제점들을 개량한 것이었다.

▲ Tenement 건물을 조사하고 있는 감독관. 미국 기록물 보관서(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그런데도 이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 당대 최고 건축가 박길룡은 저택을 부수고, 소규모 한옥 단지로 개발하여 주거 환경을 악화시킨다고 비난하였고, 이들은 '집 장사'로 매도되었다.1)

그렇지만 1920년대 북촌 지역에서 그들이 근대식 한옥 집단 지구를 건설하지 않았다면, 아니 못했다면 우리가 북촌에서 바라보는 주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 개발을 일본 측도 안 했기에 조선인마저도 안 했다면, 서촌의 적산 가옥 집단 지구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력이 월등한 일본인들을 위한 주택이 대량이 공급되었을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한 삼청동의 모습은 대량의 적산 주택 단지이지 한옥 집단 지구가 아닐 수 있다.

▲ 서촌에 남아 있는 적산 가옥 단지. 과거 동양척식주식회사 관사로 추정됨. ⓒ김경민

따라서 이들에 대한 재평가는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의 한옥 집단 지구 개발이 경제적 이윤에서 시작되었건 아니건, 당시 민족적 총화(북촌 지역을 일본인에게 빼앗기어서는 안 된다)가 한옥 집단 지구라는 형태로 투영되어 개발되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수의 조선인이 북촌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인의 북촌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조선인의 북촌이 있었기에 삼청동, 계동, 익선동의 근대 한옥 집단 지구가 아직도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교묘하게 사업을 제약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사업을 일군 것 역시 평가되어야 한다. 건설 및 개발업자는 민간의 공사뿐 아니라 관급 공사에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시 일제는 여러 독소조항을 두어 사실상 조선인 회사들의 관급 공사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은행 대출 역시 그들에게 매우 불리한 형편이었다.2)

즉, 은행에서 대출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근대적 디벨로퍼들이 대규모로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매우 큰 리스크를 지고 사업을 한다는 것인데, 이들이 이런 상황에서도 사업적 성공을 일군다는 것은 매우 시장이 좋았든지 아니면 사업적 수완이 대단하든지 아니면 두 경우 모두를 누릴 수 있던지 일 것이다.

당대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근대적 디벨로퍼에는 정세권의 건양사(建陽社), 김동수의 공영사(公營社), 마종유의 마공무소(馬工務所), 오영섭의 오공무소(吳工務所), 이민구의 조선공영주식회사 등이 있다.3) 이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당시 건축왕이라 불렸던 건양사의 정세권 선생이다.

1) <리씽킹 서울>(김경민·박재민 지음, 서해문집 펴냄, 2013년).

2) 구경하·김경민, '1920년대 근대적 디벨로퍼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경제지리학회지>, 제17권 제4호, 2014년.

3) 김란기, '근대 한국의 토착 민간 자본에 의한 주거 건축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제1권 제1호,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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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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