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역사에 대한 관심도 많지 않았고 한국사든 세계사든 지식이 일천한 내게, 700쪽이 넘는 <영국 협동조합의 한 세기>(G.D.H 콜 지음, 정광민 옮김, 그물코 펴냄)는 읽는 것부터가 도전이었다. 로치데일공정 선구자협동조합의 발자취를 기록한 조지 제이콥 홀리요크의 책 <로치데일공정선구자협동조합 : 역사와 사람들>(정광민 옮김, 그물코 펴냄)도 인상적인 표지에 반해 책을 샀을 뿐 아직 읽지 못했다. 서평을 쓰기 위해 이 두툼한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었다. 정 이해가 안 되는 단락은 건너뛰며 그럭저럭 끝까지 읽었다. 쉬엄쉬엄 보아서 그런지 3~4주는 걸린 것 같다. 워낙 내용이 많고 정보가 풍부해서 일독으로는 다 소화할 수 없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라도 밑줄 그은 데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훑어야 했다.
늦은 저녁 책상에 앉았다. 독서대에 책을 세워두고 한장 한장 넘기며 요약하다 보니 자정이 넘어갔다. 한 시, 두 시, 세 시… 새벽이 가까워지는데 도리어 잠이 물러갔다. 놀라웠다. 책의 내용이 정리되면서 흥미롭고 재미가 있었다. 역사책을 읽으면서 소설처럼 그 시대가 상상이 되다니,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아이쿱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조합원이자 생협활동가라고 자각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름은 이제 나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영국 협동조합의 한 세기>, 이 담담하고 진지하기만 한 역사서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내가 하고 있는 것, 생각하는 것, 협동조합과 함께 꿈꾸는 것들을 이미 1844년에 어떤 이들이 행하고 꿈꾸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전율했다. 지금 이 현실이 괴롭고 답답하고 벗어나고 싶고, 그래서 바꾸고 싶었다. 1844년 굶주리고 착취당하고 고통스러웠던 노동자들도 그러했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 협동조합을 세우고 살리는 우리는 단독자도, 고립된 자도 아니다. 협동조합의 도도한 역사 속의 선구자들과 이어져 있고 같은 흐름 속에 있다는 깨달음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책은 총 22장으로 되어 있으며, '기아의 1840년대'에서 시작한다. 로치데일공정선구자 협동조합이 생기기 전의 영국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공업지역 노동자들의 주거와 위생 상태까지 상세하게 전해준다. 전체 장은 연대기 순으로 기술되지만 여성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협동조합 여성길드(12장), 협동조합에서 중요한 교육의 문제(13장), 협동조합 내 고용(20장), 국제 협동조합 운동(21장) 등 주목할 만한 주제는 별도의 장으로 다룬다.
협동조합 역사에는 헌신적이고 존경받을 만한 '선구자'들도 숱하게 출현한다. 맨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역시 로버트 오언(Robert Owen). 자수성가 한 자본가로서 공장 노동자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며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고 그 가족들의 주거와 자녀들의 교육까지 책임졌던 오언. 그러나 그는 인자한 고용주 이상이 되기를 원했고 사회 변혁을 꿈꾸며 '협동마을'을 구상했다. 그의 시도와 구상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로치데일공정선구자들을 비롯하여 협동조합 운동가의 대부분은 '오언주의자'로, 협동조합의 목표와 이상을 설계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콜은 학자였기 때문에 자의적이거나 감상적인 논평은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디지털 자료 등에 쉽고 편리하게 접근할 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어마어마한 자료와 데이터에 놀라울 뿐이다. 발품을 팔거나 일일이 편지를 쓰거나, 아니면 사람들을 통해 부탁하여 구할 수 있는 자료를 최대한 구했을 것이다. 콜은 이를 토대로 논리에 어긋나지 않는 추론과 근거들을 제시한다. 콜은 '서문'에서 협동조합 운동에 바치는 헌사라고 말하고 있지만 협동조합 운동의 한계와 시행착오를 냉정하게 비판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 콜이 '영적인 것'을 암시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명시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다양한 종파와 오언주의가 후에 변질(?)되는 상황 등을 언급하며 노동자들에게 의지할 어떤 것,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싶은 마음을 이야기한다. 협동조합이나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의 동력은 바로 믿음과 신념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역사와 운동을 간파하고 조감하는 콜의 깊고 폭넓은 시각에 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협동 조합운동이 노동운동과 같은 맥락 속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콜은 자신의 다른 책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김철수 옮김, 장석준 감수, 책세상 펴냄) 서문에서 노동운동은 크게 노동조합, 협동조합, 정당 및 정치 운동이라는 3개 영역을 포함하여 노동자 집단이 스스로의 삶과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벌이는 모든 집단적인 노력을 포괄한다고 말한다. 노동운동을 노동조합, 그리고 자본가와의 대결, 투쟁으로만 이해한다면 협동조합이 노동운동의 한 부분이라는 그의 견해가 낯설 수도 있다. 그러나 <영국 협동조합의 한 세기>를 통해 협동조합 역사를 들여다본다면, 실은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을 떼어 따로 바라보는 것이 더 이상하다. 가장 간절하고 곤궁한 곳에서 투쟁은 시작되는 법이다. 협동조합도, 노동운동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절박하고 처절한 노동 현실에서 출발했다.
선지식이 있는 사람들이야 새삼스러울 것이 없겠지만, 이미 고백한 대로 나는 '역사 무식쟁이'여서 처음 읽을 때 곡물법 폐지 운동이나 차티스트 운동, 토리당, 휘그당 등을 몰라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 협동조합의 선구자들이 자유무역을 지지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그것은 생필품 구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노동자들이 곡물 관세를 없애 더 낮은 가격으로 빵을 사 먹기 위해서였다). 협동조합운동 당사자인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얻기 위해 정치적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대목도 잊을 수 없다. 억눌린 자가 사회로부터 박탈당한 권리를 얻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아주 더디게 한 가지, 한 가지씩 쟁취하며 나아가는 것이 운동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긴다. 쉽게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뒤이어 올 세대와 시간을 품고 가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어져 있다.
큰 그림으로 이 책은 훌륭한 역사서지만, 구체적이고 세심한 차원에서도 우리에게 많은 참고가 된다. 1800년대 협동조합 여성길드가 여성 인권과 정치 참여를 위해 기여한 일, 협동조합에서 잉여 이익금의 일정 비율을 교육비로 반드시 재투자한다는 '2.5% 원칙', 생산자조합과 소비자조합의 발생적 차이, 협동조합 내 고용자에 대한 임금이나 처우가 여타 조직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노동 배당, 이용실적 배당 원칙에서 파생될 수 있는 문제들, 소비자도매사업연합회설립의 의미, 전쟁 등 비상시 협동조합이 식량 배분과 조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등.
한 가지 확실한 것은 21세기 대한민국 협동조합 생태계 안에 속해 있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매우 귀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협동조합의 선구자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일구어내고 또 다른 국면을 찾아 혁신에 혁신을 거듭한 100년의 기록이 이렇게 샅샅이, 살뜰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말이다.이 책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취할 것을 가려내야 한다. 우리도 치열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간지 <생협평론>은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가 펴내는, 협동조합을 다루는 본격적인 전문잡지로서 협동경제·나눔·평화에 대한 의견들이 교환되는 공간입니다. 정보지이자 실천적 교육서로서 협동조합 활동가뿐 아니라 협동조합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고, 협동조합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경제·문화적 이슈를 다룹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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