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6년 10월 11일 발행된 유라시아 세계 체제 ① 내가 윤여준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에서 이어집니다.)
윤여준과의 대담을 아예 '한국 견문'의 한 꼭지로 삼기로 했다. 언뜻 <유라시아 견문>을 통하여 내가 만나온 경세가형 지식인, 실학자들과도 포개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은 기존과 전혀 다르다. 원로가 묻고, 내가 답했다. 완숙한 베테랑이 질문하고, 새파란 서생이 응답했다.
이런 구도를 선뜻 수용할 수 있는 어르신 또한 결코 많지가 않을 것이다. 열려 있고, 깨어 있는 청년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유라시아 견문> 1권을 두고 나눈 긴 대화를 소개한다.
유라시아 세계 체제
윤여준 : 그동안 한국에서는 유라시아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무지에 가까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김명섭 옮김, 삼인 펴냄)이 출간된 것이 1997년인가요? 그 책에서 유라시아의 전략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일부나마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이야기한 적도 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즈음에 이병한 박사의 <유라시아 견문> 1권이 출간되어 유라시아가 어떤 지역이고 어떤 문명을 가졌으며 역사적으로 우리와 어떻게 교류하고 교감해 왔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어 큰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980년대 초반 싱가포르에서 3년을 넘게 살았고, 인도네시아를 비롯하여 이 박사가 갔던 여러 나라에도 일찍이 가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유라시아적인 관점으로 그 나라들을 바라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유럽은 유럽이고, 아시아는 아시아였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통으로 아울러서 사고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이 박사가 가고 있는 유라시아의 대장정을 마음으로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책 서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공간적 장벽을 허물고, 전통과 근대 사이의 시간적 단층을 돌파해내고 싶다고 했죠. 그래서 유라시아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심지어 스승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 (웃음)
이병한 : 거스른 것은 아니고요. 잠시 미루어둔 것입니다. 천천히, 그러나 더 크게, 더 오래 보답할 생각입니다. (웃음)
윤여준 : 그 서문서부터 논쟁적인 견해를 제출했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경쟁을 좁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죠. 유라시아의 재통합을 지향하는 운동과 20세기형 세계 체제를 지속하려는 세력 간의 길항이다, 즉,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를 건설하려는 세력과 지난 세기의 세계 체제를 지속시키려는 세력 간의 '문명의 충돌'이라고 했습니다. 일단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가 어떤 체제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두 세력 간의 충돌이란 새뮤얼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의 충돌'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이병한 : 세계 체제론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입니다. 젊은 시절 아프리카 연구부터 시작했던 것으로 압니다. 활동의 거점은 아메리카이고요.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기원을 유럽의 지중해에서 구하죠. 유럽-아메리카-아프리카를 세계 체제론의 기축으로 삼은 것입니다. 대략 15세기부터 근대 세계 체제가 형성되고 변용되는 과정을 큰 스케일로 엮어내셨죠.
저 역시 20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그 이론적 자장 속에서 공부하고 연구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꾸 빈틈이 눈에 들어옵니다. 과연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기원을 15세기 지중해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인지부터 의구심이 들어요. 2017년 초에는 저도 지중해 및 유럽을 견문할 계획인데요. 돌아보면 당시의 지중해란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의 지엽이자 말단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유럽의 도시 국가도 인도양 무역망에 접속하기 위해서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동방 무역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어디까지나 국지적 장소에만 닻을 내리고 활동하는 '회사'들이었을 뿐이에요. 여전히 중심-반중심-주변의 위계적이고 구조적인 착취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해 인도양 무역망을 바탕으로 한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가 여전히 지속되었던 것이지요. 18세기의 세계 지도를 보노라면 영국도, 프랑스도 후발 국가들에 그쳤습니다. 여전히 유라시아형 제국들, 오스만제국, 사파비아제국, 무굴제국, 러시아제국, 대청제국이 세계를 호령했던 시절입니다.
다만 유럽과 아시아와는 전혀 다른 역사의 물결이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에, 즉 인도양이 아니라 대서양에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이 아메리카의 토착적인 문명들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유럽 문명을 이식해갔죠. 구미의 세계사 서술은 이러한 유럽-아메리카의 일방적인 방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시각을 고스란히 투영해서 유럽-아시아의 관계, 즉 유라시아에서도 비슷한 조류로 역사가 진행된 것처럼 오독하고 오해하는 착시가 일어났다고 봅니다.
