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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중국이 인도를 먹다 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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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중국이 인도를 먹다 뱉다 [유라시아 견문] 대분할 ④ : 히말라야 전쟁
갤브레이스의 '인도견문록'

이곳저곳 다니며 남들이 쓴 여행기도 종종 읽는다. 잠들기 전 침실용 독서로 딱이다. 인도만큼 여행기가 많은 나라도 없지 싶다. 방랑벽을 자극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멀리로는 러디어드 키플링부터 꼽을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원형과 전형을 확인시켜준다.

키플링을 전복시킨 영국인도 있었다. 조지 오웰이다. 글로써 모국 대영제국의 허위를 서늘하게 까발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감이 없지 않았다. 영국과 인도, 유럽과 아시아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았다. 오카쿠라 덴신의 인도 여행기와 결정적인 차이점이라 하겠다. 그는 불교를 매개로 인도와 일본을 연결시키려고 했다.

20세기 초 일본발 아시아주의의 정수를 담고 있는 문헌이다. 나로서는 <왕오천축국전>이 유난히 각별했다. 육로로 인도에 닿아 해로로 귀환하는 여정부터 돋보인다. 1000년 전 불교 황금기의 동유라시아를 망라하고 있다. 중국-인도-한국이 합작하여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스펙터클한 서사이다.

반면 1990년대 이후 나온 책들은 대개 실망스러운 쪽이었다. 옛 글을 애호하는 취향 탓만은 아닐 것이다.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남아시아 현대사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대분할 체제로 열전과 내전이 거듭되었음에도, 평화와 명상이라는 엉뚱한 이미지만 답습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혹은 잘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아름다운 사진과 감상적인 문장으로 대단치도 않은 자의식을 어여쁘게 읊조리는 것이다. 뜨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지와 미문으로 거듭 허상을 수립한다. 정작 당대 인도는 철저하게 소외된다. 결국 진상에도 이르지 못한다. 공부가 수반되지 않는 여행의 병폐를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여행기 중에 단연 갑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견문이었다. <풍요한 사회>와 <불확실성의 시대> 등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경제학자이다.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매일매일 미국과 세계의 주요 이슈에 대하여 자신만의 견해를 재기 넘치는 문장으로 기록해 두었다. 인도에 관련된 일기만 따로 떼어내어 편집한 책도 발간되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카슈미르를 만끽하던 나흘간 탐독했던 책이다.

갤브레이스가 처음 인도를 여행한 해가 1956년이다. 크게 반했던 모양이다. 당초 계획보다 오래 인도를 주유한다. 델리, 뭄바이, 바라나시, 다즐링, 카슈미르까지 두루 살펴보았다. 취미도 고상했다. 무굴제국의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경제학자답게 콜카타에서는 인도 경제도 연구했다. 네루를 만나서는 경제 정책을 토론한 적도 있다.

재방문한 것은 1959년이다. 그리고 큰 뜻을 품는다. 인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이자 '민주주의 국가'였다. 세계 최대 국가이자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는 다른 발전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그 규모와 위치를 보건대 인도의 민주주의 실험의 성패야말로 아시아의 향로를 좌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인도양을 아울러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 파장을 미칠 것이라며,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버금가는 정치사적 위상을 부여했다. '인도 모델'을 수립하여 제3세계로 확산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백면서생이 아니었다. 사대부에 가까웠다. 時勢(시세)를 살펴, 時務(시무)를 권했다. 그의 절친이 바로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였다. 1950년대 말, 케네디는 미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이었다. 갤브레이스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 시절부터 케네디의 연설문 작성에도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인도를 주목하자고 친구에게 권유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인도의 이미지는 부정적이었다. 네루와 세계관이 전혀 달랐다. 냉전을 발동시킨 미국과는 달리 네루는 1945년 이후의 세계를 달리 보고 있었다. 제국주의, 식민주의가 끝나고 새 문명이 시작되는 시대라고 여겼다. 20세기 후반의 주인공 또한 미국이나 소련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도와 중국이 주역이라고 했다. 그래서 비동맹 노선을 주창한 것이다. 탓에 미국서는 사회주의에 경사된 인물로 꼬아보았다. 냉전이라는 선/악의 대결에서 중립을 추구하는 비동맹 또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했다.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파키스탄에 견주어 인도에 대한 반감이 몹시 심했던 것이다.

