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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잘 먹겠습니다!" [민들레] 시민들이 함께 만드는 어린이식당

이런 식당 어디 없을까

아이들 데리고 저녁 한 끼 얻어먹을 수 있는 곳, 어디 없을까? 두 아이를 키우면서 어둠과 함께 하루의 피로가 몰려오는 저녁 무렵이면, 수도 없이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겉모습만 화려할 뿐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키즈카페'도 싫고, 배달 음식은 더더욱 싫고, 울고 보채는 둘째 단속하느라 눈칫밥을 먹으며 쫓기듯이 나오게 되는 일반 식당도 가기 어려울 때, 맘 편히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그런 곳이 있다면! 상업적인 분위기가 덜한 그런 식당 어디 없나?

요리에 관심이 많고 생활협동 활동을 오래 해온 나는, 영화 <바베트의 만찬>(가브리엘 락셀 감독, 1987)이나 <카모메 식당>(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2006)의 주인공처럼 어린아이와 부모를 위한 아늑하고 가정적인 분위기의 어린이 전문식당을 만드는 게 꿈이었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꿈은 역시 꿈일 뿐이구나…' 싶을 무렵,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일이 벌어졌다.

어린이 혼자 와도 괜찮아요.
숙제를 가지고 와도 괜찮아요.
함께 놀면서 저녁을 먹어요.
따뜻한 밥과 국을 준비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식당 운동'의 홍보 문구다. 일본은 20년 넘게 지속된 불경기와 저성장의 영향으로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빈곤층이 형성되었다. 높은 이혼율로 한부모 가정이 늘어나고, 일하는 부모의 늦은 귀가로 저녁밥을 사서 먹거나 그나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며 혼자 저녁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실이 일본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문제가 되었다.

바쁜 부모를 대신해 숙제를 봐주거나 말벗을 해주며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고 밥도 먹을 수 있는 일본의 어린이식당은 지금 도쿄, 요코하마 같은 수도권 중심으로 급속도로 늘어나는 추세다. 지역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의 엄마' 역할을 하는 이 식당은 2013년 21곳으로 시작해 2016년 7월 기준, 전국에 320여 곳으로 열배 이상 늘었다. 비영리 목적으로만 개설이 가능한 이 식당은, 어린이들뿐 아니라 맞벌이 부모, 전업주부, 싱글맘, 독거노인 등 여러 사정으로 따뜻한 저녁을 제 시간에 차려먹기 힘든 어른들도 함께 이용한다는 의미에서 '모두의 식당'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린이부터 고등학생까지는 무료 또는 100엔(한화 약 1100원) 정도, 성인은 300엔 정도로 이용할 수 있다. 장소는 개인 주택, 동네 가게의 한 코너, 주민센터의 조리실, 종교단체 시설 등 다양하다. 비영리 단체와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는 만큼, 주 5일 이상 문을 여는 곳부터 한 달에 한두 번만 문을 여는 곳까지 운영방식 또한 다양하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저녁식사 전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거나 그림책을 읽어주는 등, 전국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자율적인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어린이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싶은 사람들과 후원이나 자원봉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어린이식당 네트워크'가 꾸려지면서, 식당의 실제 사례와 운영에 관심 있는 시민들의 견학과 개설 강좌에 대한 문의가 줄을 잇는다고 한다.1 어린이식당을 둘러싼 최근 일본 사회의 움직임은 아동복지 전문가나 교사, 환경단체, 비영리 단체와의 교류로 올해 들어 더욱 활발해져 각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자주 보도되었고, 그만큼 대중의 인식과 관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 핵가족 단위를 벗어나 사회의 부엌과 거실을 만드는 어린이식당. ⓒ윤영희

우리 동네에도 '어린이식당'이 생기다

올봄에는 드디어! 말로만 듣던 어린이식당이 우리 동네에도 문을 열었다. 우리 가족이 가입해 있는 생협에 조리실이 딸린 공간을 무료로 빌려, 나와 조합원 친구들 몇몇이 일을 벌인 것이다. 여러 신문과 방송에서 어린이식당 사례가 화제가 된 까닭인지, 시작부터 굉장히 순조로웠다.

동네 가게들과 마트, 지역 자치회 등에 식당 홍보와 식재료 기부나 후원을 부탁하자마자, 유기농 두부로 유명한 두부공장에서 제일 먼저 연락이 왔다. 필요한 양을 미리 알려만 주면 준비해두겠다고 했다. 또 동네 빵집에선 그날 다 팔지 못하는 다양한 종류의 빵들을, 마트에선 간장, 식용유, 샐러드 드레싱 같은 조미료를, 생협 조합원 중에 텃밭농사를 짓는 분은 신선한 제철 채소들을 가져다 주었다. 어떤 분은 식당 냉장고에 고기를 몰래 넣어두고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쌀이나 국수 면을 기부해주시기도 했다. 식당이 열리는 날마다 크고 작은 힘들이 모아져 날마다 풍성하고 감동적인 일들이 일어났다.