유럽과 아시아 간의 힘의 역전, 이른바 '대분기'가 발생한 것은 18~19세기의 일입니다. 그것도 문명적 수준의 격차라기보다는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이었죠. 서구에서 석탄과 석유 등 지하자원을 독점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유라시아 제국들을 해체해갈 수 있는 동력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국들이 붕괴된 것도 돌아보면 극히 최근의 일이거든요. 무굴제국이 해체된 것이 19세기 중반입니다. 대청제국의 붕괴는 불과 100년 전이죠. 오스만제국은 1924년에 사라졌으니, 100도 채 안되었고요. 500년 서구 패권이라는 과장된 인식을 답습하는 세계 체제론에 일정한 유보를 두지 않을 수 없게 된 까닭입니다. '고작 100년', '길어도 200년'이라는 역사 감각의 구조 조정이 필요합니다.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13세기 세계 체제에 주목했던 학설도 있습니다. 재닛 아부-루고드의 <유럽 패권 이전>(까치 펴냄)이죠. 몽골세계제국으로 수렴되었다가 재확산되었던 유라시아의 연결망에 주목했던 선구적인 저작입니다. 저도 적지 않은 영감을 얻었던 책이고요. 그런데도 여전히 13세기에 방점이 찍혀 있음이 아쉽습니다. 15~16세기부터의 유럽 패권을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거든요.
과연 실제로 그러했는가?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18세기까지도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제국주의, 문화적 식민주의를 수반하지 않는 범유라시아 단위의 교류가 진행되었어요. 유럽-아메리카식의 일방적인 식민화로 작동했던 세계 체제와는 다른 세계 체제가 유럽-아시아에는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현재 유라시아의 주요 국가와 문명권에서 당시의 기억들을 복원하고 그때의 연결망을 복구해가려는 흐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에요. 제 식으로 표현하면 지난 100~200년을 반전시키고자 하는 세력이 있고, 그 반대편에서 지난 세기를 반복하고자 하는 반동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 '반전(反轉)파'와 '반동(反動)파' 간의 길항을 '문명의 충돌'이라고 보는 것이고요.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와 유메리카형 세계 체제간의 일합이라고나 할까요?
'문명의 충돌'을 처음 조망한 이가 헌팅턴이었는데요. 헌팅턴은 제자였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보다는 더 식견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전 세계가 자유민주주의로 수렴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후쿠야마와 달리, 헌팅턴은 이데올로기의 싸움 대신에 종교나 문명권별로 나뉘어져서 인류가 다투는 미래를 전망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가 나누었던 7~8개의 문명권이 13세기 세계 체제론에서 파악하는 권역별 무역망과 포개지는 바가 큽니다. 그런데도 헌팅턴 역시 문명권별 차이와 갈등에만 주목했을 뿐, 그 문명과 문명 사이의 연결망 및 오래된 공존의 역사에 대해서는 크게 착목하지 않았습니다. 이데올로기 대결을 종교간 대결로 바꾸었을 뿐이죠. 냉전 의식의 지속이랄까, 구미적 편견이 복제되고 있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고 할까요?
저는 다시 한 번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 장소가 미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상과 장소는 긴박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저 자신부터가 장소의 변경이 야기하는 사고의 변화를 여러 차례 경험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듯한 얘기로 들릴 수가 있죠. 9.11 테러도 있었고, 테러와의 전쟁도 진행되고 있고요.
문제는 그러한 미국인의 실감을 우리들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점입니다. 냉전기 좌-우가 체제 경쟁을 벌인다는 인식 자체가 제3세계 국가들의 행보를 규율하는 '프레임'이었거든요. 탈냉전기 문명의 충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기독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이 충돌하고 있다고 해서, 그러한 세계관을 동아시아에 사는 사람들까지 답습할 이유는 없는 것이잖아요?