발상의 전환을 제출한 이가 케네디였다. 갤브레이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아시아 정책의 틀을 다시 짜려 했다. '민주주의 인도'와 '공산주의 중국'의 경합으로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것이다. 인도는 (미국처럼) 영국에서 독립한 탈식민 국가로 추켜세우고, 중국은 소련의 지휘를 받는 종속 국가로 깎아내렸다.

소련에 맞서 서유럽을 부흥시켰던 마셜 플랜처럼, 중국에 맞서 인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자유 세계'가 인도와 협조하여 붉은 중국을 앞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동남아시아에서도 중국이 아니라 인도의 입김이 커질 수 있었다. 1960년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인도가 냉전의 중심 무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 인도 뉴델리의 미국 대사관. ⓒ이병한

1961년 갤브레이스는 직접 무대 위로 뛰어 오른다. 대학에는 휴직계를 내고, 인도 대사로 취임한다. 몸소 자청한 것이었다. 인도를 '풍요로운 사회'로 만들어 중국을 역전시켜 아시아의 정세를 반전시킨다는 꿈을 꾸었다. 그의 부임과 함께 인도의 미국 대사관도 재개장했다. 이 또한 야심찬 건축물이었다. 훗날 워싱턴의 케네디 센터를 짓기도 한 당대의 건축가 에드워드 스톤이 디자인했다. 미국-인도의 새 출발을 상징하는 획기적인 건물이었다.

단, 케네디는 떠나는 친구에게 조건을 달았다. 인도에서 일하더라도 전 세계의 동향에 대한 조언만큼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부탁했다. 실제로 갤브레이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대사로서의 업무는 하루에 2시간이면 족했다고 한다. 나머지 시간은 국내 정책과 대외 정책은 물론, 아시아 여성에 대한 품평까지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케네디에게 전했다. 국무부를 비롯해 워싱턴의 관료 기구에 불신과 반감이 심했던 갤브레이스는 항상 백악관의 대통령 직무실로 직접 전갈을 보냈다. 공식 라인의 견제를 받지 않는 최측근이었다.

그러나 인도 대사 취임은 처음부터 불길한 것이었다. 뉴델리로 부임하기 직전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남아시아 브리핑을 받는다. 그 자리에서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1950년부터 파키스탄과 네팔을 통하여 티베트 전복 공작을 펼치고 있던 것이다. 1959년 라싸 봉기에도 CIA가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는 중국과의 전쟁을 야기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라며 아연실색했다.

철두철미 자유주의자였던 갤브레이스는 정정당당한 체제 경쟁을 원했다. 내정 간섭과 체제 전복은 불미스러운 짓이었다.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취임 1년 만에 중인 전쟁이 발발한다. 2시간 업무는커녕 2시간도 잘 수 없었던 시기이다. 일기의 호흡마저 가팔라졌다. 각성제를 먹어가며 밤을 새워 상황을 관리했다. 1962년 가을이다.

▲ 네루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wikimedia.org

카리브와 히말라야

그럼에도 중인 전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62년은 단연 쿠바 미사일 위기로 기억된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카리브 해로 관심이 치우쳐 있다. 냉전을 미-소 중심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가 이미 산적하다. 영어와 러시아어로 출간된 단행본만 기십에 이른다.

