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기사 '인천 콘크리트 바닥 속 백골 시신, '20대 여성 알몸' 추정'을 읽으며 그동안 수없이 죽어간 익명의 여성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사례라고 생각했다. 26년 전에 지어진 건물, 옷도 소지품도 없이 백골로 나타난 20대 여성의 시신(기사는 '알몸'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이 여성의 신원에 대해 밝혀진 것이 없다). 이름 모를 한 여성이 건물 바닥에 백골로 묻혀 있는 사건은 이 사회 '여성'의 위치를 상징한다. 여성의 죽음은 인간이 쌓아올린 문명과 문화의 밑바닥에 익명으로 깔려 있다. 우연히 이 뉴스를 본 날, 공교롭게도 또 다른 살인사건 소식을 접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정확히는 '여성 살인' 사건이다.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칼을 품고 기다리다 여섯 명의 남성을 보낸 후 처음으로 들어온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사건의 정황, 가해자의 말 모두 '여성'을 정확하게 향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기사와 칼럼에는 "이게 왜 이슈가 되는가,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왜 유난을 떠는가"라는 댓글이 달린다. 죽어서도 '트렁크녀', '가방녀' 등으로 불리는 수많은 이름 모를 여성들의 죽음이 '일상'이 되어서 여성 살해에 집단적으로 둔감해졌다. '강간 문화'라는 말이 있듯이, '여성 살해'도 인류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항상 있는 일에 왜 유난을 떠느냐고? 바로 말 그대로 '항상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여성은 삼일에 한 명 꼴로 친분 있는 남성(남편이나 애인, 헤어진 연인 등)에게 살해당한다는 사실은 명백히 드러난 현실이다. 이 사건에 대해 강남역을 거점으로 대대적인 추모가 이어지자, '"말 조심해야지" 강남 묻지마 살인에 위축된 남성들'(<국민일보> 5월 23일 자) 같은 기사처럼 여성 살해의 심각성보다 남성의 불쾌감을 충실히 전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히려 '남성 혐오'를 부각시키는 언론의 태도에서 '여성에 대한 무시'가 어떻게 규범화되는지 똑똑히 드러난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강남역 살해 사건은 '여성 혐오'가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 이후 번지고 있는 논란은 여성 혐오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는 가해자의 말을, 언론은 일제히 사건의 제목에 넣었다. 이 제목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중첩되어 있다. 일단은 가해자의 목소리, 그 다음은 그 말을 전달하는 언론의 목소리다. 가해자는 조현병 환자이며 그가 스스로 범행 동기라고 밝힌 내용은 '진실'이 아닌 핑계일 수도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진실은 그가 왜 그러한 '핑계'를 끌어왔을까, 하는 점이다. 여자에게 무시당한 남자의 분노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기'는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영역이므로. 여성 혐오를 숨기고 '남성 혐오'를 걱정하는 사회가 얼마나 신속하게 조직적으로 여성의 언어를 제압하는지를 분명하게 응시해야 한다.
'남성 혐오'와 '잠재적 가해자'
'여성 혐오'라는 선명한 단어를 들고 나와 남성들의 행동을 여성들이 명명하는 태도를 보이자, 사회 곳곳에서 당황하고 있다. 혐오가 확산되고 있으며 성 갈등이 야기되고 있다는 등 걱정하는 목소리가 울린다.
'Misogyny'란 단어를 우리나라에선 '여성 혐오'라고 번역해 사용하고 있지만, 앞으로 논의를 거쳐 더 적합한 언어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의 언어 속에는 여성의 실제 경험을 설명할 틀이 부족하다. 일상어는 물론이고 사회과학적 언어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학술 논문 겉표지에 남자의 이름을 적었을 때와 여자의 이름을 적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실험한 결과 다른 반응이 나온 사례도 있다. 정말 '논리적'이라서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으로 '남자가 하는 말'을 더 논리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여성의 언어는 제거되고 '여자들은 너무 감정적'이라고 규정한다. 일단 여성들이 많이 말하고, 계속 말하고, 크게 말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제도적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퍼져나가기는 남성보다 훨씬 어렵다.
마땅히 필요한 분노 표출을 '갈등'이나 '대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 역시 사건의 본질을 흐린다. 여성 혐오는 여성을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모든 태도와 문화를 일컫는다. 여성을 물리적으로 공격하거나 언어폭력을 사용해야만 혐오가 아니다. 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저지하려는 언어 중 '남성 혐오'와 '잠재적 가해자'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혐오'라는 언어는 현재 심각하게 오남용 되고 있다. 혐오라는 개념을 단지 어떤 대상을 '싫어한다' 혹은 '공격한다'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성 혐오자'라고 하면, 펄쩍 뛸 사람들이 많다.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가 여성을 혐오한다고?'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굳이 '여성 혐오자'라는 말이 불필요할 정도로 성차별주의를 공기처럼 마시며 살고 있다.