과연 우리가 몸을 섞고 살아가는 유라시아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상이 '문명의 충돌'인가?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은가? 통합과 연합과 연결이 더 큰 흐름이지 않은가? 동북아와 동남아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동아시아형 분업 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미 상당한 제도적 수준에 이른 아세안 공동체, 히말라야 너머에서 복원되고 있는 남아시아 공동체와 인도양 공동체, 이슬람 세계의 재통합 움직임, 나아가 구소련권을 다시 묶어내는 유라시아 경제 연합, 조금 더 멀리 가면 유럽조차 아메리카보다는 아시아와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가고 있는 흐름 등등. 이는 헌팅턴식 '문명의 충돌'과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유라시아의 오래된 연결망을 새로이 복원하려는 세력이 있고, 지난 100년처럼 다시 쪼개서 분열시키려는 '외부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유라시아 밖에 위치한,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망망대해를 지나서야 자리하는 어떤 '외부 세력' 말이죠. 한국은 그 '외부 세력'에서 발신하고 유통시키는 정보와 이론과 사상에 지나치게 결박되어 있습니다. 아직 독자적인 시각을 갖출 수 있는 자생력을 기르지 못했다면, 다른 방향으로의 지식과 정보 수집에도 노력을 기울여서 최소한의 균형 감각은 확보해야 할 텐데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그러하지 못한 것 같아서 참으로 아쉽습니다.
윤여준 : 기독교 문명과 유라시아 문명 차이를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기독교 문명은 상당히 배타적이 않습니까? 상대방을 늘 제압해왔고요. 사실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의 충돌'도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 간의 충돌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문명 역시 기독교 문명 못지않게 전투적이라고 생각하고요. 과연 이게 맞는 인식일까요?
이병한 : 질문하신 문장 하나하나가 논쟁적인데요. 전 일단 기독교 문명과 유라시아 문명을 분리하고 싶지 않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분단 체제'를 반복하는 논법일 수 있거든요. 배타성은 기독교 문명만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일신교의 내재적인 특징일 수 있죠. 게다가 기독교 문명이 상대방을 제압해온 기간은 극히 짧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죠. 일신교 종교 전통의 '최신판'이었던 이슬람 문명에 줄곧 밀려왔으니까요. 그런 힘의 격차가 양 문명 간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이슬람 제국들이 1000년간 과시했던 포용력과 관용성이라는 소프트 파워 역시 하드 파워에 바탕을 두고 발산되었던 것이니까요. 몽골세계제국이 해체되고 유라시아에 5대 제국이 들어섭니다. 중국에서는 명청이, 북방에서는 러시아제국이 몽골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계승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셋은 모두 이슬람 제국이었어요. 세계 5대 제국 중에 3개가 이슬람 제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이슬람제국의 내부에서는 종교 간 공존 체제가 비교적 원만하게 가동되었고요. 그런 점에서 지난 20세기만큼은 이슬람 문명권 역시 전투적이었음을 부정하기 힘듭니다.
종교별로, 문명권별로, 나아가 민족별로 분리하여 독자적인 정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즉 '국민 국가'의 발상 자체가 지극히 유럽적인 맥락의 소산입니다. 유라시아의 서쪽 끝 사람들은 유달리 종교로 계속 투닥거렸어요. 이슬람 문명권과의 십자군 전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에서도 신교와 구교가 나뉘어져 주야장천 싸운 것이 30년을 헤아렸죠. 한 세대가 넘도록 종교 전쟁을 지속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끝에 도출한 방편이 종교와 국가를 일치시키자는 것이었고요. 신교도들은 신교 국가에서만 살고, 구교들은 구교 국가에서만 따로 살자는 것, 이것이 이른바 '베스트팔렌조약'의 핵심 내용이죠. 서로 별개의 '독립 국가'로 갈라서서 신교 국가도 구교 국가도 상호 평등한 국가로 인정키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이제 민족주의로 싸워요. 신앙 공동체가 신념 공동체로 이행한 것입니다.
이걸 '근대적인 국제 관계의 출발'이다 어쩐다 하면서 배우고 외웠던 제 학부 시절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우스워요. 중화 세계 질서와 이슬람 세계 질서에 견주어 수준이 훨씬 낮은 국제 질서거든요. 이러한 후발 지역의 국지적인 시스템이 지하자원의 독점적인 사용에 힘입어 이식됨으로써 선진적이었던 유라시아형 세계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라시아형 제국들의 분열과 해체로 엄청난 혼란의 시기로 진입하게 된 것이죠. 동아시아식으로 말하면 '천하대란'이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제국의 성격을 상당 부분 회복한 나라였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터키공화국은 오스만제국의 속성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근대 공화국'이었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중동이 세계의 화약고를 지속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제국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일개 '터키인의 나라', '투르크족의 국가'가 되어버린 것이거든요.