소련이 극비리에 핵무기를 쿠바에 배치하여 미국의 동남부, 나아가 워싱턴을 겨냥했다. 자칫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위기'였을 따름이다. 정작 열전이 터진 곳은 히말라야였다. 쿠바에서 어제의 G2가 샅바싸움을 하고 있을 때, 히말라야에서는 내일의 G2가 충돌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과 인도의 인구는 인류의 3분의 1이었다.

단, 미국과 전혀 무관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 티베트가 자리한다. CIA는 사이판과 콜로라도에서 티베트 청년을 훈련시켰다. CIA의 보호 아래 미국에 머물고 있던 달라이 라마의 큰 형이 지도자 역할을 했다. 침투의 근거지는 파키스탄의 미군 기지였다.

치타공(동파키스탄, 현 방글라데시)에서 CIA의 비행기를 타고 잠입하며 인민해방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1959년이 일대 분수령이다. 대봉기와 대진압이 충돌했다. 달라이 라마가 망명한 곳은 인도의 다람살라였다. 당시 네루는 티베트 전복 공작에 미국-파키스탄 동맹이 가동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반면 중국은 티베트 봉기가 인도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고 의심했다. 반둥 회의 4년 만에 아시아의 양대 대국이 분열하고 있던 것이다. 양국의 틈을 벌리려던 미국의 기획이 성공한 셈이다.

중국은 두 개의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했다. 서쪽으로는 카슈미르로, 동쪽으로는 벵골 만으로 남하했다. 카슈미르에서는 악사이친(Aksai Chin)과 라다크까지 진출했다. 더욱 위태한 것은 동부 전선이었다. 인도의 주력군이 서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한 펀자브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동북부는 전력이 모자랐다. 인민해방군은 부탄과 시킴을 따라 미얀마 접경까지 일사천리로 남진했다. 벵골과 아삼이 코앞이었다.

당시 네루와 케네디 사이에 오갔던 전갈이 2010년에 공개되었다. 냉전사 연구의 중심인 우드로 윌슨 센터의 온라인 자료실에서 열람해 볼 수도 있다. 네루는 기겁, 기함하고 있었다. 벵골과 아삼은 물론 동인도 전체를 중국이 점령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준비했다. 과장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북인도의 무슬림 사이에는 중국이 아삼과 벵골을 동파키스탄에 넘긴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갔다. 북인도 전체가 파키스탄으로 재통일되어, 아대륙이 남북 분단으로 재편된다는 것이다.

기시감이 일지 않을 수 없다. 20여 년 전, 대일본제국이 동북인도로 진출하여 임팔 전투가 펼쳐졌다. 당시 네루는 수감 중이었다.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국가 붕괴의 공포를 경험한 것이다. 당시 간디가 비폭력의 무기력을 확인했듯이, 이번에는 네루가 비동맹의 무력함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세계는 여전히 뜻이 아니라 힘에 따라 작동하고 있었다.

인도로 남하한 인민해방군만 17만이었고, 티베트에 대기하고 있는 병력만 30만이었다. 유일한 타개책은 공중 폭격으로 티베트와 북인도 사이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00여기의 전투기를 확보한 인도에 견주어 중국은 20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공중전에서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의지할 곳은 군사 최강국 미국이었다. 미 공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말년에 자신의 정책 브랜드였던 외교 노선을 스스로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벵골 만 건너 태국에서, 아라비아 해 건너 이란과 터키에서 전투기가 출격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적대국인 동/서 파키스탄의 미군 기지에 의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인 전쟁 발발 이틀 후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케네디는 히말라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갤브레이스에게 전담시키다시피 했다. 갤브레이스가 패닉 상태에 빠진 네루의 전시 참모 노릇을 한 것이다. '인도 모델'의 수립은커녕 인도의 보위부터 챙겨야 했다. 다시금 CIA에 대한 불만으로 이를 갈았다.

