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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요" 입장에서 본 반성과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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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요" 입장에서 본 반성과 모색 [백년포럼] 민주화 세력은 왜 좌초하였나?

새로운 백년을 모색하는 연구단체 사단법인 '다른백년' 창립준비위원회의 '백년포럼' 분과 창립포럼이 29일 저녁 7시 30분에 열린다. 서울시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410호 강당에서 진행되는 이날 포럼의 주제는 "민주화 세력은 왜 좌초하였나?-1987년의 꿈과 2015년의 현실"이다.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했던 이들이 꿈꿨던 세상과 지금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더욱 심각해졌다. 미래가 불안한 청년들은 절망에 빠졌고, 정치권에 대한 불신 역시 더 깊어졌다. 남북 관계 및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역시 긴장이 더 팽팽해졌다.


민주화 운동 세력은 과연 무엇을 이뤄낸 걸까. 이날 포럼 참가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할 내용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이부영 전 전민련 상임의장(전 국회의원)과 권형택 전 민청련 부의장, 나유경 '청년연합 36.5' 대구경북위원장 등이 이날 포럼에 발제자로 참가한다. 이 가운데 이부영 전 의장의 발제문을 미리 소개한다. 다음은 발제문 전문.

1. 1987년 6월 항쟁 전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태진전에 책임이 작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필자가 발제한다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탓이요"라는 심정으로 우리의 자화상에 엄정한 잣대를 들여 대보자는 심경으로 받아들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부분적인 민주화가 이뤄진 지 30년이 가까워오고 다시 유신시대와 다를 바 없는 시국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제대로 할 도리를 했는지"를 되돌아보고 또한 다시 같은 세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자면 머리를 마주대고 새로운 자세의 모색이 있어야한다는 주최 측의 권유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필자가 몸담고 부대껴온 분야가 언론운동과 정치적 재야민주화운동이었고 또한 정치에 참여한 탓으로 주로 정치사적인 주요 계기를 중심으로 기술한 점을 양해 바란다. 또한 객관화해야한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필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이해 바란다. 많은 토론과 비판이 제기되어주기를 부탁드린다.

2. 우리는 얼마나 준비하고 토론하고 합의 했는가

Ⅰ. 안에서

가. 민주화운동 성취 이후의 실현가능한 전망과 계획이 있었는가. 1920년대 말 신간회, 해방 전야 건국동맹의 경우에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서, 1950년대 중반 진보당 창당을 준비하던 조봉암의 ‘우리의 당면과제’ 등은 이승만 독재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모색과 실천을 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정희-전두환 군부 독재의 탄압과 감시가 심했지만 실현가능한 전망과 모색에 충실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폐쇄회로 속에서 재야민주화운동 진영 내부의 '독재vs반독재' 론과 '통일vs반통일'론이 되풀이되고 있지 않았는가. 실현가능한 모색보다는 기성 야권을 통한 정권교체론이 대세였고 청년학생들은 급진적 NL, PD론에 기울어 있었다.

자연스런 결과였지만, 1987년 6.29선언이 나왔으면 혁명적 동력의 밀물이 빠지기 전에 양김의 연대를 끌어내 4월 혁명 뒤 허정 과도정부의 경우처럼 '전두환 퇴진-선거관리 과도정부 수립운동'이 있어야 했다. 중립적 선거관리 과도정부의 수립은 양김 단일화보다 더 절박한 과제였을 것이다. 중립적 과도정부 수립 없이 분열된 양김으로 정권교체를 성취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는가. 양김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서 철수하자마자 재야민주화운동도 함께 분열하지 않았는가.

나. 가혹한 군부독재의 물리적 사상적 탄압이 있었다고는 해도 1980년대 재야민주 화운동 진영은 데탕트 시대의 정세 흐름을 기민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동서냉전을 해체하는 데탕트의 도래가 한반도의 군부독재도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상 위에 로드맵을 준비하지 못했다. 군부독재가 '6.29 직선제 수용'을 발표하자 그 한 가지 페인트 모션(기만술책)만으로 휘청거린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노태우 정권의 7.7선언, 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중국-러시아와의 수교,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와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비핵화선언 합의에 대해 공안탄압을 받으면서도 수동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한반도 화해와 평화통일 의제가 야권과 재야민주화운동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했다. 더욱이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남북문제에서 북측이 수세로 돌아선 것이 분명해졌다. 야권과 재야의 냉정한 인식전환이 요청되던 시기였다.

