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유엔(UN) 주도의 기후 변화 대응 체제에도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파리 협정이 국제적으로 효력을 갖게 된 것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수순을 정리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모로코 마라케시의 22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2)의 안팎도 지금 당황스러운 분위기가 역력하다고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유엔의 우산 아래서 온실 가스(온실 기체) 감축 목표와 방법을 정한 틀 거리인 교토 의정서가 1997년에 채택되었지만, 2001년에 아들 조지 부시가 당선되자마자 미국이 자국 산업 사정을 이유로 탈퇴를 결정하면서 의정서가 무력화되었던 아픈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던 러시아, 일본, 캐나다 등 전 세계 온실 기체 배출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국가들이 미국의 뒤를 이어 불참하게 된 교토 체제는 그 불완전성 때문에라도 갱신이 필요했고, 2009년 코펜하겐(COP15)과 2015년 파리(COP21)라는 먼 길을 돌아 이제 겨우 새 체제를 탄생시키려 하는 참이다.
그런데, 기후 변화 회의론자들이 가득한 미국 공화당의 후보가, 그것도 기후 변화는 중국이 만들어 낸 날조극이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파리 협정도 무효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만도 한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염려한 오바마 행정부가 공화당의 비준 동의가 필요 없는 행정 명령 형태로 미국의 파리 협정 가입 절차를 진행해 놓았고, 앞으로 4년 안에는 탈퇴가 불가능하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화석 에너지를 선호하는 트럼프가 미국의 가입 철회를 막무가내로 선언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오바마의 청정 전력 계획이 법적 시비에 휘말려 있는 탓에 행정 명령 자체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대선과 함께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은 상원과 하원 모두를 완전히 석권했다. 트럼프 인수위원회에서 에너지 장관으로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나 석유 재벌 해럴드 햄의 이름까지 거론된다고 하니 염려가 더욱 현실화되는 것 같기도 하다.
교토 의정서에서 파리 협정으로 이어진 유엔 관리 하의 기후 변화 체제가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의 기후 변화 권고안 또는 그보다 적극적인 수준으로 실제로 세계 온실 기체 감축을 이뤄낼 수 있을지는 사실 회의적이었다.
그동안 교토 의정서의 의무 감축국인 선진국들은 유럽을 제외하곤 온실 기체 배출량을 더욱 늘려왔고 중국, 인도, 멕시코 그리고 특히 한국 같은 나라들은 말 그대로 배출량을 배가시켰다. 파리 협정이 적용되는 2020년 이전까지는 그 나마의 감축 목표도 공백 상태고 파리 협정이 채택한 자발적 감축 목표 제시(NDC,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라는 방식의 실효성도 극히 의문스럽다. 하지만 트럼프의 당선으로 인해 유엔 기후 변화 체제 자체가 다시 무력화된다면 어디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기후 변화 정책뿐 아니라 다른 모든 정책 의제들이 그렇겠지만 트럼프의 말과 앞으로의 행동이 일치할지도 미지수인데다가, 국제 기후 체제의 행위자는 매우 여럿이다. 게 중에는 미국 외의 다른 나라들도 있고 과학자 집단과 언론인들도 있으며, 미국 내에서도 트럼프 마음대로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트럼프 시대의 기후 체제가 갖게 될 가상적인 그림 몇 가지를 예상해본다.
첫째, 파리 협정이 더 느슨한 내용과 방식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온실 기체 배출 총량은 배출 순위 2위인 미국이 16%가량, 그리고 1위인 중국이 25%가량을 차지한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파리 협정을 탈퇴를 하거나 명목상으론 협정 내에 머무르더라도 실제로 NDC를 이행하지 않게 된다면 온실 기체 배출량 감축에 대한 제어력은 크게 상실될 것이다.
