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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만을 특권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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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만델라만을 특권화하지 않았다" [손호철, 남아공 가다] 남아공 인종해방 22년의 빛과 그림자①

2018년 지방선거, 특히 광주시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하면 어떻게 될까. 이처럼 충격적인 일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어났다. 현지시각으로 지난 3일 진행된 남아공 지방선거에서 인종차별체제(아파트헤이트)를 수용했던 백인 정당인 민주연합당(DA, Democratic Alliance)이 인종차별 철폐의 아버지인 만델라의 고향이자 그의 이름을 딴 넬슨 만델라 베이(Nelson Mandela Bay)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를 누르고 승리했다. 나아가 인종차별 타파와 민주화 이후 22년 만에 DA가 수도인 프리토리아(Pretoria)에서 처음으로 승리했다.

▲ 남아공 2016 지방선거 신생사회주의 정당인 경제자유투사당(EFF)의 현수막. ⓒ손호철
물론 ANC는 선거 득표율 53.9%를 얻어 1위를 했다. 그러나 흑인이 남아공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득표율 53.9%는 지난 지방선거에 비해 8%포인트 낮아진 수치라는 점, 1994년 민주화 이후 ANC의 가장 낮은 득표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충격이다. 반면에 DA(더 이상 백인 정당은 아닌 보수 정당이다)는 27%, 그리고 ANC의 우경적 경제노선에 반대해 떨어져 나온 줄리우스 말레마(Julius Malema)가 만든 신생사회주의 정당인 경제자유투사당(EFF, Economic Freedom Fighters)은 8% 득표했다.


인종차별체제 종식과 민주화 이후 22년, 즉 ANC 집권 22년 만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공교롭게도 선거 전 남아공을 들러 지방선거 이변의 전조를 볼 수 있었다.

지난 7월 16일 나는 20여 일간 동아프리카 5개국 여행을 마치고,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역시 남아공은 다른 아프리카국가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아공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라는 것이 금방 눈이 띄었다 (2015년 기준 1인당 GDP 1만3000달러).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악명 높은 인종차별을 끝낸 뒤, 모범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나라답게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쳤다. 그러나 케이프타운에 머무는 동안 보고 듣고 현지에서 구입한 책을 읽고 나니, 이는 한 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호철 교수의 남아공 여행기는 총 두 편에 걸쳐 전달됩니다. 편집자.)

유형지 로벤섬으로

아프리카 최남단 도시인 케이프타운에 도착해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놓고 부두로 달려갔다. 하루 세 번 있는 배편 중 마지막인 오후 1시 발 로벤섬 행 페리를 타기 위해서였다. 케이프타운에서 10여킬로미터(㎞) 떨어진 로벤섬은 악명 높은 남아공의 감옥으로, 만델라를 비롯한 ANC 지도자들이 갇혔던 곳이다. 특히 파도가 높고 풍랑이 심해 배가 자주 취소되기로 유명해 '혹 날씨 때문에 배편이 취소되는 건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다행히 날씨가 좋아 운항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이제는 세계적 관광지로 변한 로벤섬 행 페리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피부색과 복장의 관광객으로 만원이었다. 페리에서 나는 만델라와 ANC에 대해 생각했다.

ⓒ손호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만델라의 중요한 특징은 '균형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만델라는 혁명가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공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현지 이주 백인들 중심으로 독립했다. 이들의 권력 독점에 저항해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ANC를 구성,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 획득을 위해 투쟁했다. ANC는 인도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의 영향 아래, 비폭력 저항운동을 기본노선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난 뒤, 아프리카를 비롯한 식민지 국가의 독립운동이 가열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백인 정권은 인종별 주거지역을 지정하는 등 인종차별정책을 강화했다. 이에 ANC는 무장투쟁노선을 채택하고 '민족의 창'이라는 게릴라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의 대장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변호사 만델라였다. 게릴라 대장으로 해외와 지하에서 활동하던 만델라는 결국 체포돼 46살부터 73살까지 27년 동안 감옥에서 보냈다.