문명권적 질서가 붕괴되고 나서 등장한 국가들은 모두가 '전투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국 시대의 군사 국가들이니까요. 20세기 국민 국가의 지도자들이 십중팔구 군인이었다는 점, 군사 독재가 20세기의 가장 일반적인 정치 체제였다는 점 역시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죠.
윤여준 : 2016년 9월 27일 <한겨레>의 '정의길 칼럼'에서는 중동 전쟁의 본질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둘러싼 열강의 쟁패라고 밝혔습니다. 역사적으로 부와 문명이 집중되었던 지역이고, 세 대륙을 잇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제국들이 명멸해 왔다고 합니다.
근대 이후에도 석유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싸움을 계속했고, 지금도 중동 다툼의 배경에는 미국과 러시아가 있다고도 하고요. 나아가 이 지역의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이 국민 국가로서 존속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전망까지 보태었습니다. 문명사적으로 보자면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까요?
이병한 : 앞으로 그쪽을 견문하며 써야 할 주제이기도 한데요. 재차 오스만제국을 환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하신 현재의 중동 국가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이집트 등등이 국민 국가, 독립 국가가 된 것이 다 오스만제국의 해체와 관련된 일이거든요. 오스만제국 당시에는, 중국으로 치자면 일종의 '성(省)'에 해당하는 곳들이었죠. 복건국, 광동국, 산동국, 만주국 등등으로 산산이 쪼개진 것입니다.
오스만 시절에는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에서 이들 지방으로 행정관들을 파견시켰으니까요. 그리고 그 이스탄불에는 중화제국의 황제나 천자에 빗댈 수 있는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이자 수호자로서 칼리프가 있었죠. 이 제국형 공존 체제가 해체됨으로써 국가 간 경쟁 제체로 재편된 것입니다. 고비용 저효율의 후진적 체제가 이식된 것이죠.
주목해야 할 점은 중동 및 이슬람권 사람도 지난 100년의 혼란의 원인으로 '서구적 근대화', 즉 국가 간 체제로의 이행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IS(이슬람국가)이죠. 이들이 건국 이념으로 표방하는 것이 칼리프 제도의 부활이거든요. 이슬람 세계의 (재)통합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중동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지금처럼 나라별로 쪼개져서는 영국과 미국, 소련/러시아 등 외세들의 영향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요.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제가 올 여름부터는 사전을 끼고 읽으면 아랍어 신문을 해독하고 방송을 일부나마 들을 수 있는 실력이 되었는데요. 그쪽 아랍어 공론장에서 실시하는 여론 조사 결과들이 정말로 흥미롭더군요. 전 세계 무슬림들의 다수가 현재의 이슬람국가에 우호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대략 70% 이상이 IS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 반면으로 칼리프 제도의 부활에 대해서만큼은 80% 이상의 지지도가 나와요.
그런 여론 조사를 보고 있노라면, 역사학자로서 '역사적 상상력'이 가동되게 됩니다. 제국의 초기 형성사는 폭력으로 점철되고 피로 얼룩지게 마련입니다. 동서와 고금을 불문합니다. 난세를 치세로 전환시키는 동력은 일단은 무력이거든요. 다만 그 치세를 지속시키고 성세로까지 고양시키는 것은 문화와 사상과 제도의 힘이죠.
혹시 2014년 이래 IS의 등장이라는 사건도 장기적인 지평에서 회감해 보면, 100년 전에 완전히 사라졌다고 여겼던 칼리프 제도가 복원되어 가는 초기 국면이 아닐까? 초창기의 시행착오라고 볼 수 없을까? 천주교의 역사에서도 교황의 자리가 공석이었던 기간이 수십 년이었던 적도 있거든요.