▲ 1962년 중인 전쟁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 ⓒwikimedia.org

한국 전쟁의 그늘

11월 21일. 네루와 갤브레이스의 노심초사가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 도둑처럼 평화가 찾아들었다. 자정을 기해 중국이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한 것이다. 24시간 내에 인도에 진출한 인민해방군의 철군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2월 1일까지 국경선 20킬로미터 후방으로 물러날 것이라고도 했다.

군사적으로 점령했던 영토에서 자진 철수하여 기왕의 국경선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대신 인도군 또한 경계선으로부터 20킬로미터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전쟁 발발 직전 상황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당시 중국은 양국 간 국경선을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대영제국이 일방적으로 그어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야말로 저우언라이와 네루가 직접 만나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래서 제국주의의 산물인 국경선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 내용들은 외교 채널을 통해서 공지되었을 뿐 아니라,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다. 중국의 일방적인 철수로 중인 전쟁은 순식간에 종식되었다.

마오는 왜 돌연 종전을 선택했는가? 중국 쪽 연구를 참조해볼 만하다. 일단 소기의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 인도와 미국에 본때를 보여주었다. 케네디-갤브레이스가 도모하던 '인도 모델'에 초장부터 재를 뿌린 것이다. 중국이 인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특히 제3세계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 독자의 사회주의가 서방의 모조품에 불과한 인도의 민주주의보다 월등하다는 것이다. 하여 제3세계는 중국모델을 따라야 할 것임을 입증해 보였다.

더불어 스스로 군사 점령을 거두고 제자리로 돌아감으로써 '책임 대국'의 면모를 선보일 수도 있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을 밀어내고 유엔(UN)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는 데 사활적이었다. 계절적인 영향도 있었다. 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히말라야의 겨울이다. 혹한 속에서 보급로가 길어지는 것은 치명적으로 위험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마오가 거듭 한국 전쟁의 경험을 복기하고 한반도에서의 실패를 반추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인도 남진을 지속하다가는 38선 이남으로 진격했을 때처럼 미국과의 장기전에 진입할 수 있음을 의식하고 있던 것이다. 나아갈 때 이상으로 그치고 멈출 때를 따지고 있었다. 실은 인인해방군의 38선 이남 진출이 패착이었음은 베트남에서부터 적용되고 있었다.

(북)베트남의 프랑스에 대한 '민족해방전쟁'은 돕되, 남베트남을 '해방'시키는 '통일 전쟁'에는 미온적이었다.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에서도 중국의 후방 지원은 17도선 이북으로 한정되었다. 인도에서도 베트남에서도 한반도에서처럼 미-중 간 전면전만큼은 피하고자 심사숙고했던 것이다.

중국이 벵골과 아삼 진격을 포기한 1년 후, 케네디 대통령은 댈러스에서 암살당한다. 1963년 11월이었다. 케네디가 대통령 직무를 수행한 것은 약 1000일에 그쳤다. 혹여 중국이 남진을 지속하여 기어이 제2차 미중 전쟁을 촉발시켰다면, 케네디는 임기 말년을 전쟁 지휘로 보냈을지 모른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갤브레이스 또한 대학으로 돌아갔다. 1964년 5월에는 네루 역시 숨을 거둔다. 케네디의 암살, 네루의 사망, 그리고 갤브레이스의 학계 복귀로 '인도 모델' 프로젝트는 조기에 마감되는 듯했다.

'전환 시대'

2008년 '검은 케네디'로 불리는 이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이다. 그가 인도를 처음 방문한 해가 2010년이다. 두 번째 방문은 더욱 각별했다. 2015년 1월 '공화국의 날'에 초대받았다. 모디 총리의 옆에 서서 인도군의 열병식을 지켜보았다.

