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 대외정책의 기조였던 먼로 독트린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방어적 외교전략이었다. 20세기를 통해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유일한 슈퍼파워로 군림하고 있는 지금과는 다른 시절이었다.
남북전쟁 후 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이룩한 뒤 미국은 공세적 대외전략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이 때 첫 목표로 떠오른 것이 플로리다 턱밑에 있는 쿠바였다. 스페인과의 전쟁(1898)으로 쿠바를 독립시키면서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든 것이 20세기 미국 팽창정책의 신호탄이었다.
1959년 카스트로 영도의 공산혁명으로 쿠바는 60년 만에 미국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 영향력 상실이 뼈아픈 손실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후 40년간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대외정책의 지상과제로 삼았다. 특공대를 보내 무장봉기를 지원하는가 하면 가혹한 경제제재를 가하기도 하고 소련과 사이에 심각한 미사일 위기를 겪기도 했다.
쿠바정권 전복을 위한 미국 정책의 하나가 난민 환영이다. 다른 나라 이민은 까다롭게 따지면서도 그 '지옥 같은' 카스트로 정권을 탈출하는 쿠바인들만은 '인도적' 견지에서 너그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공산정권을 싫어하는 부자들과 고급인력을 뽑아내 쿠바를 껍데기만 남긴다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카스트로 정권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난민 환영 정책을 조롱하듯 수십만의 보트 피플을 바다로 내모는 등 인구 수출 정책으로 대응했다. 미국은 명분 때문에 수백만의 쿠바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거대한 난민집단은 미국 사회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자라났다.
엘리안 소년의 거취를 놓고 이 부담이 한 차례 불거지고 있다. 어머니에 끌려 밀항하다가 바다에서 어머니를 잃은 이 6세 소년을 쿠바의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인도적 관점에서의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인도적' 견지에서 미국이 받아들인 쿠바인 집단이다. 아버지 없이라도 자유세계에 사는 것이 엘리안에게 행복한 길이라며 미국 정부와 법원의 결정에 맞서고 있다.
40년 만에 화해를 추구하는 두 나라 사이에서 설 땅을 잃고 있는 망명 쿠바인들이 양국 간의 갈등을 빚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고 외부인들은 본다. 우리 반공교육에서는 공산체제의 비인간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들이 아버지를, 아내가 남편을 고발하는 세상"이라 가르치기도 했다. 자유와 반공을 외치는 망명투사들이 여섯 살 어린이의 인륜을 가로막고 있다니, 인간성을 마비시키는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2000년 4월)
40대 이상 독자들은 1983년의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 검색해 보니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KBS에서 453시간 45분의 방송이 나갔고, 10만여 건의 신청이 접수되고 1만여 명이 가족을 만났다고 한다. 이런 수치로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 온 국민의 흥분과 감동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시청률이 78%까지 올라간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1950~53년의 전쟁 중에 가족을 잃었다. 사별(死別)도 있었지만 생이별도 있었다. 생이별 중에 남북으로 갈라진 경우도 있었지만, 같은 남한에 살면서 서로 찾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1983년까지 30년 동안 남한 내에서도 가족 되찾기가 왜 그리 힘들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소셜미디어가 발달해 있지 못했다든지 하는 기술적 문제로 충분히 설명이 안 된다. 캠페인이 벌어졌을 때의 열렬한 호응을 보면, 가족 찾기의 길이 있기만 했다면 당사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 길을 찾았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가. 반공독재 정권 때문이었다. 생이별을 겪은 사유 중에는 드러날 경우 반공정권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위험이 내포된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분위기는 우리 집에서도 느낀 일이 있다. 형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경찰인지 정보부인지에서 조사를 나왔고, 전쟁 중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망을 가장하고 잠적한 것이 아니냐고 따지는 바람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신 일이다. 꼭 한 번 본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캠페인 초기에는 신청을 주저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일단 캠페인이 시작되자 피라는 것이 얼마나 진한 것인지 확연하게 드러나면서 누구도 걷잡을 수 없는 거센 물결이 되었다. 우리 민족성에 '한(恨)'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 비평가들이 있었다. 나는 그 '한'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현대사가 심어준 '한'이다. 1983년의 캠페인은 남북으로 갈라진 가족의 상봉을 위한 계기도 되었다. 1971년 남북 적십자사가 간판을 건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실현에 이른 것은 1985년 9월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이었다. 그 후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관계의 주요 의제가 되었고, 2000년 6월의 정상회담 후 정례화되어 20차까지 진행되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빈도가 계속 떨어져 온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2000년 하반기의 2회로 시작해 2001년 1회, 2002년 2회, 2003년 3회, 2004~2007년 2회씩이던 상봉이 2008년에 한 차례도 없었고, 2009, 2010, 2014, 2015년에 한 차례씩 있었다. 북한 쪽 사정에 어떤 요인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남한의 정권교체가 분명한 계기로 나타난다. 최근 유경식당 직원들의 집단탈북 과정에서도 남한 정권이 '가족'의 가치를 너무 묵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든다. 북한에서는 이들이 진정한 자의로 넘어간 것인지, 가족을 판문점이든 서울이든 보낼 테니 만나서 확인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가족들의 요구는 지당한 것이 아닌가. 외국 나가 일 잘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던 딸이, 동생이, 다시 만나기 힘든 곳으로 넘어갔다니 어찌된 영문인지 본인을 만나 물어볼 일이 아닌가. 직접 만나 확인하지 않고는 유경식당 직원들이 강압(强壓)이나 사술(詐術)로 납치된 것이 아니라고 가족들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총선 분위기를 위해 무리하게 발표한 것이라는 의혹이 이미 제기되어 있다. 한 식당의 다수 직원이 어떻게 '탈북' 합의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역사의 상처로 물려받은 이산가족 문제를 아물리는 데 성의를 보이지 않는 것도 괘씸한 일이다. 그런데 이제 새로 이산가족 만들기에까지 싸매고 나선다면 지금의 남한 정권은 '비(非)인륜적' 정권으로 기록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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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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