그렇다면 칼리프의 재림과 함께 지난 20세기 또한 이슬람 문명사에서의 '일시적인 이탈과 굴절'로 기록되는 날이 오지는 않을 것인가? 테헤란과 이스탄불 거리를 산책하면서 그런 생각을 곰곰 해보고는 합니다. 이게 역사학자 특유의 상상력일지, 그저 공연한 망상일지는, 이슬람 세계로 재차 돌아가서 더 깊이 보고 듣고 쓰면서 정리해 가려고 합니다.
윤여준 : 세력으로서 IS는 최근에 쇠락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IS가 현실 권력으로서 의미를 상실한다면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보는지요?
이병한 : 당장 IS의 성패 여부와는 달리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점화(點火)시켰다고 할까요? 꺼진 불씨를 다시 살렸다고 할까요? 스파크를 일으킨 것입니다. 칼리프라는 거대한 화두를 재차 이슬람세계에 던져 놓은 것이죠. 그 화두는 인도네시아부터 모로코까지 유라시아 전체를 망라하여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데웠어요. IS의 소멸과 무관하게 지속될 것이라고 봅니다.
윤여준 : 기층 민중 사이에서 앞으로 상당한 에너지가 분출될 수도 있다?
이병한 : 네. 오히려 신심 두터운 기층 민중들이 더 크게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근대화된 세력들', '세속주의 세력들', 즉 그간 국가별로 쪼개져서 나라를 이끌어왔던 정당의 지도자들이나 군부 세력들은 그러한 움직임을 도리어 우려하는 것이죠.
아랍어 공론장에서 흥미로운 현상 중의 하나가 '민족주의'라는 말 자체가 드물어요. 대개 '부족주의'라고 표현합니다. 20세기의 민족주의를 '신부족주의'라고도 하죠. 현재 국가의 대통령이나 총리들을 일개 '부족의 리더'라고 보는 것입니다. 20세기 중국사의 용어를 빌면 '군벌'들인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에 대일통의 천명을 방기하고 외세의 의존하여 작은 권력을 누리던 지방 군벌들이 많았거든요.
이슬람 세계의 민중들이 자국의 지도자들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비아반도의 부족 시대를 마감하고 통일 시대를 출현시켰던 칼리프 시절에 대한 향수가 점점 더 크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10월부터 4~5개월간 집중적으로 계속 써나가려고 합니다. <유라시아 견문> 2권의 중요한 화두이기도 하고요. 21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조류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여준 : 유라시아 문명의 뼈대가 페르시아, 인도, 이슬람, 중국 문명으로 구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문명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어떤 핵심 가치가 있을까요?
이병한 : 일단 다시금 유라시아 문명에 기독교 문명, 유럽 문명을 배제하지 말자는 입장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시아 견문>이지, <유라시아 견문>이라고도 하지 않았을 테고요. 저는 지역별, 종교별 문명의 차이보다는 소위 석탄/석유 이후의 '근대 문명'과 그 이전의 문명 간의 격차가 더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편입니다.
아니, 일본의 후쿠시마 사고부터 기후 변화, 지구 온난화, 사막화, 생물 다양성의 상실 등을 모두 아울러서 보자면 고작 200년도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인류의 삶의 방식을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시되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문명'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해보야야 하는 시대에 도달한 것이죠.
그와 관련해서 올해 제가 겪었던 경험 하나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국제 요가의 날이 6월 21일이에요. 제가 요가 마니아라는 것은 이미 밝힌 바도 있고요. 그때 이란의 테헤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국가이지만 국제 요가의 날 행사가 열리더라고요. 그런데 장소가 모스크였습니다. 모스크에서 요가를 했던 것이죠.
더 흥미로웠던 것은 특별한 날의 행사라며 108배를 했거든요. 요가는 힌두교와 불가분이고, 108배는 또 불교와 밀접한 의례잖아요? 저도 108배는 처음 해보았습니다. 제대로 자세를 갖추고 108배를 하니까 1시간 30분이 걸리더군요. 모스크와 요가와 108배, 이슬람과 힌두교와 불교가 혼종되는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국제 요가의 날에 테헤란의 모스크에서 108배를 했던 유일한 동북아 출신 사람이었죠. '문명의 충돌'과는 전혀 다른 문명 간 공존과 융합을 온 몸으로 실감한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그 108배라는 것이 한없이 나를 낮추는 훈련 과정입니다. 내 몸을 수그리고 구부려서 바닥까지 낮추는 동작을 100번 하고도 8번을 더하는 것이죠. 그래서 60배? 70배? 어느 순간부터는 '무아'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모든 잡념들이 떨쳐져나가는 평정심에 이르게 되더군요. 108 번뇌가 사라지는 기분?