별다른 준비 없이 시작한 우리는 "요즘 사람들, 차갑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그러는데… 아니다, 그치?"라며 놀라워했다. 나부터도 그랬지만 다들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그 마음을 한곳에 모을 수 있는 계기가 없었던 게 아닐까? 남거나 버려지는 식재료들을 누군가는 잘 모으고, 또 누군가의 정성스런 요리로 따뜻한 한 끼의 식사로 재생산되는, 이 과정에 드는 비용은 자원봉사자들의 지혜와 노동력으로 대체되어 동네 어린이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는 밥이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 식당뿐 아니라 다른 지역 어린이식당에서도 가장 자주 만드는 메뉴는 바로 카레라이스다. 일본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이기도 하고,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요리이기 때문인데 40인분의 카레가 만들어지는 냄비 크기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기부 받은 쌀과 고기, 채소만 가지고도 마흔 명이 먹을 수 있는 밥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최소한의 비용만으로도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여 풍성하고 따뜻한 한 끼를 나눌 수 있는 기적을 매번 확인하게 된다.

핵가족 단위의 작은 부엌과 거실을 벗어나, 사회의 부엌과 거실을 만드는 어린이식당. 음식이 완성되면, 이곳에 온 아이들과 어른들, 조리실에서 음식을 만들던 스텝들까지 모두 둘러앉아, "잘 먹겠습니다!"를 외치고 함께 저녁을 먹는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는 젊은 엄마들이나 손주들을 데리고 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고, 좀 큰 아이들은 먼저 식당에 와서 놀거나 숙제를 하다 일을 마치고 온 부모와 함께 저녁을 먹고 간다.

이따금 어린이식당에 처음 온 아이가 낯을 가리는 바람에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엄마와 단둘이 밥을 먹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굳이 무리하게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싶어 억지로 친해지려고 애쓰지 않는 분위기다.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편한 마음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문턱이 낮은 어린이식당이 되었으면 좋겠다. 처음엔 쑥스러워하며 인사도 잘 못하던 아이들이 여러 번 만나면서 먼저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할 때는 참 감격스럽다. '비빔밥이 너무 맛있었다'며 '매번 그것만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하거나, 조리실까지 찾아와 어떤 반찬이 맛있었다고 인사를 하는 아이도 있다. 맛있는 것을 먹으려면 꼭 돈을 많이 들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나는 깨고 싶다. 작은 케이크 한 조각도 정성을 거치면 가능하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맛으로 신체적인 배부름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포만감까지 느끼게 해주고 싶다.

▲ 기부받은 재료들로 풍성해진 식탁. ⓒ윤영희

1mm라도, 지금보다 사회가 나아질 수 있다면

어린이식당이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부로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어린 손녀를 데리고 오신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식탁에 앉자마자 칭얼대는 손녀에게 작은 소리로 끊임없이 화를 내고 계셨다. 헝클어진 머리에 지저분한 손수건을 줄곧 입에 문 채 우는 아이와 무기력한 할머니, 신경질적인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일하는 부모를 대신해 아이를 늦은 밤까지 맡아 돌보는 황혼육아의 피로가 엿보였다.

그런데 계속해서 화를 내던 할아버지가 따뜻한 밥과 국으로 차려진 저녁과 후식으로 나온 수박까지 만족스럽게 드신 뒤엔, 처음과는 다르게 손녀에게 여유롭고 다정한 모습으로 대하시는 게 아닌가. 고단한 일상을 사는 이에게 누군가 차려주는 따뜻한 한 끼 식사는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사회와 접점이 없는 채로, 어려움이 있어도 남에게 기대지 못하며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경제적 빈곤도 문제지만, '관계의 빈곤'은 돈으로도 해결하기 어렵다. 단순히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곳이 아니라, 한 공간에서 같은 지역의 아이와 어른이 함께 밥을 먹으며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이 어린이식당의 가장 큰 의미다. 아이들이 가족과 친구 말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기회, 그리고 아이도 어른도 사회적 고립 상태로는 얻을 수 없는 정보, 지원, 제도 이용, 인간관계망 같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시민 차원에서 시작된 어린이식당 운동은 시작한 지 몇 년 만에 정부의 복지기관들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올해 전국 지자체 중 처음으로 기타큐슈 시가 어린이식당을 열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형태의 복지정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어린이식당이 제공한 셈이다. 전국의 각 초등학교 근처에 하나씩 정부 차원에서 개설하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어린이식당 활동가들은 "1밀리미터(mm)라도, 사회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 어린이식당에서 조리팀의 리더를 맡고 있다. 요즘은 곧 다가올 연말과 크리스마스 메뉴를 짜느라 바쁜데, 아이들이 "와아!"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식단을 고민하고 기획할 때 가장 행복하다. 돈보다는 지혜와 정성으로, 아이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들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 음식을 만드는 데는 식재료 뿐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하다는 것, 신선한 아이디어와 정성으로 만들어진 음식은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얼마 전엔 연습 삼아 트리 모양의 감자 샐러드를 만들어보기도 했다.(해당 글은 지난해 12월 작성됐습니다. 편집자)

▲ 케이크 한 조각이라도 정성을 담으면 음식이 달라진다고 믿는다. ⓒ윤영희

밥을 먹으러 오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린이식당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할 수 있는 곳,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곳, 함께 저녁밥을 먹으며 그림책도 읽고 소박한 라이브 음악회도 여는 그런 식당을 나는 꿈꾸고 있다.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부모들이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어린이식당 운동을 함께 시작해보았으면 한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고, 앞으로도 수많은 위험이 우리 아이들 곁을 맴돌 것이다. 요즘 한국의 힘겨운 현실을 타국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 마음 아프지만, 지금이야말로 시민의 힘과 품격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정치, 이념, 역사적인 무거운 숙제들도 차근차근 해결해가며, 아이들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줄 수 있도록 이웃나라 부모들이 함께 공부하며 지혜를 나누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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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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