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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의 쌍용차 출근, 공장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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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의 쌍용차 출근, 공장이 무섭다" [박점규의 수다] 복직 한 달, 김정운 쌍용차지부 전 수석부지부장

그동안 <프레시안>에서 '박점규의 동행'을 연재했던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이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박점규의 수다'는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노동자, 이들과 함께 연대해온 사람들을 만나 막걸리 한 잔 하면서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누는 '속 깊은 인터뷰'입니다.

쌍용자동차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향한다. 7년 만이다. 2월 한 달 동안 이론과 현장 적응 교육(OJT)을 마치고 부서를 배치 받아 3월 7일 소속 부서로 출근했다. 쌍용자동차 김정운 전 수석부지부장(46)은 일손이 빈 공정에 파견되는 혁신팀 소속으로 배치 받았다.

꿈에 그리던 일터로 돌아갔는데, 화사해야 할 그의 얼굴이 그늘져 있다. 숨이 막히고 가습이 답답하다고 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표정이 어둡다. 연거푸 막걸리를 들이킨다.

김정운 전 수석부지부장은 1년 넘게 진행된 해고자 복직 노사 교섭의 실무 책임자였다. 지난 12월 30일 노사는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들이 복직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해고자 30%, 희망 퇴직자 30%, 신규 채용 40%의 비율로 채용하기로 했다. 손해 배상과 가압류를 철회하고, 희망 기금 15억을 조성하기로 했다.

노사 합의에 따라 회사는 40명을 채용했고, 해고자는 비정규직 6명을 포함해 18명이 복직했다. 회사는 티볼리 롱바디가 출시되고 잘 팔려 인원이 필요하거나, 주야 맞교대 근무가 주간 연속 2교대로 바뀌는 시점에 추가 채용을 하겠다고 했다.

7년 만에 복직, 그러나…

"지난 12월 12일 잠정 합의안에 대한 찬반 투표를 묻는 총회가 열렸어요. 창근이가 그래도 가결되지 않겠느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쉽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차라리 부결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죠."

총회 결과는 찬성 58명, 반대 53명이었다. 찬성률 52%. 복직 시한을 명시하지 않은 '기약 없는 기다림'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었다. '죽는 것' 빼놓고는 다 해 봤는데, 고작 이런 합의를 하려고 7년을 싸웠냐는 원망이었다. 찬성 발언은 없었고, 지도부에 대한 성토가 이어진 총회였다.

▲ 김정운 전 쌍용차지부 수석부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그는 왜 이런 합의문에 동의했을까?

"저는 어떻게 해서든 합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회사는 합의 안 해도 좋다는 태도였거든요. 설령 사람이 필요하면 알아서 뽑아 가면 된다는 식이었죠. 1년 동안 교섭을 하면서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급할 건 없다는 자세였어요. 또 우리 집행부 임기가 끝났는데, 교섭을 결렬시키고 나면 도대체 누가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컸어요."

2014년 12월 13일 김정욱 사무국장, 이창근 기획실장이 공장 안 70미터 굴뚝에 오르고, 마힌드라그룹 아난드 회장이 한국을 방문해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을 만나면서 65개월 만에 해고자 복직을 위한 교섭이 열렸다. 공장 안팎에서 교섭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회사는 진정성 있는 안을 내지 않았다. 복직 대상과 기한을 명시할 수 없다는 입장만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교섭을 결렬시키지는 않았다. 노조도 교섭을 깨지 못했다. 교섭 결렬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 것이 두려웠다. 다시는 교섭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우리가 교섭을 결렬시켰으면, 회사는 우리를 빼고 기업노조와 합의를 했을 거예요. 그러면 해고자들은 우리가 아니라 회사와 기업노조에 줄을 서게 되는 것이었죠. 그러면 7년의 싸움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고요. 교섭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지만, 여기서 최소한 복직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일부 해고자들이 공장에 들어가서 또 다른 싸움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최소한 복직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생각

지난해 12월 11일, 노조 교섭위원들이 회사와 만나 잠정 합의안을 마련한 후 조합원 30여 명이 모였다. 생계에 나가지 않고 노조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선도투'라고 부르는 핵심 조합원들이었다. 잠정 합의안을 총회에 부칠 것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전체 의견으로 총회에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묻기로 했다.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총회에 붙이지 않겠다고 했어요. 우리가 7년 동안 같이 하면서 같이 책임지기로 한 거고, 가결이든 부결이든 함께 하기로 한 것이었죠. 그런데 다음날 총회에서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어요. 반대하는 투표를 할 수는 있지만, 함께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아쉬웠죠."