이처럼 만델라는 무장투쟁을 지지하고 게릴라 대장을 맡을 정도의 혁명가이자 균형감각을 지닌 지도자였다. ANC는 비폭력과 무장투쟁뿐 아니라, 다양한 투쟁노선이 있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민족 문제였다. 민족해방파(NL) 강경파는 남아공에서 백인을 추방하고 식민지 이전의 아프리카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다른 유색인종인 인도인과의 연대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백인 주도의 좌파세력인 공산당과의 협력도 반대했다. 이에 만델라는 백인을 포함한 모든 인종의 공존을 주장하며, 공산당과의 공동투쟁을 지지했다. 결국 남아공 인종해방운동 주축이 된 ANC는 남아공노동조합연맹(COSATU)과 남아공공산당(CPSA) 등 3각 동맹을 유지했다.

만델라의 균형감각은 대정권 투쟁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감옥의 비인간적 처우에 대항해 옥중투쟁을 여러 차례 주도했다. 하지만 백인 간수들을 결코 증오하지 않았다. 대신 인품과 설득으로 이들을 교화시켜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만델라와 함께 오랜 기간 감옥살이를 한 동료들은 그의 최고의 능력을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용서하는 능력"이라고 증언했다. 80년대 들어 흑인들의 저항이 가속화되고 국제 제재가 강화되면서 더 이상 인종차별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고 느낀 백인 정권은 정권의 2인자인 정보부장을 감옥으로 보내 만델라와의 협상을 시도했다. 잘못하다가는 배신자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는 이 비밀협상을, 만델라는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설득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적장인 보타(Botha)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석방 조건으로 백인 정권이 내건 무장투쟁 포기, 공산당과의 관계 단절, 다수결 지배의 포기 등 그 어떤 것도 수락하지 않았다. 석방 후 대통령 선거에 나서면서도 백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드 클락(De Klerk)에게 공동 통치를 제안하고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또 쿠데타 가능성이 있는 백인 장성들과 경찰청장, 정보부장을 개별적으로 만나 자기 밑에서도 맡은 일을 계속해 달라고 하는 등 정권의 평화로운 이행이 가능하게 했다.


▲ ANC의 역사를 다룬 포스터. '자유는 족쇄를 채울 수 없다(Freedom Cannot Be Manacled)'라는 구호 아래, 억압(Repression)-출소(Release)-부활(Resurrection)이 쓰여있다. ⓒ손호철

선착장에 도착하자, '자유는 족쇄를 채울 수 없다'라는 구호 아래 만델라와 ANC의 역사를 3R로 압축해 놓은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억압(Repression), 출소(Release), 부활(Resurrection).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섬에 갇혀 있던 정치범에 대한 설명과 함께 버스는 섬을 한 바퀴 돌았다. 나중에 자세하게 구경할 감옥을 지나 간수들의 숙소가 나타났고, 이를 지나자 섬의 반대편 끝에 기가 막힌 풍경이 펼쳐졌다.

케이프타운의 상징인 테이블 마운틴과 그 밑에 펼쳐진 케이프타운의 전경에 한눈에 들어왔다. 케이프타운에서 케이프타운 전경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기가 막힌 전망대가 아이러니하게도 이 로벤섬에 있었던 것이다.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거대한 액자가 설치돼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 남아공 판 '혁명 열사 기념탑'. ⓒ손호철

여기서 케이프타운은 직선거리로 7㎞에 불과하지만, 워낙 해류가 강하고 수온이 차서 탈옥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간수들의 감시하에 만델라와 죄수들이 일본에 수출하는 비료용 미역을 땄다고 하니, 눈앞의 케이프타운을 바라보면서도 가지 못한 심정이 어땠을까.

다시 출발한 버스는 한 채석장 앞에 섰다. 만델라를 비롯한 죄수들이 강제노역을 했던 곳이다. 만델라는 땡볕 아래에서 고된 채석 작업을 하며 시력을 상실해 평생 고생했다. 그러나 이 채석장에서 그는 다른 동지들과 열띤 토론을 하며 운동노선을 정립하고 그 결과를 ANC에 몰래 전달했다고 하니, 이곳은 사실상 인종해방운동의 총사령부였던 셈이다.