중국 역시 트럼프와 일견 갈등 관계이고 녹색 경제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이탈은 온실 기체 감축 목표를 느슨하게 하는 유혹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게 주요 배출국이 하나 둘 임무를 해태하기 시작하면 유엔에게 파리 협정은 기후 변화 대응의 구원 투수가 아니라 지속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폐기하기도 어려운 존재가 될 것이고 실제 내용과 방식은 보다 완화될 공산이 크다. 유엔 하의 기후 체제 자체에, 즉 소수 국가들이 주도하는 감축 방식과 시장 의존 해결 방식의 효용성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둘째, 파리 협정이 무력화되더라도 국제 협약 방식의 수단이 모두 쓸모없어지지는 않을 것인데, 큰 지역 범위의 기후 협약이 더 유효하게 작동할 수도 있을 수 있다. 유럽연합이나 중남미 국가들, 아프리카와 도서국 등 환경 취약국끼리의 기후 협약이 활성화되고 그 작용으로 미국 등 기후 변화 대응에 비협조적인 국가들을 압박하는 방법이다. 이는 무역 장벽과 외교적 압력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실효성을 가지려면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할 것이다. 더욱이 유럽은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으로 인해 유럽연합 차원의 대응 구상이 어려워진 측면이 있다.
셋째, 재생 가능 에너지를 포함한 에너지 관련 시장이 기후 변화 대응에서 오히려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당장은 트럼프와 공화당의 화석 에너지 사랑에 대한 염려가 큰 분위기이지만, 재생 가능 에너지 시장이 미국 내에서도 어느 정도 자생력과 동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셰일 에너지의 조건도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러한 예측의 배경이다.
중국이 풍력과 태양광 시장에서 미국을 앞서 나가고 세계적으로 재생 가능 에너지의 '그리드 패리티'가 확연해질 경우 장사에 밝은 트럼프가 실용적으로라도 재생 가능 에너지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예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수많은 시장들 스스로가 기후 변화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은 아니므로, 재생 가능 에너지 시장의 힘과 화석 에너지 시장의 약점을 활용하는 기획들이 수반되어야 한다.
넷째, 기후 정의 운동과 에너지 민주주의 운동이 더욱 성장할 수도 있다. 유엔도 못 믿겠고 트럼프도 못 믿겠으니 사회 운동의 강력한 투쟁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 하에서도 진통을 겪어온 북미의 키스톤 파이프라인 건설 재개를 둘러싼 갈등이 대표적이겠지만, 극단적 기후 현상과 에너지 문제를 체감하고 있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투쟁들이 빈발할 가능성이 높다. 유엔의 기후 체제가 답보한다면 회의장 바깥에서도 1999년 시애틀과 같은 투쟁이 벌어질지 모른다.
다섯째, 유엔과 정부에 의지할 수 없다면 기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역 수준의 자력갱생 노력이 활발해질 수 있다.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1975년의 <에코토피아>와 1981년의 <에코토피아 비긴스>(최재경 옮김, 도솔 펴냄)라는 소설에서 미국 북서부의 캘리포니아, 워싱턴, 오리건 주가 미 연방에서 탈퇴하여 에너지 독립과 생태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독자적 국가를 꾸린다는 가상의 미래를 그려내어 주목을 받았다.
마침 트럼프의 당선에 경악한 캘리포니아의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칼렉시트(Calexit)' 즉 캘리포니아 주의 독립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니 칼렌바크의 소설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미 유럽을 포함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진행 중인 '에너지 전환 마을'과 대안적 에너지 민주주의의 실험들에서 칼렌바크의 공상은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여섯째, 십수 년 뒤 기후 격변이 전면화된 지구에서 트럼프 회사가 판매하는 설국열차 티켓이나 인터스텔라 우주선 탑승 티켓을 확보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최악의 그림이다.
일곱째, 이 모든 그림들이 부분적으로 결합되어 전개되는 종합도가 그려질 수 있다. 아마 그것이 현실일 것이고,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지만 트럼프 시대는 트럼프 자신에게도 처음이라는 점이 어쩌면 위안이 되고 또 어쩌면 그만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하필 중요한 기후 변화 체제가 발효되는 시기에 다가온 트럼프의 당선은 실제로 기후 변화가 왜 일어나며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누구와 함께 해야 할지를, 모든 치장들을 떼어내고 진지하고 치열하게 질문할 것을 요구하는 한 바가지 찬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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