총회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그의 얼굴이 굳어진다.

사실 해고자 복직에 대한 노사 간의 이견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는 합의에 이를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봤다. 특히 회사는 비정규직 문제를 풀 의지가 전혀 없었다. 김득중 지부장이 공장 앞에서 단식을 할 때였다. 농성장을 찾은 최종식 사장은 경총이 반발하고 있다며 어렵다고 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손해 배상 가압류 철회는 쌍용차를 넘어 전체 노사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쟁점이었다.

"제가 교섭에서 얘기했어요. 인간적으로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 7년 동안 같이 했는데, 비정규직 동생들한테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양보해 달라고 할 수 있겠냐. 비정규직이 교섭의 걸림돌인데 니들은 법으로 이길 거니까 법으로 가라, 이렇게는 못한다. 내가 복직을 안했으면 안했지, 노사 문제를 떠나 인간적으로 이럴 수 있냐고 했어요."

그 무렵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체불 임금을 포기할 수 있다는 의사를 알려왔다. 비정규직 조합원 6명 중 4명은 회사를 상대로 '정규직 지위 인정 소송(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해서 1심에서 승소했고, 2심 판결을 앞두고 있었다. 2명은 뒤늦게 소송을 냈다. 서맹섭 지회장이 동료들에게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교섭의 물꼬를 트기 위해 체불 임금을 내려놓자는 것이었다. 1인당 4억 원에 이르는 큰 금액이었다.

비정규직 1인당 임금 4억 원을 포기하는 조건

대신 두 가지를 전제 조건으로 걸었다. 조합원 6명 모두가 정규직이 되어야 하고, 불법 파견을 인정받는 핵심인 근속을 온전히 인정받는다는 조건이었다. 사내하청업체 입사일로부터 2년이 지난날부터 그 때 입사한 정규직과 똑같은 근속과 호봉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14년 8월, 2015년 5월과 9월 현대차와 기아자동차 노사는 하청 업체 근무 기간을 2~3년에 1년만 인정하는 '변종 신규 채용' 합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서맹섭 지회장은 "다른 비정규직 사내 하청 노동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합의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회사도 예상하지 못한 제안으로 교섭은 급물살을 탔다. 노조는 "협력 업체 입사일 2년 경과시부터 본 합의서에 따른 채용일까지의 기간을 근무 경력으로 반영"하기로 합의서를 작성하고,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사내 하청 업체 입사일, 고용간주일, 근속연수, 직급 호봉까지 표를 만들었다.

▲ 현대차에서 공개한 쌍용차 합의서. ⓒ프레시안
그런데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노사가 공개하지 않기로 한 비정규직 합의서가 한 달 뒤 현대자동차에서 공개됐다. 현대차는 쌍용차 합의서가 '근속을 인정한 정규직 전환 합의서'가 아니라, '경력을 인정한 신규 채용 합의서'라고 주장하며, 쌍용차 합의서에 빨간 펜으로 주석을 단 '괴문서'를 만들어 돌렸다.

- 고용간주일 → 법적 고용의제일일뿐 쌍차 고용 간주일이 아님.
- 근속 연수 → 근무 경력이지, 근속 인정 아님.
- 직급 호봉 → 호봉 책정을 위한 테이블일 뿐임.

당시 현대차는 비정규직노조와 '불법 파견 특별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핵심 쟁점은 근속과 공정을 법원 판결대로 인정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불법 파견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대차가 쌍용차의 합의를 왜곡하는 문서를 만들어 돌린 것이었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노조 간부들은 "회사는 아니라고 하는데 쌍용차가 근속을 100% 인정한 합의서가 맞느냐?"는 확인 전화를 했다. "그럼 회사한테 쌍용차처럼 합의하자고 하면 될 거 아니냐?"는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현대차는 며칠 후 근속을 절반만 인정하는 합의를 했다가 조합원 총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김정운 전 수석부지부장은 "정규직 합의는 부족하지만, 근속을 온전히 인정받은 비정규직 합의가 이루어져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고, 너무 뿌듯했다"고 말한다. 그는 비정규직 합의서는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한 합의서라고 생각한다.

현대차에 돌아다닌 쌍용차 합의서

잠정 합의안이 통과된 총회 이후 김정운은 사무실에 나오지 않았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가족과 약속한 여행도 하루 만에 발길을 되돌렸다.

