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조선물산장려회 활동이 재점화할 조짐을 보이자, 일제의 방해와 탄압이 시작되었다. 최태영 박사의 물산 장려 운동 강연에 대한 회고다.
"(조선물산장려회) 강연하는 날이면 종로경찰서에서 조선인 사상범을 감찰하는 일본인 미와(三輪) 형사가 연단에 버티고 연사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칼자루를 잡았다 놨다, 연신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연설 내용을 감시했다. 등 뒤로 그런 움직임이 일어난 것 같으면, 과격한 말을 얼른 돌리곤 (순화시켜서 표현하곤) 하였다." (최태영, '광산 이야기와 제2차 물산 장려 운동', <대한민국학술원통신>, 제144호, 2005년, 8쪽)
정세권 역시 일제의 강압을 기억하고 있다.
"(낙원동 300번지가 조선물산장려회 본점이 위치한 관계로) 관할 종로경찰서에서 본인을 호출하여 말하기를 '네가 조선 물산을 장려함은 실상 조선 독립 운동이 아니냐’고 힐난하였다. 본인은 이에 대해 ‘오사카 사람이 오사카 물산을 장려하고 아이치 사람이 아이치 물건을 장려하는 것도 오사카 독립이요 아이치 독립이라고 할 수 있나? 우리는 조선인으로 낙오된 조선 물산을 장려함이 경제 생활상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러니 고등계 형사도 하등의 행동을 입증할 수 없어서 주의만 주었다." (유광렬,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의 전모–민족 운동사 측면사', <인물계>, 1권 2호, 1964년)
일제가 물산장려회 활동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서도, 정세권은 전폭적으로 물산장려회의 재정을 부담하고 운영을 진두지휘한다. 특히, 그의 재정 기여는 놀라울 정도였다.
앞선 연재에서와 설명하였다시피, 회관 건축 비용 관련 총 2만 원 중 건물 건설 비용에 1만5000원, 토지 매입비에 5000원이 들어갔다. 당시 낙원동 지역은 경성 요지이었기에 5000원은 상당히 큰 거금이다.
재정에 그가 얼만큼이나 기여를 했는지는 물산장려회 운영비를 분석하면 알 수 있다.
단위 : 원(圓).전(錢)
1929년도(1929.8.8-1930.5.15) | 1930년동91930.5.16-1931.4.5) | ||
수입 | 지출 | 수입 | 지출 |
통상회비 90 특별회비 35 회부수입 22.18 광고료 349.35 특별수입 150 차입금 1,220 | 회관세 104.30 수당금 270.60 비품비 7.40 회보비 1,304.29 소모비 113.21 현금 66.73 | 회비 436.18 광고료 1,002.49 차입금 2,450 | 수당금 541.78 선전비 1,596.23 회관세 524.41 (회보비?) 1,216 |
합계 1,866.53 | 합계 1,866.53 | 합계 3,888.67 | 합계 3,878.42 |
(조선물산장려회, <朝鮮物産奬勵會報>, 1930년, 41~42쪽 ;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 사상>(방기중 지음, 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 2010년), 114쪽 재인용)
정세권이 본격적으로 물산장려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1929년의 수입을 보면, 회비(통상 회비와 특별 회비) 125원, 회부 수입 22원, 광고 수입 349원, 특별 수입 150원, 차임금 1220원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바로 회비의 총액이다. 모집된 회비가 겨우 125원에 불과할 정도로, 물산장려회가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이후 물산장려회가 자리를 다시 잡기 시작하면서, 이듬해인 1930년 436원으로 크게 늘어난다. 그런데도 1929년 회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총 수입(1866원) 중 차입금(1220원)의 비중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물산장려회를 운영하기 위한 비용(1866원)만큼은 어디선가의 수입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런데 지출을 모두 메꾸기에는 회비와 회부 수입, 광고 수입, 특별 수입은 턱도 없는 액수였다. 그렇기에 상당한 비용을 차입금(손실 부족금)으로 충당하였다.
1930년에도 상황은 비슷하였다. 사업의 활발한 탓에 지출이 늘어났다(1930년도의 지출은 3878원). 하지만, 비록 회비와 광고비가 늘었다한들, 기록적인 증가로 모든 지출을 감내하기는 어려웠다. 1930년에도 상당한 규모의 외부 차입금(2450원) 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조직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이 부족한 부분을 메꿔야 하는데, 이 부분을 정세권이 부담하였다. 2년간 그가 부담한 금액은 확인된 것만 3670원에 이른다. 낙원동 300번지의 토지 가격이 5000원임을 고려할 때, 그의 재정 부담은 상당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물산장려회 운영비의 60~75%를 그가 부담하였다고 한다.
