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에는 재단의 목적 사업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명예와 존엄 회복 및 상처치유를 위한 각종 사업 △재단 목적에 부합하는 기타 사업'이라고 명시돼있다.
재단의 사업 내용에 특정한 제한을 두지 않은 것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이 원하는 다양한 지원 사업'을 실행하기 위한 의도라고 정부는 주장하고 있다. 실제 김태현 재단 이사장은 지난 7월 28일 재단 출범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마다 쓰고자 하시는 데가 다 다르다. 집을 옮기고 싶다는 분, 옷도 사 입고 맛있는 것도 드시고 싶다는 분, 장학금으로 내놓겠다는 분 등 다양하다. 사용처를 파악해서 맞춤형 지원을 해드리려고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위 정관에 따르면 지원 사업 외에 다른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일본이 출연하기로 약속한 10억 엔이 전부 피해자의 지원금으로 쓰이는 것이 아닌, 한일 양국 정부 협의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더구나 지난해 한일 양국 정부는 "일한 양국 정부가 협의"하여 "모든 위안부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행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이 장학 사업 등 피해자 지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업을 제의할 수 있고, 양국 정부가 이를 '재단 목적에 부합하는 기타 사업'에 포함된다고 판단한다면 사업 진행이 가능하다.
이에 일각에서는 일본이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인근에 위치한 위안부 평화비(소녀상)의 철거 및 이전을 위해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업 계획을 내놓고, 이를 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실제 일본 내에서는 소녀상을 철거해야 10억 엔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일본 <교도통신>은 1일 자민당의 이나다 도모미(稲田朋美) 정무조사회장이 지난 7월 31일 후지TV에 출연, "양국이 (위안부) 합의를 확실히 지켜야 한다. 위안부상(소녀상)의 철거는 그 중에 중요한 요소다. (한국이) 확실히 앞으로 진전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한일 양국 정부는 10억 엔의 사용처 결정 문제와 관련한 국장급 협의를 이번달 내로 개최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 협의에서 '소녀상 존속과 10억 엔 모두 피해자 지원'이라는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으로서는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업 내용을 진행하지 않는 대신 소녀상을 철거하자고 제의할 수 있고, 반대로 소녀상 철거를 보류하는 대신 일본이 원하는 사업을 진행하자고 제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10억 엔, 배상금 아니다"
일본이 출연할 10억 엔의 성격 문제도 한일 협의 과정에서 또다시 수면위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교도통신>은 지난 7월 31일 일본 정부가 "10억 엔이 배상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굳혔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일본 정부 소식통을 인용 "10억 엔은 배상금이 아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해야 한다. 한국과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10억 엔 출연을 둘러싸고 여야와 보수층의 일부에서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는 인상을 준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며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10억 엔이 배상금이 아니라는 일본의 뜻을 수용하고 이 금액을 수령할 경우, 안 그래도 반대 목소리가 높은 화해 치유 재단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부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나눔의 집 등은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과 이에 따른 배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화해 치유 재단 설립에 반대하는 것도 일본이 출연할 10억 엔이 배상금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에 김태현 이사장은 지난 5월 31일 재단 설립 준비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낼 10억 엔은 배상금이 아닌 치유금이라고 밝혔다가 반발이 확산되면서 나중에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통신은 10억 엔의 성격 문제를 두고 "'애매한 표현'으로 결착을 도모할 가능성도 있다"면서 한일 양국 정부가 배상금도, 치유금도, 위로금도 아닌 다른 표현으로 출연금을 정의내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사무처도, 예산도 없는 재단…일본 주머니만 쳐다보고 있는 셈
현재 화해 치유 재단은 기본재산과 운영 비용, 사무처 설립 등 재단 운영의 기본적인 사항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이 재단과 같이 정부 부처가 허가권을 갖는 비영리 법인의 경우 설립 허가를 위해 '기본재산'이 필요한데, 이는 김태현 이사장이 100만 원을 기탁해 마련한 것으로 확인됐다.
화해 치유 재단은 여성가족부의 허가를 받는 비영리 법인으로 만들어졌는데, 여성가족부 업무 편람에 따르면 기본재산 금액에 대한 정확한 규정은 없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비영리법인을 신청할 때 법인의 사업계획서와 전반적인 내용을 판단해서 담당 부서에서 (기본재산) 금액을 결정한다. 부족하면 보완하라고 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타 부처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기본재산을 100만 원으로 신고하고 재단 허가를 결정한 것이 통상적인 사례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 외교부의 경우 사단‧재단 법인 관계 없이 5억 원을 기본 재산으로 명시하고 있다.
화해 치유 재단은 스스로 밝혔듯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목적 사업으로 하고 있다. 지원 사업의 특성 상 여기에는 금전적인 지원이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출연금 10억 엔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서, 재단이 기본 재산 100만 원을 가지고 목적 사업을 원활히 수행할 리가 만무하다.
이에 일본의 출연금이 언제 들어올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업 목적을 구현하기 힘든 재단에 설립 허가를 낸 것은 일종의 특혜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실제 여성가족부 업무 편람에 따르면 "기본재산이 명확하게 확보되지 않은 재단법인에 대하여 기본재산 확보를 조건으로 설립허가를 할 수 없다"고 돼있다.
이를 화해 치유 재단에 대입해보면, 재단은 현재로서는 사업을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본재산이 명확하게 확보됐다고 볼 수 없다. 또 일본의 10억 엔을 받는다는 조건이 기본재산 확보 조건이라고 볼 수 있지만, 편람에서는 이를 근거로 재단 설립허가를 낼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일본의 출연금이 없다 보니 재단은 사무실의 임대료와 사무처장을 비롯한 상근자들의 인건비, 각종 행정 비용 등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비용처리를 유보시켰다고 밝혔지만, 한일 협의 결과가 언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은 정부의 예산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정관에는 일본의 출연금이 언제 들어온다는 내용은 포함돼있지 않다.
여기에 아직 재단의 사무처는 정식으로 발족하지도 못했다. 정관 부칙에는 "사무처의 운영은 2015.12.28. 한일 외무 장관의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의 예산이 출연되는 시점에 맞추어 발족한다"고 명시돼있다.
일본과 10억 엔의 출연 시기 및 사업 내용을 두고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되는 가운데, 재단 운영이 사실상 일본 정부 의지에 달려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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