요즘 들어 여성 혐오가 더 심해졌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미 있었던 혐오의 표출이 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여성 혐오 확산, 남녀 갈등, 분열 조장, 성 대결, 잠재적 가해자 등 모두 이상한 말이다. 여성 혐오는 확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보이게 되었으며, 성차별에 대항하는 행동은 갈등이나 분열, 나아가 대결을 조장하지는 않는다. 인종차별에 저항한다고 이를 인종 갈등이나 인종 분열, 혹은 인종 대결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잠재적 가해자는 여성의 과거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두 지워버리는 언어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는 말은 성차별에 대해 전혀 인식이 없다는 고백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관습인 '남아 선호'부터 온갖 경조사, TV의 예능 방송, 가정에서의 성 역할, 광고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서 보이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 직장 내 성희롱 등, 성차별과 무관한 일상은 찾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잠재적 가해자'라는 표현은 현재의 착취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표현이다.
여성의 여성다움은 대부분 '무시당해도 가만히 있는' 성질로 대표된다. 이를 '다소곳한, 참한, 청순한, 얌전한' 등의 형용사가 대체하고 있다. 성희롱 앞에서도 여성들은 가해자를 기분 나쁘지 않게 해야 한다.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남자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인간으로 길러졌다. 여성의 일상에서 '남자에 대한 무시'라고 규정되는 상황은 셀 수 없이 많다. 자기 생각을 말하면 '기가 세고, 설쳐대고,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여자가 된다. 가해자의 '무시해서'라는 말은 많은 여성들에게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여성들에겐 '도를 넘는'이나 '지나친'이라는 표현이 곧잘 붙어 다니며 말과 행동이 일상적으로 제약받는다. 그렇기에 공개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툭하면 '페미-나치'라는 소리를 듣는다. 페미-나치는 저항의 언어를 뒤집어서 되려 저항하는 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대표적인 언어다. 언어가 없었던 이들이 언어를 가지려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존재가 설치면 이를 아주 쉽게 폭력이나 공격, 혐오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진보 정당의 게시판에서 '페미-나치'라는 말이 여성들을 공격하기 위해 등장해도 이는 사회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롱당하는 저항, 무시와 무지 속에서 목소리 자체가 소거당하고 있지만 '올바른' 목소리'만' 허락하겠다는 올바른 사람들의 '진보'는 대부분 여성의 삶과 무관한 진보다.
존중과 관계
언어의 재개념화는 절실하다. 지난해 8월 15일 "광복절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에요. 우리는 해방되지 않았어요"라는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TV에서 듣고, 나는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았다. '일제에서 해방'이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이었다. 위안부 피해자에게 '일제'는 끝나지 않았다. '공식적' 해방과 무관한 이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나, 이것이 바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는 사건을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계속 인식하고 배워가야 한다.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의 극단에 바로 여성 살해가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일부 언론은 제목에 '강남 유흥가'에서 사건이 벌어졌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미성년자도 드나들 수 있는 대중적인 장소였건만, 마치 새벽 1시 유흥가를 떠돌던 젊은 여성의 탓이라는 어감이 담겨 있다. 여성을 죽이는 이유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개인 사정에 따라 꾸준히 발명된다. 여성이 느끼는 공포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내가 조심하든 안 하든, 내가 어디에 있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불과 며칠 전만 해도 등산을 하던 한 중년 여성이 모르는 남성에 의해 이유 없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편안할 '안(安)'은 집에 있는 여성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여자가 집에 있어야 남자가 편하다는 의미다. 존중받지 못한다면 여성에게 안전한 장소는 없다.
지난해 미국판 <맥심> 잡지 11월호 표지에 프랑스 배우 레아 세이두가 등장했다. 세이두는 "여자를 존중할 줄 아는 남자가 좋다"고 말했다. 존중,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이 기본적인 태도가 당연하지 않다 보니, 여성을 존중할 줄만 알아도 특별한 남성이 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존중은 종종 사회적으로 무시당한다.
남성연대 사회는 남성이 여성을 존중하지 않도록 부추긴다. 아내를 존중하는 남편을 굳이 '애처가'나 '공처가'라 하고, 현모양처에 대응하는 '현부양부'라는 말은 없다. '남성다움'에는 여성에 대한 지배가 포함되어 있기에 아내를 존중하는 남성을 남자답지 못한 인간으로 남성연대에서 탈락시키려고 한다. 남성이 여성을 존중하기 어렵고, 또 존중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가부장제 속에서 부부는 동반자 관계(partnership)가 아니라, 소유 관계(ownership)에 더 가깝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의 자존감을 낮게 만들고, 여성이 남성에게 의지하도록 이끌고, 여성에 대한 보호와 통제를 자연스러운 규범으로 정착시킨다.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는 그렇게 탄탄히 유지되고 있으며 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동성애 혐오는 여성 혐오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가 넓은 의미의 약자와 소수자를 존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누군가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할 때 그 권리가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이는 그동안 '특권'을 누려왔다는 뜻이다. 조심과 불편은 분배되지 않았고 안전은 특권화되었다. 이번 강남역 사건에서 보듯이 "어디, 여자가"라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말은 여성 살해로 이어졌다. 언어 하나하나를 붙들고 집요하게 싸워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익명으로 사라진 수많은 '무슨녀'들의 '원통한 혼'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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