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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왜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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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왜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나?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실크로드 역사 단상 ①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협상이 전격 타결되자 중국과 미국의 'G2 전쟁'이 경제 분야에서도 전면화하고 있다는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은 신실크로드(일대일로) 구상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려 하고, 미국은 태평양 연안 국가들을 묶어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강화하는 형국이다.

보도를 접하고 보니 이런 상황을 의식하고 떠난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 다녀온 실크로드가 생각났다.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실크로드의 이미지는 광활한 사막과 오아시스 도시들에 대한 동경, 대상(隊商)과 낙타 행렬에 대한 상상, 모래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황량한 유적 등 지극히 낭만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일대일로 구상을 구체화하는 것과 더불어 실크로드는 더 이상 먼 옛날의 길이 아니라 중국과 세계의 미래를 가늠하는 길로 바뀌고 있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2013년 9월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 대학 강연에서 30억 명을 포괄하는 '실크로드 경제 벨트'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그 다음 달에는 인도네시아 국회 연설에서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공동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한자로 경제 벨트는 '经济带(경제대)'라 하고 실크로드는 '絲綢之路(사주지로)'라 한다. 각각의 끝 글자인 '대'와 '로'가 묶여 '일대일로(一带一路, One Belt One Road)'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이 작년(2014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실크로드 상에는 장예(张掖)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장국비액 이통서역(張國臂掖, 以通西域)'이라는 한나라 때의 말에서 유래했다. '나라의 팔을 뻗어 서역과 통하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한나라 때의 역사 지도를 보면 중원에 웅거한 한나라가 서북쪽으로 팔을 쭉 뻗은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편안하게 뻗은 팔이 아니었다. 본래 그 자리에 뻗쳐 있던 흉노의 팔을 잘라내고 내민 팔이다. 오늘날 당연한 중국의 영토처럼 여겨지는 간쑤 성 일대는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고대의 쟁탈전 끝에 흉노로부터 탈취한 것이었다. 이후 중국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뻗어 나가 나비처럼 생긴 현대 중국의 왼쪽 날개인 신장위구르자치구까지 팔을 뻗는 데 성공했다.

한나라는 실크로드 교역에서 얻는 이익을 확보하고 흉노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국운을 걸고 서북쪽으로 팔을 뻗었다. 자칫하면 그마나 오므리고 있기라도 할 수 있던 팔을 통째로 잃을지도 모르는 모험이었다. 오늘날 중국이 잠든 실크로드를 깨워 서북쪽으로 팔을 뻗고 서남쪽으로 다리를 뻗는 것은 미국의 포위망을 뚫고 중국의 경제 생태계를 확보하려는 몸부림이다.

일대일로 상에는 미국의 세력권으로 간주되는 여러 나라가 도사리고 있다. "중국 같은 나라에게 세계 경제의 틀을 쓰게 할 수 없다"라는 오바마의 말에서도 절감할 수 있듯이 이러한 중국의 '팔다리 뻗기'는 한나라의 팔 뻗기만큼이나 위험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은 성공할 수 있을까? 관건은 단지 일대일로 연선 국가들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뿐 아니라 중국이 세계의 미래를 주도할 나라로서 어떤 전망과 보편적 가치를 보여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에도 있다. 흔히 자유와 인권으로 요약되는 '미국의 가치'와 경쟁하거나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중국의 가치'는 무엇일까? 과거에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을 때는 어떠했을까? 나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지는 시안(西安)의 비림(碑林) 박물관에서 우연히 이 문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비림은 비석이 숲을 이룰 정도로 많다는 뜻인데, 시안의 비림은 취푸 공묘(孔廟, 공자 사당)의 비림, 타이산 대묘(岱廟)의 비림과 더불어 중국 3대 비림으로 꼽힌다. 송나라 때인 1087년 시안 지역에 내려오는 비석, 화상석, 불상 등을 모아 처음 건립되었고, 청나라 때 처음 '비림'이라 불렸다. 1992년 시안 공묘 옛터를 합쳐 4900제곱미터에 이르는 시안비림박물관이 정식 출범해 1만10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그 많은 유물 가운데 실크로드의 여행자가 절대로 빼 놓아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높이 279센티미터, 너비 99센티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자철석의 이수(螭首)에 '大秦景教流行中国碑(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다. '대진'은 로마를 말하고 '경교'는 기독교를 말한다. '로마의 기독교가 중국에서 유행한 내력을 적은 비석'인 셈이다. 혹자는 경교가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금지당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라고 한다. 그러나 경교 자체의 교리는 정통 기독교 교리와 다르지 않아 여기에도 의문은 있다.