"합의 이후 너무 답답하고 힘들어서 술만 먹었어요. 정말 괴롭더라고요."

쌍용차지부는 우선 복직자를 선정하기 위한 기준을 만들었다. 조합비 납부와 참여도 90점, 징계 해고자, 형사 처벌 대상자, 77일 파업 당시 부상자에게 각각 5점의 가점을 주기로 했다. 그는 2009년 당시 정리 해고 명단에 없었지만, 교육선전실장으로 77일간의 파업을 이끌었고 징계 해고를 당했다.

▲ 그는 2009년 당시 정리 해고 명단에 없었지만, 77일 파업을 이끌었고 징계 해고당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는 복직할 생각이 없었다. 총회에서 복직하지 말고 끝까지 책임을 지라고 말한 조합원도 있었다. 그는 집안 문제로 노조 지도부를 맡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김득중 지부장이 자신이 가장 마지막에 복직을 할 테니, 그에게 가장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공장에서 역할을 맡아달라고 했다. 고민 끝에 그는 지부장의 제안을 받아 복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를 포함해 19명의 징계해고자 중에서 5명이 복직됐다.

"저는 징계 해고자들이 우선 복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예우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선 복직도 아니고,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해고를 당하지 않았는데도 동료들을 위해 싸우다 징계 해고를 당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업장에서 누가 싸우겠냐는 생각이었죠."

며칠 전 복직한 18명이 모여 1인당 매달 30만 원을 노조(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에 내기로 했다. 어려운 단체들 달달이 후원하는 금액도 많은데, 십일조에 가까운 금액을 내기로 결의한 것이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복직자들이 의견을 모았다.

▲ 77일 파업하고, 7년 만에 돌아간 공장은 어떨까? 그는 최근 복직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김득중 지부장이 자신이 가장 늦게 들어간다고 결의했는데 정말 훌륭한 거죠. 그런데 생활비를 100만 원도 못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복직자들이 1인당 30만 원 내면 노조 간부들 생계비 절반 정도는 책임질 수 있을 거라고 얘기했더니, 모두들 흔쾌히 동의하더라고요."

기업노조의 현장 조직에도 가입하지 않기로 했다. 3년 전에 공장으로 돌아간 무급 휴직자 455명은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그 때 그 사람들을 빨리 조직해서 노조와 관계를 맺고, 최소한 얼마라도 내자고 했다면 달라졌을 텐데 그게 무척 아쉬워요."

1차 복직자 18명의 대표는 비정규직 출신인 서맹섭이다.

"18명이 처음에 어떻게 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손톱만큼의 힘이라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게 먼저 복직한 우리들의 역할이겠죠. 저 사람들 일 잘 하더라, 나머지 들어와도 잘 하겠구나, 복직자들 똘똘 뭉쳐있구나, 이런 인식을 줘야 한다고 봐요."

쌍용차 합의가 부족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150명이 넘는 조합원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7년 동안 싸웠던 주요 간부들은 설득하지 못했다는 건 뼈아픈 일이다. '2017년 상반기까지 복직되도록 노력한다'는 합의는 아무런 법적 구속력을 가지기 어렵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로 언제 복직이 이루어질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노조는 소송을 모두 취하했는데, 회사는 개인에 대한 손해 배상 가압류만 취하하고, 금속노조에 대한 손배는 취하하지 않았다. 복직 신청자를 두 배수로 추천하도록 해 해고자들끼리 경쟁하게 만든 것도 큰 상처를 줬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고, 사람 만나는 게 두렵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어요. 내가 이러려고 7년 동안 복직 투쟁한 게 아닌데 싶었죠. 하지만 앞으로는 미안한 마음을 안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내가 다른 해고자들이 빨리 복직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활동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부족할 수 있고 보는 입장에 따라서 여러 가지 평가가 있겠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조건, 우리 힘을 봤을 때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본다"고 말한다. 그가 막걸리를 다시 들이킨다. 합의 과정에서 겪었던 아픔을 씻겨내고, 이른 시간 안에 해고자들이 모두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마음을 추슬러 다시 길을 나설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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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서 선전홍보, 단체교섭, 비정규직 사업을 담당했습니다.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사회적 기구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2010년 11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25일 점거파업에 함께 했고, 이후 한진중공업, 현대차 비정규직, 밀양 희망버스에 함께했습니다. 저서로는 <25일>, <노동여지도>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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