더 중요하게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이웃 국가 파키스탄은 방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군사 동맹국 파키스탄보다 '민주주의 가치 동맹' 인도를 더 중시했던 것이다. 중국에 맞서 인도를 키우자는 갤브레이스의 '인도 모델'론이 재차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2015년 오바마가 뉴델리에 머물고 있을 때, 파키스탄의 최고 실력자 샤리프 장군은 베이징에 있었다는 점이다. 시진핑 정부는 일대일로의 핵심 거점으로 파키스탄을 중시하고 있다. 양국 정상은 '전천후 친구'와 '철의 형제'라는 최고 수위의 수사를 주고받았다. 같은 날 CNN과 BBC는 뉴델리의 오바마를 주목했고, CCTV와 알자지라는 베이징의 샤리프에 초점을 맞추었다.

현재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세력 균형이 정초된 것도 1962년 중인 전쟁 이후이다. 1950년대 미국과 파키스탄이 반공주의로 하나가 되었던 동맹 체제에 균열이 드러났다. 중인 전쟁에 대한 관점이 판이했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대국주의를 화근으로 지목했다. 대영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계승하려는 '제국몽'에 혐의를 두었다.

반해 미국은 냉전 구도로 접근했다. 중국이 동북아와 동남아에 이어 남아시아까지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 든다고 여겼다. 미국의 인도 지원은 남한과 남중국(대만)과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동맹국의 배반으로 접수했다. 어떻게 동맹국이라며 제1적성국 인도를 돕는단 말인가. 미국에는 글로벌 냉전이 중요했고, 파키스탄은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가 관건이었다. 양국의 시선이 엇갈렸다.

▲ 인도-중국-파키스탄으로 삼분된 카슈미르. ⓒwikimedia.org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긴 파키스탄이 주목한 나라가 중국이었다. 파키스탄은 인도에 앞서 중국과 먼저 카슈미르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중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되, 사용권을 획득하는 타협을 이루었다. 그 결과 건설된 것이 바로 카라코룸 고속도로이다. 신장의 카슈가르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를 잇는 세계 최장의 고속도로이다.

당시 국경선 확정 작업을 이끌었던 이가 외교부 장관 부토였다. 파키스탄을 반공주의로부터 탈피시키는데 선봉장 노릇을 한 인물이다. 서파키스탄의 고속도로에 이어, 동파키스탄에서는 다카와 상하이 사이에 직항로까지 개설했다.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봉쇄 전략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파키스탄 기지를 통한 티베트 공작도 중지시켰다. CIA는 작전의 거점을 인도와 네팔, 라오스 등지로 옮겨야 했다.

1965년 카슈미르에서 발발한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결정타였다. 미국은 동맹국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다. 도리어 인도군 또한 미국의 지원으로 재무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카슈미르에서 양국이 미국산 무기로 다투었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1965년 미국의 관심은 카슈미르가 아니라 온통 베트남이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인도차이나 전체가 적화되고 있었다. 이 모든 사정을 지켜보고 있던 부토가 파키스탄의 최고 지도자로 등극하는 해가 1971년이다. 그리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파키스탄을 이끌고자 했다. 부토가 주도했던 파키스탄의 '전환 시대'는 다다음주에 따로 살펴볼 것이다.

먼저 짚을 곳은 펀자브가 아니라 벵골이다. 미국에서 케네디-갤브레이스와는 전혀 다른 조합이 등장했다. 닉슨과 키신저이다.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들이었다. 민주주의를 맹목하지 않는 만큼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파격을 선보였다.

동아시아에서는 미-중 화해만 주목한다. 1972년 닉슨-마오 회동을 탈냉전의 기폭제였다고 높이 기린다. 그래서 데탕트라거나 '전환 시대'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남아시아를 살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할에 이어, 1971년에는 파키스탄마저 분할되었다.

동벵갈이 동파키스탄이 되었다가 방글라데시로 귀착된 것이다. 1947년 제1차 분할에 못지않은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닉슨-키신저와는 깊이 관련되었고, 마오-저우언라이와도 무관치가 않은 사태였다. 동아시아 대분단 체제와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와 동서 냉전이 겹겹으로 교착되어 폭발했던 것이다. 1971년, 벵골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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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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