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재구성
공소장, 피의자와 참고인 진술서 등을 종합해보면, 이 사건은 새로운 인물, 장재성 씨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장재성 씨는 제주 출신의 고등학교 국어 교사였습니다. 교원 시험에서 전국 1등을 차지했을 만큼 제주 지역 수재로 꼽혔던 그는 1968년 3월 일본 파견교사 자격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그해 4월 후쿠오카에 있는 한국교육문화센터 소장으로 발령이 났고, 장재성 씨 내외는 5월 일본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그의 사촌 형 장수상 씨가 있었습니다. 출국 전 미리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장수상 씨는 그의 연락을 받고 아들, 그리고 자신의 이종사촌이자 김인봉 씨의 둘째 형이기도 한 김인수 씨와 함께 공항에 마중 나갔습니다. 그게 김인수 씨와 장재성 씨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사촌이 경찰에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인수 씨는 장재성 씨에게 '오사카 영사부에 협조적인 말을 해달라'며 부탁했습니다. 장재성 씨는 김인수 씨의 부탁대로, 구속 조사를 받고 있는 김인봉 씨를 만나 '왜 밀항이라는 어리석은 짓을 했느냐'며 꾸짖으면서, '오무라 수용소에 있다가 곧 귀국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후 장재성 씨는 그해 7월 재일교포 학생 600명을 이끌고 귀국 방문 프로그램 인솔자 자격으로 귀국했다가 입국 심사장에서 여권을 회수당했습니다. 조총련계 사람과 만난 사실이 알려져 다시 일본으로 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재성 씨는 아내인 좌월선 씨에게 편지를 보내 이같은 사실을 알리고, 다시 한국에서 교육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내무부 치안국 외사과 검거 기록에 따르면, 장재성 씨가 연행된 것은 김인봉 씨가 체포된 날보다 사흘 앞선 1970년 8월 22일 오전 8시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집행된 것은 24일 오후 5시 50분이었습니다. 구속영장 없이 이틀 넘게 불법 구금된 것이었습니다.
김인봉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월 25일 제주 경찰국 수사관에 의해 강제 연행된 김인봉 씨는 9월 4일 오후 5시 30분까지, 열흘간 불법 구금 상태에서 수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피고인 김인봉은 약 12년간을 50여 회에 걸쳐 조총련 간부인 형 김인수와 연락하면서 교양과 지령을 받고 임경순을 포섭하여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해 일본에 밀항, 김인수에게 제보 누설하는 등 조총련 간첩이며 골수 적색분자로서 마땅히 극형을 받아야 할 자이고…."
- 일본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형인 김인수 씨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조총련의 활동을 자진 지원할 목적으로 '이남에서 계속 군인을 징집하고 있다', '고속도로는 일본 기술자 등에 기술을 제공해 건설하고 있다', '미군이 현재 철수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이 주둔하고 있다'는 등 국가 기밀을 조총련계 간부인 그의 형에게 제보.
- 또, 형으로부터 '멀지 않아 북한에 의해 남북통일이 된다', '북조선은 일본보다 공업이 발달했다' 등 교양과 지령을 받고 금품을 수수하는 한편 반국가단체의 지령을 받아 잠입.
장재성 씨의 혐의는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부터 북괴의 허위 선전을 들었'으며, '반국가단체 구성원인 김인수로부터 김인봉을 면회해, 김인봉에게 공작 지령을 주어 귀국 침투시키는 김인수의 활동에 편의를 제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완 씨는 혀를 찼습니다.
"집 뒤에 있는 땅 사라고 준 돈일 텐데 그게 공작금이 되어버린 거죠."
수사관들은 김인봉 씨와 그의 형 김인수 씨가 주고받은 편지를 증거로 내세웠지만, 성완 씨 어머니가 보기에 그 편지 내용은 하잘것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방을 뒤져서 편지를 보더니 간첩 증거를 찾았다 하대요. '사람은 살아지게 돼 있다'는 말인데, 공산 적화하는 내용이랍니다. 살기가 힘들다고 형님한테 하도 징징거리니까 그 형님이 어떻게든 살게 되니 걱정 말라는 뜻으로 쓴 건데 그렇게 얘기를 하더랍니다."
어머니 송찬선 씨는 "더 우스운 일도 있다"며 코웃음 쳤습니다.