다. 1989~90년 세계적 대격변 즉 사회주의권의 대붕괴를 맞아 이른바 한국의 진보진영에도 사상적 전향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NL, PD 등 급진적 활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극우 보수진영, 뉴라이트 진영에 참여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데탕트 추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한국 재야민주화운동이 민주화 추세를 반영하는 다양한 보수-진보적 시민운동으로 진화했다. 생활과 생태, 통일, 노동, 교육, 여성 운동을 대변하는 많은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환경생태와 소비자 운동은 가장 괄목할 대중적 호응을 만들어냈다. 다양한 시민의 이익과 시민적 욕구를 대변하는 시민사회운동이 일어났다.


이미 전두환 정권 당시 1985년 전 국민의 울음바다 속에 있었던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세계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이념 때문에 현실에 눈 감지 말고 현실에 눈 뜨고 현실에 맞는 운동 방식을 찾아나서야 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해질 녘에야 날기 시작한다는 헤겔의 오랜 명제가 우리 경우에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줬다. 한반도는 해빙이 가장 늦게 찾아온 동토지대였다.

라. 1987년의 양김 분열을 막지 못한 것도 막중한 역사적 책임을 면치 못하겠지만 더 통렬한 한계는 '4자 후보 필승론'을 재야민주화운동 출신들이 제안했다는 것이었다. 대선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대선에 따른 지역분열 후유증을 내다보지 못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역사적 후유증을 오늘날까지 앓고 있다. 야권 진영 안에서 지금도 호남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세력교체는 어려워 보인다.

마. 김영삼의 3당 합당이나 김대중과 김종필의 지역연합-유신독재잔존세력과의 연합(DJP)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사들에게 깊은 회의감을 일으켰다. 노무현 정권 당시 2005년에 제기된 '대연정론'도 정권담당자의 자의대로 발표됨으로써 민주진영에게 깊은 내상(內傷)을 안겨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명예위원장 취임이나 DJ정권에 의한 박근혜 미래연합추진위원장의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 면담 추진 등도 그 타당성과 목적이 해명되지 않았다.

이른바 친일-독재의 원죄가 있는 극우보수 세력은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기득권 위에 단결해있는데 야권의 지도적 위치로부터 정치권 최고위직에 오른 인사들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대의를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훼손함으로써 국민들의 가치관에 혼란을 조성했다.

바. 전두환-노태우 군부세력과 김대중-김영삼 야권민주세력 사이에 합의된 '1987년 직선제 헌법'은 양김의 선거참여와 분열을 노린 5년 단임 권력구조였다. 5년 단임 대통령제는 4년 임기의 국회의원 선거와 겹쳐 국정의 혼란을 야기하는 가장 어리석은 조합이었다. 더욱이 1989년 합의되어 1991년부터 실시된 지방자치제 선거까지 겹쳐지면서 각급 선거의 주기 혼란은 국정의 정체와 후퇴를 일으키고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과 최근의 시민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가진 여야의 정치인들은 집권세력이 되면 자신들의 정치일정에만 관심을 가질 뿐, 1987년 헌법의 대통령 권력 집중에 따른 폐해를 개선하는 개헌과 각급 선거 주기의 혼란에 따른 국정 혼선에 대해 무관심하다.

시민운동들도 정권들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무시해왔다. 또한 지역주의를 조장하거나 계층적 이해를 왜곡시키며 양성불평등을 조장하는 불합리한 선거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에 대해서도 외면해왔다.

오는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 여야 정당들이 개헌안과 선거법 개정대안을 공약으로 제시하도록 정치권과 시민운동단체들이 연대하여 공동요구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사. 야권 정치세력과 시민운동의 개혁 진보적 자세는 한반도 분단대결의 부침 속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가. 이 과제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과 모색을 요구한다.

2005년의 국가보안법 파동은 지금도 계속 연구되고 검토되어야 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중고 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대해서도 예컨대 전교조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극우 보수세력은 2005년의 경우처럼 민주화-시민운동세력과 야권을 다시 ‘종북’ 프레임에 가두고 2016년 총선과 2017년의 대선을 자신들의 구도대로 승리하려 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파동 당시에도 민주화운동의 오랜 숙원인 국가보안법 폐지는 최대의 목표였다. 그러나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이 문제에 관련해서 분열되어 있었다. 그 다음 대통령 선거에 승리하고자 하는 당내 실력자들이 득표를 위해 많은 보수적인 의원들을 공천하여 당선시켰다. 이들이 국보법 폐지를 동의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의사를 대변하는 초재선 실력자 의원들은 폐지 반대론자들을 설득하기보다는 의회 안에서 농성했다. 국가보안법의 5대 독소조항인 찬양 고무 동조 회합 통신을 삭제하는 수준에서 한나라당과 합의했지만 폐지 강경론자들의 반대와 원내대표의 여야합의 무효 선언으로 개정에 실패했다. 국가보안법이 악법 그대로 존속됐다.

