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국가 개조 프로젝트'였던 4대강 사업, 그리고 7년. 그동안 아픈 눈으로 강과 강 주변의 변화를 지켜보았고, 그 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으며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지율 스님과 예술가들이 '4대강 기록관'을 지으려 합니다. 기록관은 모래강 내성천의 개발을 막기 위해 내성천의 친구들이 한평사기로 마련한 내성천 하류, 낙동강과 인접한 회룡포 강변 대지 위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 연재는 기록관 짓기에 함께할 여러분을 초대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
_<로드>, 코맥 매카시
작년 겨울 다시 찾은 내성천은 늦봄의 목가적인 풍경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갯버들은 목이 비틀어졌고 강은 군데군데 얼어붙어 흐름이 더뎠다. 봄에 한번 그랬듯 지율스님을 따라 모래 강변을 맨발로 걸었다. 스님은 모래가 차서 동상에 걸릴 수도 있으니 어서 신발을 신으라 권했고, 나는 두 손에 신발 한 짝씩을 든 채 양말에 모래가 들러붙는 게 싫다고 대답했다. 진흙과 얼음에 진로가 막힌 강을 느린 걸음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율 스님은 해매다 유실되는 모래와, 생명력을 잃어버린 강의 높이와, 늪이 되어버린 금모래밭에서 자라는 갯풀과 모래알 사이에서 밟히는 밟히는 자갈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눈에 비친 삭막함이 정말로 강이 죽어가는 탓인지, 해마다 순환하는 봄의 소생이 강렬하고 유일한 인상으로 남았던 탓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답사 내내 살아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귓전에서 엥엥거렸다. 바람은 마치 사람이 울듯이 울었다. 혹시 정말로 사람의 울음 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는 것인지 잠시 귓바퀴를 세우고 둘러보았지만 움직이는 것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바람이 곡소리를 낸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는 의심을 쉽게 거두었다. 강둑 위 스님 거처로 돌아와서야 나는 그것이 진짜 여인의 곡소리였음을 알았다.
인근 동호마을의 남성이 강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동행하던 기자가 소식을 듣자마자 자전거 두 대를 구해왔다. 그를 따라 현장을 향해 바로 출발했다. 나는 죽은 자의 비극이 수몰예정지구로서 마감이 다가온 마을의 수명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라 직감했고 아마 기자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현장까지는 몇 킬로미터 거리였다. 여인의 나이를 식별할 수 있을만큼 곡소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나는 머릿속으로 비정한 상상을 펼쳤다. 정말로 그 먼 곳까지 곡소리가 들렸던 것일까? 그렇다면 곡소리에 담긴 여인의 슬픔이 그렇게 컸던 것일까? 아니면 강이 낸 좁은 길을 따라 몰려다니는 바람이 곡소리의 회절과 산란을 막았던 탓일까?
이미 경찰차가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허술한 경계를 비집고 들어갔다. 강물에 떠내려와 모래밭에 걸린 채로 발견된 사람은 오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등산복 차림에 신발까지 신고 있었다. 피부가 서리 돋아난 것처럼 하얬지만 색이 변하거나 물에 불어 훼손된 흔적은 없었다. 망자는 그저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뻣뻣하게 굳은 시신을 품에 끌어 안고 악받힌 울음을 울었고, 마을 주민 몇 명이 강둑 위에 뒷짐을 지고 서서 혀를 찼다. 감히 유족에게 다가가 호기심을 채울 수는 없었으므로 주민 한 사람을 붙잡고 어쩐 일인지 물었다. “집안일입니다. 제발 돌아가시오.” 주민의 대답은 짤막했고, 경계의 눈빛으로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기자는 굳이 프로답게 대응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섰다. 나는 그를 따라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발을 돌려 스님의 거처로 되돌아왔다. 주민의 적개심은 어쩐지 정당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생각날 때마다 검색해 보았지만, 그날 내성천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기사는 발견할 수 없었다. 관광객이 아닌 주민의 죽음이라 기사로 담기 어려운 어떤 사정이 있었으리라. 가솔을 잃은 가족의 삶도 똑같이 계속되는 것인지. 그날밤 나는 버려진 민가에서 잤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두텁게 눈이 내렸다. 마을은 설몰(雪沒)되었다.