ⓒwikimedia.org

781년 이란 출신 경정(景净, 본래 이름은 아담)이 지은 비문에 따르면 경교가 중국에 전파된 것은 당 태종 때인 635년이었다. 아라본(阿羅本)이라는 선교사가 태종에게 경전을 바치자 태종은 감탄하며 경교를 적극 권장하고 3년 후에는 장안(지금의 시안)에 경교 사원을 짓는 것을 허락했다. 이 기독교 사원은 처음에는 파사사라 불렸고 나중에는 대진사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경교는 당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했으나, 도교를 숭상한 무종이 845년 불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를 탄압할 때 함께 화를 입어 수많은 대진사가 파괴되었다. 무종의 연호인 회창을 따 이 사건을 '회창의 폐불'이라 하는데, 대진경교유행중국비도 그때 땅 속에 파묻혔다가 명나라 때 발굴되었다.

'경교유행중국'의 내력을 따라가던 나는 상념에 빠졌다.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들어와 유행한 것은 기독교만이 아니다. 불교는 기원 전후에 중국에 들어와 상당수 왕조의 지도 이념으로 기능했고, 이슬람교는 아랍에서 창시된 시점과 별반 시차도 없이 바로 들어와 회교, 청진교 등의 이름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3대 세계 종교로 꼽히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다 서역으로부터 들어와 번창한 것을 보면 과연 중국의 문화적 포용력은 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회창의 폐불' 같은 국수주의적 반동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보편적인 세계 제국을 지향하던 당 태종, 원 세조, 청 건륭제 등에게 이러한 서역의 사상과 문화는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포용과 공존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이 하나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이처럼 다양한 외국 문화를 받아들인 중국이 왜 외국에는 자신의 사상과 문화를 수출하지 않았을까?

실크로드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대의 동서 교역로는 주로 중국이 서역에 비단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얻는 무대였다. 해상 실크로드에서는 중국의 도자기를 실은 배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빈번하게 왕래했다. 또 르네상스의 발명품으로 알려진 화약, 나침반, 인쇄술 따위 과학기술의 눈부신 성과도 사실은 중국으로부터 서역으로 '유출'된 것이다. 물질 문명의 영역에서 중국은 서양 여러 나라들에게 '넘사벽'이었다.

그러나 유교, 도교와 같은 중국 고유의 사상과 종교는 거의 국경을 넘지 않았다. 이런 중국적 사상이 영향을 준 외국은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 손으로 꼽기에도 부족하다. 물론 중국 자체가 수십 개 나라로 구성된 유럽보다 더 큰 하나의 '보편 세계'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거대한 땅덩어리를 단일 국가로 묶어낸 문화적 역량은 놀랍지만, 어쨌든 중국 밖으로 퍼져 나간 물질 문명과 달리 중국의 정신 문명은 중국의 '육체적' 영역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도교와 유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유교는 사람 간, 국가 간 불평등을 전제하는 사상 체계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질 수 없었다. 더욱이 3대 세계 종교가 공통으로 가진, 국가와 민족을 넘어 하층 민중들에게 깊은 공감을 자아내는 평등 사상이 결핍된 것은 유교의 결정적 약점이다.

유교를 숭상한 중국 왕조는 다른 나라에 중화 사상에 입각한 불평등 관계를 요구했다. 아무리 중국의 선진 문물을 동경하는 나라라 해도 자존심이 있다면 스스로 2등국을 자처해야 하는 이런 관계를 쉽게 받아들일 리 없다. 서구의 계몽 사상가들은 중앙 집권적 근대 국가의 모델로 중국을 상정하고 그 이론적 기반으로 공자의 유교 사상을 탐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계몽 사상의 진화 과정에서 시민 혁명을 거쳐 형성된 근대 사상은 유교의 한계를 훌쩍 넘어 3대 세계 종교 못지않게 전 세계에 그 보편성을 과시할 수 있는 자유와 인권의 사상이었다.

오늘날 그 서구 근대 사상의 정통을 계승한 지도 국가로 자임하는 것이 미국이다. 중국을 향한 오바마의 도발에는 중국이 그러한 보편적 가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나라라는 조롱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이 내거는 자유와 인권의 가치가 얼마나 이중적인 기준에 근거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도 오바마와 몇몇 미국인만 모르는 것 같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미국의 이중성을 극복할 '중국의 가치'로 유교의 전통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말로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탐욕과 부익부빈익빈의 세계가 등장하는 것을 묵인한 서구 근대 사상에 비해 애당초 불평등한 현실을 인정하고 들어가자는 유교는 분명 덜 위선적이었다. 유교적 가치관 아래 천자의 신민을 자처한 이들에게 중화 천하는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중국 밖의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그러한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중화주의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들이 문화적으로 열등했던 탓은 결코 아니다.

일대일로를 통해 세계의 지도 국가로 거듭나려는 현대 중국이 최근의 성공에 고무되어 전통적인 중화 세계를 복원하겠다는 꿈을 꾼다면, 실크로드를 둘러싸고 중국과 이민족들이 벌인 투쟁의 역사가 알려주듯이 그것은 일장춘몽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현대 세계의 수많은 자존심 강하고 똑똑한 민족들은 미국의 위선적인 자유 민권 사상을 넘어서는 진정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이념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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