2005년 이후 지난 10년 동안, 더욱이 극우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가고 공안탄압, 정당해산까지 겪으면서 분단대결 조건 속에서 새삼 개혁-진보세력의 좌표를 어느 수준으로 설정해야하는가를 고심해야 하는 과제를 던졌다. 국가보안법은 폐지는 못하더라도 개정했어야 했다.

아. 중국과 러시아, 동유럽 국가들의 체제변환과 개방에 따라 분단국인 한국은 경제적으로 호황기를 맞았다. 지난 1997년의 IMF 외환 위기를 거쳤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대외무역은 미국 및 일본과의 교역 총량보다 중국과의 교역량이 많아졌다.

현재는 대외 무역의 비교우위가 사라지면서 경제 전반이 위축되고 있으며 위기감을 나타내고 있다. 재계는 성장 동력이 거의 멈췄고 저출산-노령화가 진행되는 한국사회에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위기와 대북대결 노선이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미 세계적으로 이념대결이 모두 끝났는데 국내에서 해묵은 사상논쟁을 벌이는 것을 시대착오로 본다. 북한과 핵폐기를 위한 협상을 개시하고 남북경제협력을 더 늦기 전에 다시 열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유라시아실크로드 사업을 착수하고 러시아 가스파이프라인을 DMZ를 통해 연결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제안한다.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을 북방경제에서 되찾아야한다는 주장이다. 더 늦으면 북한과 연해주 등에 한국의 진출 몫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변환기에 한반도 남녘에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냉전시대로 퇴행하는 극우 보수정권이 잇따라 등장한 것은 한반도의 불행이다.

자. OECD 가입 국가들 가운데 청소년-노인 자살률 1위,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최고 산업재해율을 보이고 있는 한국사회, 청년들이 희망을 잃고 자기들이 사는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저주하는 한국 사회, 지난 20여 년 동안 공산화의 위협은 사라진 대신 비정규직 증가, 취업난, 경쟁 가열, 탈락의 스트레스, 황혼의 공포, 범죄의 잔혹화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신자유주의가 아무 견제 없이 관철된 한국사회는 돈의 위력만이 유일한 희망이 된 정글 사회로 변했다.

이런 극단적 양극화, 빈부격차 속에 보편적 복지사회를 주장하는 시민운동, 정당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지역주의, 이념대결로는 한국사회가 당면한 해체위기를 넘어설 수 없다는 자각증상이다.

오는 총선과 대선 국면은 3김의 유산인 지역주의와 냉전분단의 유제인 이념대결이 마지막 시효를 드러내는 경연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Ⅱ. 밖으로

가. 제2차 세계대전의 미해결 전후과제로 마지막 남은 한반도 분단체제도 다시 전쟁 위기로 치달을 것인지, 아니면 극적인 평화체제로 전환할 것인지, 불안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분단체제의 남쪽 기득권에 매달리는 극우세력이 미국 및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여 중국-러시아-북한을 묶어 대결국면으로 몰아갈 경우, 우리에게는 한국전쟁 전야와 다름없는 전쟁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대결접점으로 다시 내몰릴 경우, 한국사회는 경제적 재도약의 기회를 잃고 어쩌면 제2의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을 수도 있다. 지난 50여년 힘들게 이룩한 우리의 성과물이 한 순간에 한국전쟁 당시보다 더 참혹한 잿더미로 변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안에서 이 같은 전쟁위기와 평화수호를 절감하는 인사들은 보수-진보, 남녀노소, 지역, 계층을 가리지 말고 연대하고 단결해야 한다.

나.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 확보를 위한 구체적 논의가 필요하다.

1) 미일 군사동맹에 근거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진출 기도를 사전에 막아야 한다. 한반도 분단 상황을 활용, 다시 재진출의 기회를 노리는 아베 일본을 우리 사회역량을 기울여 저지해야 한다.

2)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노력은 일본의 한반도 군사진출을 저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또한 남북협력-교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길이기도 하다.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과정에 미군의 지위 문제를 지혜롭게 다뤄야 한다.

3) 한국정부가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의 수교를 주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4) 한국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앞세우는 시민운동은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 시민운동과 연대하여 동아시아 평화운동을 전개한다. 미래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국가연합)를 전망하며 민간(NGO)운동을 전개한다.

다. 한국정부와 시민운동에게는 한국이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변수가 아닌 상수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남북관계, 북핵폐기 협상을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 주도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자신감을 가질 때라야 가능하다. 남북사이의 신뢰를 가지고 우선적 선린관계를 수립한다는 기본원칙이 세워져야 한다. 한반도의 화해협력이 성취될 때라야 동아시아 평화가 가능하며 동아시아 평화를 거쳐 한반도의 평화통일도 가능하게 된다는 기본인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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