굳이 페르시아 문명부터 중국 문명까지의 어떤 공통점을 꼽는다면, 이런 점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하늘 아래, 신 아래, 도 아래, 법 아래, 겸허했던 인간의 모습? 감히 '휴머니즘'을 말할 수 없었던 더 큰 세계에 대한 충만한 감각.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었던 것이죠. 인권을 주장하기에 앞서, 인성을 다지고 인도를 닦는 것을 우선시했던. 사람의 권리를 옹호하기에 앞서 나의 사람 됨됨이를 먼저 살펴보고자 했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소망했던 인간의 마음가짐.
실은 기독교 문명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해요. 언제부턴가 인간 중심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그 과정을 '세속화'니 '근대화'니 '계몽주의'니 온갖 긍정적인 어감의 말들로 포장해온 것이죠. 요즘말로 '프레임'에 걸린 것입니다. 지금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인문학과 사회과학들이 그런 프레임을 전파하는 전초기지들이죠. 그러나 그렇게 과도한 인간 중심주의가 만연했던 시절도 빠른 속도로 저물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델리의 네루 대학교에서 머물 때, 무척 예외적으로 한국이 연일 화제가 되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알파고와 이세돌이 '세기의 대국'을 펼치던 무렵이었죠. 그때 네루 대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이랑 여러 얘기를 나누었어요. '세속화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 이성 중심으로 사고했던 인간론 자체가 한계에 직면한 것 아닌가,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영성지능의 방향으로 진화해가지 않겠는가.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 탈세속화, 재영성화의 세기로 진입하고 있는 것 아닐까 등.
대학이라는 장소 특유의 학술적 개념으로 설명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노이에 살던 1년 동안 가장 아름답다고 여겼던 풍경이 그들의 아침/저녁의 일상이었어요. 출퇴근할 때, 등하교 할 때, 집집마다 거실에 만들어둔 작은 성소에서 조상님들께 절하고 인사를 올려요. 학교 잘 다녀오겠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돌아올게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등등. 돌아가신 망자들과도 현재를 공유하더군요. 물리적 시간만이 아니라 역사적 시간을 겹겹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학적 시간이 아니라 시학적 시간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지요. 프랑스 식민 통치 100년에도, 미국과의 전쟁 20년에도,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만은 저토록 장구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눈물겹도록 벅찬 감동을 느꼈어요.
저들의 저 역사적이고도 시학적인 시간관, 즉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이 앞서간 사람들이 먼저 살다가 물려준 것이고, 오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공간에서 미래의 후세들이 살아갈 것이라는 시간 감각만 유지가 되어도, 지난 20세기의 '근대인'들처럼 속도전을 벌이며 최대한 사고, 쓰고, 버리는 자본주의 문명이 만연했을 것인가, 싶었습니다.
심지어 유럽조차도 머지않아 계몽주의의 시각에서 폄하했던 '중세'라는 시기를 영성이 충만했던 시절이라고 재인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세계를 단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원'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충만했던 세계로 '재주술화'시키는 작업, 재영성화시키는 과업, 저는 이것이 '근대 문명'의 독소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조차도 리얼리즘이니 모더니즘이 아니라 신화와 판타지와 SF 같은 것으로 재귀할 것 같고요.
윤여준 :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부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굉장히 가난하고 척박한 곳이거든요. 그래서 그들의 행복감이라는 것도 미개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병한 : 인도 견문을 마치고 이란으로 가기 전에 부탄과 네팔에 갔었는데요. 그 나라가 흥미로운 것은 국가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점입니다. 성장도 아니고, 복지도 아니에요. 그러니 GDP 같은 지표에 크게 구애받지도 않고요. 도리어 국가 관료들이 '행복 지수'라는 별도의 지표를 만들어서, 그 수치가 높아지는 것으로 국민들의 삶의 질을 평가하죠.
