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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결선투표제가 있었다면 역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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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결선투표제가 있었다면 역사는? [기고] '곽노현의 비극', 대선에서 반복할 건가?

1000만 시민의 촛불은 대통령 교체를 넘어 적폐 청산과 민주주의 확장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 경제, 노동, 교육, 문화 등 전방위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의 속에서 18세 선거 연령 인하나 사회 보장의 확대, 양극화 해소, 사드 철회, 한일 간 체결된 위안부 및 군사 관련 협정 파기, 검찰 개혁, 재벌 개혁 등 구체적 개혁 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결선투표제 도입 역시 그 중 하나다.

결선투표제는 50% 이상의 유권자 지지를 받는 대통령으로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결선투표 과정에서 3위 이하 후보 진영과의 정책 연대와 연립정부 가능성을 열어 다양한 정치 세력의 연합과 협력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정치 발전의 한 방안으로 제안되었다. 1987년 양김 분열로 노태우 정부가 출현한 이래 후보 단일화를 강제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정책 선거가 봉쇄되고, 소수정당의 존재감 자체가 사라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유권자는 당선 가능성을 우선하여 자신의 지지 정당 후보에 투표하지 못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결선투표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방안으로 대선 후보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논의된 바 있다. 현재 출사표를 던진 대선 후보들 대부분이 결선투표제를 찬성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개헌 사항인지 법 개정 사항인지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으나 정치권의 합의와 국회 다수 지지에 의한 정치적 타결 가능성까지도 거론되는 상태다. 그러나 특검과 탄핵 판결에 속도가 붙고 조기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결선투표제가 이번 선거에서 바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결선투표제가 사회적 의제가 되어 수면 위로 올라온 지금, 그 실시 시기 여하와는 무관하게 결선투표제는 필연적으로 현행 선거법의 개정을 요구한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결선투표제는 각 후보 진영 간의 정치적 연합을 합법적으로 구조화하는 제도다. 다시 말해 다양한 형태의 공동정부 구성을 위한 후보 단일화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행 공직선거법의 후보 매수 관련 조항들은 근본적인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공직선거법 제232조 (후보자에 대한 매수 및 이해유도죄)는 출마 포기나 후보 사퇴를 하게 할 목적으로 금전이나 직의 제공을 받거나 그런 의사 표시를 하는 행위에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상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명시하고 있으며, 소위 사후매수죄라는 범죄행위를 적시하여 동일하게 처벌하게 하고 있다. 선거법의 경우, 1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이면 당선무효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 조항은 당선 무효 조치까지도 동시에 강제하는 것이다.

결선투표제 하에서는 1차 투표 때 출마했던 다수 후보 중 1, 2위를 제외한 후보들은 어떤 식으로든 결선 후보들과 연합할 수밖에 없고, 그 때 당연히 정치연합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공동정부 구성에 관해 협의하게 된다. 국무총리나 장관 직을 약속하고 약속받을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자치단체장 혹은 의원 선거와는 달리 선거구가 전국 범위인 대통령 선거의 경우 1차 투표에서 치르게 될 선거비용의 규모는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직의 제공'뿐 아니라 당선인은 자신을 지지해 준 후보들의 '선거비용 보전'까지 해 주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 순간 공직선거법 232조는 현실 정치와 양립할 수 없는 휴지조각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현행 공직선거법상 후보매수죄가 존재하는 한 결선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은 후보매수자가 되고, 당선 무효가 되며, 그와 정치적 연대를 한 이들 역시 처벌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은 문재인-안철수 간 후보 단일화를 후보매수죄에 해당된다고 공격하였다. 작년 말 잠재적 대선 후보들이 참여한 토론회에서도 안철수는 문재인의 '섀도 캐비닛(shadow cabinet·예비 내각)'이 장점에도 불구하고 매수죄에 해당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현행 공직선거법은 정치적 연합에 족쇄를 씌우는 불합리하고 시대착오적인 법 조항을 내포하고 있다.

2012년 곽노현에게 적용되었던 공직선거법 232조 1항 2호의 위헌여부를 다퉜던 헌법재판소에서 3명의 재판관이 소수 의견으로 위헌 의견을 내기도 하였다. 이들은 사후매수죄를 규정한 조항이 해석의 다툼이 있는 불명확한 표현이며, 민주주의 정치 과정에서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정치 행태인 정책연대 내지 정치적 결합에 입각하여 후보 단일화를 추진할 자유를 사실상 제한한다는 등의 논거로 위헌 의견을 제시하였다.

현재 결선투표제에 대해서는 실시 시기와 절차에 대한 이견이 있을 뿐 그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 정책연대와 정치적 연합이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결선투표제는 사후매수죄는 물론 사전후보매수죄조차 전면 재검토를 요청한다.

2008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오바마는 본선에서 적극 협조하기로 한 힐러리에게 국무장관직을 주었을 뿐 아니라 힐러리의 선거 비용을 보전해 주었다. 2012년 미국 공화당 경선 후보였다가 사퇴한 뉴트 깅그리치와 공화당 대선 후보로 당선된 롬니 사이에서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사후매수죄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며 일본이 사실상 사문화된 걸 감안하면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당연히 사후매수죄는 물론 후보매수죄 자체가 없는 나라도 적지 않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그 민낯이 드러난 우리 사회의 문제는 단기적인 처방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치의 수준을 높이는 것에 의해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당의 민주화, 소수 엘리트 중심 정치의 극복, 정치적 다양성 확대 등이 보장되지 않는 정권 교체는 당장의 더러운 것을 치우는 일에 불과하다.

지금의 개혁 국면은 야당이나 정치인들이 잘해서 얻어진 게 아니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1000만이 넘는 국민촛불로 어렵게 맞이한 이 때 가장 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것은 정치인, 정당, 선출직들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어야 하며 그 일차적인 것은 선거법 개정이 되어야 한다. 선거법 개정이야말로 민주주의에 헌신할 수 있는 대의자 선출을 가능케 하며, 다양한 정치 세력의 출현과 각 정치 세력 간 협력과 연대를 촉진하는 가장 직접적인 기제다. 우리는 아직도 인수 기간 없이 당선 즉시 취임해야 하는 상황에서조차 매수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대선 전에 적어도 선거법 개정만큼은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 현행 선거법이 민주주의 발전을 촉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질곡이 되고 있는데도 새 정치나 개혁을 운운하면서 그 개선책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기만이다. 거대 담론 개혁 의제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개혁의 발목을 잡거나 그와 모순된 하위 법률이나 제도들이 동시에 검토되지 않으면 각종 개혁 논의들은 빛 좋은 개살구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은 촛불혁명의 와중이다.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진출과 정치 협력 및 연합의 활성화를 보장하고 유도하는 제도적 변화는 시간과 속도의 문제일 뿐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고 있다. 후보매수죄 조항 역시 시대적 흐름과 변화에 맞게 개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정치 기본권이 확장되고 우리나라 정치 발전이 더욱 촉진된다. 이것이 촛불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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