봄햇살에 부서지는 초록의 빛깔이 예뻐 주로 봄을 담았다는 지율스님의 <모래가 흐르는 강>으로 나는 내성천을 접했다. 그해 봄, 나는 처음으로 내성천을 방문했었다. 풍광은 영상 그대로 아름다웠고, 그리하여 나는 늦봄의 훈풍과 저녁을 밝히던 은은한 등불과 사그락거리는 모래 위에 주저앉아 두런두런 나누던 잡담으로만 내성천을 기억했다. 내 머릿속에서 그곳은 늘 봄에 머물러 있었다. 작년 겨울 목격한 을씨년스러운 죽음은 내성천에 대한 내 기억은 물론이고, <모래가 흐르는 강>마저 모래처럼 무생물적인 기록은 아니었나 되돌아 보게 했다. 내가 아는 것은 사라져가는 것들의 이름과, 추상적인 아름다움과, 그 숫자였다. 구체적인 삶의 분위기가 아니라. 지난 봄의 기억 속에서도, <모래가 흐르는 강>의 기록 속에서도 삶의 모습은 정지된 채 윤곽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지율 스님의 두번째 다큐멘터리인 <내성천, 물 위에 쓰는 편지>는 전작이 스쳐 지나갔던 삶과 생명의 틈에 관한 기록이다. 카메라는 물보다 물가를, 물가보다 제방 위에서 소멸해가는 생명들을 더 많이 담아낸다. 무르익은 봄 대신 삶의 한 주기가 저문 늦가을에서 겨울까지 촬영한 영상은 전작보다 덜 화사하여 도리어 더 큰 종교적 생명력이 느껴진다. 화면에 담긴 피사체부터 계절과 배경까지 하나같이 촛불처럼 꺼져가는 것들이다. 공간을 훑는 대신 시간을 묵혀서 선택한 결과인 것일까?
한 해 한마리꼴로 발견된다는 붉은 부리의 먹황새는 폭설을 헤치며 먹이를 구한다. 사람이 떠난 빈집에는 진돗개 한 마리가 철목줄이 묶인 채 버려져 낑낑거린다. 숲그늘이 드리워진 모래강 위로는 천연기념물인 원앙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물가에서는 고라니 무리가 조심스럽게 목을 축인 뒤 총총 걸음으로 달아난다. 수풀 사이에서는 점박이 삵 한 마리가 몸을 잔뜩 웅크려 포복하고 있다. 보랏빛으로 물든 서녘하늘은 산허리에 붙들려 희미해지고, 초저녁 민가의 아궁이 연기를 쫓아 반딧불이가 몰려든다. 스님이 면도날로 조용히 머리를 미는 강뚝의 천막 안으로 멸종위기종인 물떼새 한 마리가 소낙비를 피해 날아든다. 바지를 적셔가며 냇가에 뛰어든 아이들이 검은물잠자리를 붙잡는 동안, 뒷편 산기슭에서는 굴삭기가 망설임없이 땅을 파헤친다. 벌써 굴삭기가 밀고 지나간 말라붙은 철거터에는 허리가 구부정한 할매들이 그새 밭을 꾸렸다. 밀양의 기억이 잠시 스쳐지나간다. 왜 항상 사라져가는 땅에 남는 마지막 사람은 할매가 되는지.
추석 쇠러 갈 데도 올 사람도 없다는 할매를 찾아 쌀과 떡을 들고 찾아오는 이는 가족이 아니라 수자원 공사의 공무원들이다. 기분이 조금 들뜬 할매는 뭔지도 모를 합의서에 지장을 찍어 내준 뒤에 고집스러운 한 마디 말로 종이에 적힌 계약을 철회한다. "가긴 어딜가, 죽어도 여기서 죽을라 칸다. 물들어오면 생목숨 죽든. 이런 놈의 꼬라지가, 세월도 무슨 놈의 세월이 내대로도 못살구로 하이." 콩밭 가을걷이를 끝내자마자 쓰러진 할매의 집에 다시 굴삭기가 들이닥친다. 70년된 집이 한 시간만에 허물어진다.
<물 위에 쓰는 편지>는 물과 함께 사라져가는, 물에 의존한 삶의 양식의 기록이다. 몇년 전 인터뷰로 만난 지율 스님은 나에게 스스로 '생태주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며, 그건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붙여준 이름일 뿐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었다. 동체대비(同體大悲), 살아있는 모든 것은 뿌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나섰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물 위에 쓰는 편지>는 식단을 관리하는 영양사처럼 생태적 이득을 계산하지 않고, 인간의 생존과 짐승의 생존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기색이 없는 불가적 시선의 다큐멘터리다. 스님이 영상 말미에야 물 위에 띄운 짤막한 편지의 내용에 할 말이 다 담겨 있다.
물맑은 내성천 금모래 강변과
그 안에 깃들던 모든 것이
지금 우리 곁에서 떠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염원을 물 위에 쓰고
우리의 기도를 바람에게 전한다.
비옵나니,
헤매는 마음들을 헤아림 하시어
두려움에 떠는 이 땅의 모든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이들에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강과 하늘을 지켜가게 하소서.
금모래 강변에 깃들던 모든 것들. 지율스님에게 내성천의 모든 사물은 하나의 범주를 지키다 소멸해가는 마지막 사례로서 띄엄띄엄하지만 대등하게 엮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철거 공문이 떨어진 지율 스님의 움막과 컨테이너 전시실 역시 이 운동을 간신히 범주로 성립시키는 우리 세계의 마지막 사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거를 목전에 둔 게 과연 무엇인지는 조금 더 기다리며 살펴보아야할 것 같다. 올해, 스님은 영주댐을 철거하라는 소송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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