물론 그 지표 산출 방식의 합리성, 평가의 객관성 여부 등 꼼꼼하게 들여다 볼 대목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무턱대고 폄하하는 만큼이나 막연한 낭만도 사절해야겠죠. 부탄이라는 국가의 행보, 그리고 인도의 오로빌이라는 마을의 실험 등에 대해서는 <유라시아 견문> 2권의 말미에 따로 다루려고 합니다.
윤여준 : 다시 현실적인 주제를 짚어보죠. 영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일찍이 가입했습니다.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러했죠. 이 박사는 이것을 아편 전쟁 이래 200년 동안 지속되던 세계 체제가 저무는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나아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모두 AIIB에 참여한 것을 두고 유럽의 축이 확연하게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소위 'Pivot to Asia'인데, 오바마의 축의 이동은 배제와 봉쇄인 반면에, 유럽의 축의 이동은 참여인 것 같습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병한 : 당사자와 외부 세력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엄청 멀리 있는 나라에요. 동아시아에서 보아도 태평양을 건너야 하고요, 서유럽에서 보아도 대서양을 지나야 합니다. 신대륙이고, 먼 대륙이죠. 제가 유럽과 아시아를 분리해서 말하지 않고 '유라시아'라고 하는 것도 본디부터 하나로 연결된 대륙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쪽의 한제국과 서쪽의 로마제국이 실크로드로 교류했잖아요? 그 사이에는 페르시아제국이 있었고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오갔고, 상품과 문화가 돌고 돌았던 하나의 대륙입니다. 구대륙 유라시아와 신대륙 아메리카는 결정적으로 달라요. 신대륙 발견을 기점으로 삼아도 서유럽과 아메리카의 긴밀한 관계는 '겨우', '불과' 500년 남짓입니다. 5000년이 넘는 유라시아 단위의 교류와 비교가 안 되죠. 유럽과 아시아는 갈수록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미(歐美)의 시대에서 구아(歐亞)의 시대로, 유메리카의 시대에서 유라시아의 시대로 이행 중입니다.
윤여준 : 정말 거대한 '반전의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라시아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이 미국의 의도, 즉 유라시아의 재통합을 저지하고 분할 지배를 지속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이병한 : 그럼요. 점점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남아시아의 핵심 동맹국이었던 필리핀의 최근 행보를 보십시오. 중동의 핵심 동맹국이었던 터키는 또 어떻습니까. 국내 언론에서는 크게 보도되고 있지 않지만, 요 몇 년 이스라엘의 행보도 심상치 않습니다. 이스라엘 총리가 오바마보다 푸틴을 더 자주 만나요. 미국에만 의존해서는 장차 이스라엘의 안보를 보장받을 수 없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정치인들도, 심지어 한국의 박정희 같은 이들도 미국이 의도하는 바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지배 전략이 무엇인지 능히 꿰고 있었겠죠. 다만 당시만 해도 미국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힘의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굴종했던 나라들이 많았겠죠.
그래서 저는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진보파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수긍하지만은 않아요. '현실 정치'라는 것이 엄연하게 작동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제가 살아가는 시대는 그렇게 현격한 힘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굴욕을 감내해야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죠. 이만큼이라도 국력을 키워준 선생님과 선배님 세대에 깊이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굴종과 굴욕을 딛고서, 저희 세대는 더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윤여준 : 하버드 대학교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 : the west and the rest)>에서 서양의 패권을 제국주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진부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양이 패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서양 문명에만 있는 6가지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고 설명하죠. 경쟁, 과학, 재산권, 의학, 소비 사회, 직업 윤리입니다.
서유럽이 중국을 집어 삼킨 것 또한 부분적으로 정치 경제 분야에서 더 많이 경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고요. 그리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이 행정이나 군사 면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변모한 것은 과학 혁명을 이룩한 과학자 무리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 출신이기 때문이라고도 했어요. 굉장한 서구 우월적인 시각인데, 이런 주장을 수용하는 학자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박사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이병한 : 맞는 말도 있고, 틀린 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유럽의 500년 패권은 유럽-아시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관점이라고 이미 말씀드렸고요. 그리고 서유럽이 중국을 집어 삼켰던 적이 있나요? 언제? 제 주전공이 중국사인데 금시초문입니다. 중국을 삼킨 세력은 대개 서역과 북방 출신의 유목민이었지, 유럽인이나 일본인처럼 해양 세력이 내륙을 장악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영국이 인도를 삼킨 적은 있지만….