"야들 아버지랑 같이 간첩 죄로 끌려간 임경순이란 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장례 치를 산 터를 봐주는 사람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 사람한테 땅을 봐 달래서 상을 치르고, 그 이야기를 편지에 쓰면서 '임경순이라는 자 덕분에 무사히 할아버지 장사를 마쳤다'고 했는데, 그걸 가지고 임경순이도 간첩이라고 합니다. 우리랑 친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그 편지 때문에 엮여서는 간첩이라고. 땅 보는 사람이 간첩은 무신 간첩. 임경순이 마누라한테 미안해서 내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 사람도 결국 아파서 돌아갔는데, 아이고 미안해서 어쩐대요."
김인봉 씨의 가족은 김인봉 씨가 수사 과정에서 어떻게 고문당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한 번도 스스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첫 면회 갔을 때 퉁퉁 부은 얼굴을 보고서 고문을 받았단 걸 추측할 뿐이었습니다.
가족들은 과거 재판 관련 기록을 통해 가혹 행위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김인봉 씨는 1970년 당시 작성한 항소이유서에서 "후일 경찰에 체포된 이래 밀항하여 형님과 만나 무슨 군사비밀을 형님에게 제공하였냐고 심문하고 고문에 참지 못하여 허위진술인 '한국에는 백만대군을 자랑하는 대군을 보유하였고', '미군이 철수할 계획이라 합디다'와 '서울에는 어느 선진국에 못지않은 고층 건물이 많이 섰다' 등을 갖고 국가 비밀을 누설 운운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김인봉 씨와 달리, 교육 활동 외에도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던 장재성 씨는 책, 신문 기고 등을 통해 여러 번 고문 사실을 시사했습니다.
장재성 씨가 아내 좌월선 씨와 사별한 후 재혼한 이안자 씨는 '남영동 새벽 4시'의 의미를 진술서를 통해 밝혔습니다.
"고문을 전기로 맞았다는 것. 전기를 사용하면서 양쪽 팔에…라는 이야기를 하실 때 저는 도중에서 그걸 막았습니다. 공포도 느끼고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고 견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유는 새벽 4시, 매일 아침 고문을 맞았기에 이 시간에 눈 뜨게 되었답니다. 그 시간은 간첩이 되라고 하는 것을 거부하니까 목도로 맞았다고 말하셨습니다.
자주 후유증 때문에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고, 또 외출하실 때는 쓰러질 수도 있기에 이름과 연락쪽을 써넣는 표찰을 휴대하셨습니다."
장재성 씨 또한 고문 후유증을 앓았습니다. 그의 제자 허만회 씨는 "2002년에서 2003년 사이에, 감옥에 갔을 때 고문을 당해서 아픈가 요즘 허리 웅치가 아프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한약을 복용하시기를 원하셔서 어혈 처방과 함께 한약을 2번 조제해 드린 적이 있다"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김인봉 씨와 장재성 씨가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한 허위 진술은 결국 간첩 주요 증거가 되었습니다.
대법원까지 간 재판 결과, 장재성 씨는 1971년 9월 28일 징역 1년 및 자격정지 1년, 김인봉 씨는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2015년 12월 8일. 법원은 성완 씨와 이안자 씨 등 김인봉 씨와 장재성 씨 유가족이 낸 재심청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2016년 6월 27일, 법원은 두 망자의 간첩 죄에 대해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피고인 망 장재성은 공산계열의 목적 수행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장수상을 만난 것으로 보이고, 김인수와 만난 것 역시 단순한 대면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이므로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라고 보기 어렵다."
"피고인 망 김인봉이 한 말은 국내에서 적법한 절차 등을 거쳐 이미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이거나 피고인 망 김인봉이 사실 확인 없이 추측한 사실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누설되더라도 국가의 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피고인 망 김인봉이 김인수로부터 돈과 의류를 받은 것은 형으로서 한국으로 송환되는 동생을 위해 여비와 옷가지를 지원해 준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법원은 또한, 장재성 씨와 김인봉 씨를 영장 없이 체포한 것은 긴급구속 요건에 맞지 않아 불법 구금이 인정되고, 그러한 상태에서의 수집한 진술 등은 증거로서 무효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죽으면 그만인디, 그래도 귀신이 한을 풀었으니 얼마나 좋아함시롱. 모두가 노력해준 덕분이지 않겠어요."
이제 대법원의 최종 선고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성완 씨는 무죄 확정 판결이 나오는 날 동네에 플래카드를 걸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이건 아버지 개인의 명예 문제만도 아니고 자식들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웃들에게 평범한 사람이었고, 할아버지 할머니 자식으로서, 우리 오 남매의 아버지로서 평생을 살아온 한 사람의 삶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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