석회암 채석장 한가운데 작은 돌을 쌓아 놓은 돌무더기가 눈에 띄었다. 인종차별체제가 종식되고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지 1년 뒤인 1995년 11월 로벤섬에서 고생했던 옛 동료들은 로벤섬을 방문해 망자를 기리는 아프리카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고 먼저 간 혁명의 동지들을 추모했다. 남아공 판 '혁명 열사 기념탑'인 셈이다. 그 소박함이 너무도 맘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5·18묘역을 새로 조성할 당시 현재의 초라한 묘역이 5·18정신에 더 합당하다며 성대한 5·18묘역 건설에 반대했고, 지금도 화려한 신(新) 묘역보다는 옛 묘역을 더 좋아한다. 버스는 2차 대전 때 연합국 편이었던 남아공의 희망봉 방어를 위해 처칠이 선물했다는 대포가 설치된 포대를 지나 앞서 지나쳤던 감옥 앞에 멈췄다.

▲ 감옥 안내인 아프리카 모니(왼쪽). ⓒ손호철

감옥 안내인 아프리카 모니(Africa Moni)는 1980년대 중반 ANC 조직원으로 투쟁하다 체포돼 이곳에서 12년 동안 생활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도 70년대 한국의 독재세력에 저항하다 감옥에 갔었다고 하자, 자신보다 '감옥 선배'라며 반가워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감옥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비(比) 정치범이나 가벼운 정치범을 수용했던 일반동이고, 다른 하나는 만델라를 비롯한 거물 정치범 30명을 격리해 수용했던 독방동이었다.

▲ 일반동 내부. ⓒ손호철

▲ 죄수들의 신상카드. ⓒ손호철


먼저 보여준 것은 일반동. 무거운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일반 정치범 여러 명이 생활한 큰 감방이 나타났다. 그리고 문 안쪽에는 당시 죄수들의 신상카드를 복사해 전시해 놨다. 인종 인도계, 죄명 파업, 형기 12년, 그리고 지문. 파업에 12년 형이라니!

▲ 방 밖에서 열쇠 구멍으로 본 관광객들. ⓒ손호철
감옥의 배식량에도 인종차별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즉 백인 죄수는 흑인 죄수보다 배식을 많이 줬는데, 이를 나타내는 배식정량표도 붙어 있었다. 모니는 죄수들이 만델라의 지휘로 단식투쟁을 통해 이를 개선했다며,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방 밖으로 나가 철문을 닫아보니 열쇠 구멍만 보였다. 열쇠 구멍으로 통해 모니의 설명을 듣고 있는 관광객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내가 간수가 된 기분이었다.

일반동을 나와 작은 운동장을 가로지르자 작은 건물이 나왔다. 이 건물이 만델라를 비롯한 정치범들이 갇혀 있던 독방동이다. 좁고 긴 복도 좌우로 독방들이 있었다. 독방에는 찌그러진 조약한 식기와 마치 가마니로 짠 듯한 거친 침구가 놓여 있었다. '저것이 침구?' 대학 시절 갔던 서대문 형무소는 여기에 비하면, 호텔급이었다.

우리 같으면 당연히 표시해 놨을 텐데, '만델라 감방'이라는 표시가 복도가 끝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모니에게 "이중 어느 곳이 만델라 방이었느냐?"라고 묻자, 그는 "이중 하나다"라고만 말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정색하고 설명했다.

"독방동에 갇혀 고생한 정치범 30명 모두가 소중한 투사들이었으며 이들의 고통 역시 위대한 것이었기에 만델라만을 특권화하지 않았다."


그의 감방을 별도로 표시하지 않은 이유다. 감동적인 이야기였고 만델라의 감방이 어느 곳이었나를 집착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 독방 내부.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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