전세계를 불어닥친 대공황기, 조선 역시 경기 불황 속에 부동산 시장은 침체기에 있었다. 그 와중 그는 조선물산장려회에 어마어마한 거금을 투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 환경의 악화로 인해 본인 사업이 정체된 가운데, 조선물산장려회에 자금을 쏟아붓고 있었으니, 제 아무리 대자본가라고 한들 재정적 타격은 피할 수 없었다. 특히, 그는 건양사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 이외에도, 조선물산장려회를 돕기 위한 별도의 회사, 장산사를 설립하였고, 장산사라는 기관을 통해서 물산 장려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건양사의 경영 상태는 악화되어 자본금이 8만 원으로 줄어들었고, 부채액이 10만 원에 이르렀다고 그는 회상한다. ('사고', <실생활>, 제3권6호, 1932년 6월)
1928년 정세권이 조선물산장려회에 적극적으로 간여하면서 전무이사로서 물산장려회 실무를 실제 경영하여, 많은 족적을 남겼음에도 그 사이에 내분은 지속되고 있었다. 정세권을 위시한 상공업자 측은 실용적인 부분으로 더 나아갈 것을 원했으나, 민족주의 명망가 그룹은 물산 장려 운동을 보다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할 것을 원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의 변모를 보면 알 수 있는데, 1929년 10월에 창간한 <조선물산장려회보>는 1931년 1월 <장산>으로 바뀐다. 장산으로 바뀐 연유는 회보를 잡지로 혁신한 것이었고, 내용면에서 일반인들이 보편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하고 관심이 갈 만한 내용으로 한약계 귄위 기관 순례기, 모범상공대가 소개 등 상업공업자를 소개하는 것들을 실었다. 정세권이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위해 세운 별도의 회사 명칭이 장산사인 것에 알 수 있듯이, 기관지 <장산>은 정세권에 의해 기획 편집 발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장산>은 1931년 6월까지 6호를 발행하고 곧 <신조선>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편집 방향에도 변화가 오는데, <장산>에서 보여줬던 실용적인 내용은 많이 없어지고, '소비에트 5개년 계획', '필리핀의 독립운동', '최근 영국의 정변'과 같은 시사적이면서 민족 의식을 진작시키는 기사들의 빈도가 높아진다. 이에 정세권은 별도의 기관지 <실생활>을 1931년 8월에 창간하여 실용적 노선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한국 독립 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31~132쪽)
정세권의 실용주의 이사진과 명망가들 위주의 (구)간부의 의견 차이가 확대됨에 따라, 1932년 8월 정세권의 장산사는 물산장려회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정리한다. ('물산장려회상무이사회', <매일신보> 1932년 6월 23일) 조선물산장려회관이 완공된 시기(1931년 9월)로부터 불과 1년만에 파국을 맞이한 것이다. 조선물산장려회는 1932년 9월 종로2정목으로 회관 이전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물산장려회상무이사회', <매일신보> 1932년 12월 2일)
정세권이 조선물산장려회를 나온 이후, 물산장려회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1930년대 주요 활동 (이사회, 간담회, 총회 등) 횟수를 세어보면, 1930년 초부터 1932년 9월까지(정세권이 활동한 시기)에는 총 10회가 개최되어 주요 안건들이 처리되었으나, 그 이후에는 1934년 1회의 간담회와 1934년 1회의 상무이사회 개최가 전부이다. (<한국 독립 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26쪽) 조선물산장려회의 마지막 기관지 <신흥조선>은 1934년 1월 마지막 호를 발간하였다. (<한국 독립 운동의 역사 36 : 경제 운동>(오미일 지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펴냄), 2009년, 123쪽) 정세권 선생과 조선물산장려회가 공식적으로 이별하면서 물산장려회는 빠르게 세가 위축되어 버린 것이다. 빈사 상태에 빠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런 미약한 활동은 재정 부담으로 인한 것으로도 보이는데, 당시 일간지에는 조선물산장려회 회비 납부를 독촉하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비록 정세권이 조선물산장려회와 비공식적으로 관계를 끊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관계를 정리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후에도 물산장려회 이사직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의 기둥이었던 그의 동지, 이극로 박사 역시 당시 새로이 이사로 선임되었던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서, 정세권 선생이 조선물산장려회와 모든 관계를 끊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934년 정세권은 상임이사였다.) ('사고 독자필독', <실생활>, 제3권12호, 1932.12)
조선물산장려운동에 대한 정세권의 지원은 재정적 지원과 더불어 실제 운영을 담당하는 등, 전사적 차원에서 매달린 총력 지원이었다. 이는 불가피하게 건양사 경영 상황을 위기로 빠지게 할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회사를 희생하면서까지 그가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을 지원했음에도 내분으로 인해 그가 조선물산장려회와 공식적 관계를 일정 정리한 것은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의 미래를 생각할 때 뼈아픈 대목이었다.
비록 그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는 받지 못하였다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남긴 족적을 의식하지는 못하나 경험하고 있고 열광하고 있다.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조선 소상공인들의 물건 생산과 판매, 소비를 장려하였듯이, 그는 그가 만든 제품(근대식 한옥)을 개발/생산하여 일반 대중들이 소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근대식 한옥 집단 지구를 경성 전역에 건설하여, 경성 전체에 집(한옥)을 물산 장려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건설한 북촌, 인사동, 익선동, 봉익동, 서대문, 창신동, 혜화동, 성북동, 왕십리의 근대식 한옥 집단 지구는 조선 물산 장려 운동 정신(우리 것을 소비하자)이 주택으로 표출된 것이다.
비록 20세기 이전 양반 귀족들의 저택을 쪼개서 만든 작온 한옥들의 집합체라 또는 집장사들이 만든 집이라는 오명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근대 한옥 집단 지구가 내포한 의미는 도시 계획사적으로 도시 개발사적으로 그리고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이라는 독립 운동사적으로 그 의미는 매우 높고도 깊다.
최태영 박사의 평가다.
"그는 좋은 사업가였다. 소목, 대목, 토목, 미장, 문 만드는 이, 구들장 놓는 이 등 집짓는 기술있는 건축가들을 많이 모아서 조합을 만들어 가지고 사업을 하는데, '집부터 일본집 짖지 말고 한옥을 짖자, 초가집 없애고 깨끗한 것 짖자'고 하였다. 즉, 서울 전체에 집을 물산 장려한 것이다." (최태영, '광산 이야기와 제2차 물산 장려 운동', <대한민국학술원통신>, 제144호, 2005, 8쪽)
조선물산장려회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후, 그는 더 위험한 민족 운동에 투신한다. 조선어학회를 후원하기 시작한 것인데, 이는 목숨을 건 독립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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