윤여준 : 너무 커서 못 먹은 거 아닌가요? 목에 걸려서? 그럼 자기들이 괴로워지니까?
이병한 : 규모(하드웨어)보다는 자질(소프트웨어)에서 유지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결국 중화제국의 논리를 익혀야 하거든요. 중국 문명을 흡수하지 않고서는 중원을 차지할지언정 장기 지속하는 지배자로 등극할 수가 없어요. 서역에서 온 이들도, 북방에서 내려온 이들도, 동북에서 진출한 이들도 결국은 중화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제국의 경영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퍼거슨의 책은 제목부터가 단수형 '문명'이잖아요? 복수형 '문명들'이 아니라. 이미 고정 관념이 투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구, 구미의 문명만을 문명으로 받들고, 그 잣대로 세계를 평가하는 것이겠죠.
그 서구 문명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했던 면이 군사력과 경쟁이었다는 주장에는 100% 동의합니다. 다만 그것이 진정한 문명인가 하는 것에는 심각한 이견이 있습니다. 군사적으로 발전하고, 경쟁에 능한 것을 '문명'이라고 여기는 것이 참된 문명인가? 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중화 문명권에 살았던 사람들은 군사적 경쟁에 탁월한 이들을 '오랑캐'라고 여겼거든요. 아직 배우고 익히지 못한 야만인이라고 내려 보았죠.
문치로 다스려지지 못한 사람들이 완력을 과시하며 경쟁하는 것이거든요. 예를 갖추고 법을 지키고 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유학자들이 아편 전쟁 이래 서구의 파상공세를 '금수(禽獸)의 짓'으로 비유했던 것이고요. 강자가 힘을 발산시키지 않고 덕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문명'이었습니다. 약자가 비굴하지 않고도 떳떳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문명'이었고요. 여기에서 무엇이 문명인가에 대한 세계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동방 사람들은 가급적 경쟁을 억제하고 가능하면 전쟁을 덜하고 피하는 것이 문명이며, 이것을 잘 해나가는 나라들을 '문명 국가'라고 생각해 왔어요.
문명을 한자로 풀면, 문(文)으로 밝힌다는 것(明)이잖아요. 강함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으로써 덕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퍼거슨도 역시 장소에 결부된 사고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영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활동하다보니 아직 '문명' 공부가 턱없이 부족하신 거겠죠. 여전히 동방 고전을 한문으로 읽어가는 수천 년의 트레이닝 과정을 경험해보지도 못하셨을 거예요. 이제는 진정한 문명이란 이러한 것이라는 점을 하버드 대학교 교수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웃음)
윤여준 : 어쨌든 문명이 먹힌 것 아닌가요? 지난 100년, 200년 동안 무참하게 약탈도 당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한 문명이고, 저쪽을 야만이라고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요?
이병한 : 역시 '時勢'(시세)를 따져야 합니다. 지금이 난세의 정점인가, 난세의 말단인가. 치세의 초기인가, 성세의 절정인가 등등. 난세에는 유학자들도 붓 대신에 칼을 들죠. 의병장이 되잖아요? 테러리스트가 되어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기도 하고요. 다행히 제가 살아가는 시대는 서세동점의 끝물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 선배님은 그쪽에 가서 그쪽이 '문명'이라고 설파하는 것을 배우고 익혀 오셨지만, 21세기의 한복판에 이르면 이쪽에서 저쪽을 도리어 가르치는 시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제야말로 동과 서가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마 그 진정한 동서 대화의 첫 단계를 목도할 수 있는 첫 세대일 듯합니다.
그 동서의 대화가 무르익어서 새로운 문명이 만개하는 것을 보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제가 해야 할 역할 또한 동서고금을 회통시킬 대사업을 주도적으로 해나갈 다음 세대, 즉 30년 후의 후세들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역사의 주연이 아니라 조연인 셈이죠. 한국으로 돌아가는 2018년부터 그 조연자의 역할을 잘해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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