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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개똥 치우기' 보고서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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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개똥 치우기' 보고서가 사라졌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⑨]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전두환 때는 반상회에 공무원들이 반드시 참여해서 보고서를 쓰게 돼 있었어요. 저는 국립대 교수였으니까 공무원이잖아요, 가야죠. 근데 반상회에 별거 없잖아, 보고서를 쓰는 데 쓸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반상회 오늘의 주제는 '개똥을 치우자 였다. 개똥을 아무 데나 버리지 맙시다'였다' 이렇게 써냈어요. 그 다음 달 반상회 때도 '이달에도 또 개똥을 치우자고 했다. 아직도 안 치워서 문제다’라고. 나는 만날 그렇게 개똥만…(웃음). 한 마디로 개~똥 같은 세상이었지요."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은 '개똥을 치우자'는 반상회 보고서를 "출석부 내듯이" 내도 "아무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무원을 동네 반상회에 참석시켜 주민들의 동향을 보고토록 했다는 일화는 소름을 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박 이사장은 6월민주항쟁 이전에는 사회 전체가 그렇게 감시 체제로 돌아갔다며 또 다른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학교 버전. 6개월간 학생과장을 맡았던 1983년도의 일이었다. 그는 "학교에 경찰들이 상주(이른바 '프락치')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교수가 프락치였다"라고 이야기를 열었다.

"학교 출입하는 정보과 형사가 나한테 와서 '애들 뭐 하느냐, 어떻게 돼 가냐' 물어요. 처음에는 정보라는 게 없고, 그 사람도 직업이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애들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 말고 가세요' 이런 형식적인 답을 했어요.

그런데 자꾸 꼬치꼬치 물어보니까 화가 나잖아요. 해서 '아니, 내가 당신 정보원이야? 어디 교수한테 와서 애들 정보를 내놓으라고 그래?' 그랬더니만 이 경찰이 화를 내더라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학생과장만 그러시냐'고. 그래서 내가 경찰서장한테 바로 전화를 했어요, 그 경찰을 앞에 앉혀놓고.(웃음) 그러니까 그 경찰이 놀라서 죄송하다고 하고는 다음부터는 내 근처에도 안 왔어요. 그렇게 전부가 다 통제 대상인거죠. 교수도 자기가 데리고 있는 정보원이고."

▲ 박진도 이사장. ⓒ바꿈

'개똥 치우기' 보고서가 사라졌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던, 독재자 전두환의 기세가 등등했던 1983년. 박진도 이사장은 학생과장 임기를 마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때가 1987년 4월. 분위기는 4년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본에 갔다 온 후에는 이미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호헌 선언을 했다는 얘기는 이미 그 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이후로 사람들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반대 선언 같은 걸 하잖아요. 교수들도 4월 말에 호헌 철폐 선언을 했어요."

박 이사장은 새 학기가 시작하기까지 남은 기간을 서울의 길거리에서 살았다. "최루탄 가스를 많이 먹었다는 기억 밖에 없을 지경"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날을 묻자 박 이사장은 6월이 아닌, 7월의 어떤 날을 상기했다.

"이한열 열사가 죽고(7월 5일) 9일에 장례식을 했어요. 연세대에서 노제를 하고 서울시청 앞으로 오게 돼 있었는데, 장례 행렬이 연세대 신촌 로터리에서 시청 앞 로터리까지 꽉 찼어요. 100만 명은 넘을 거예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인이고 교수고, 내가 아는 사람은 다 나온 것 같아요.(웃음)

그게 굉장히 큰 사건인데, 그때 시청 앞에서 되게 혼났던 것 같은 기억이 나요. 마지막에 시청 앞에서 경찰들하고 붙었는데, 본의 아니게 시위대의 맨 앞줄에 있었어요. 경찰은 (사람들을) 해산을 시켜야 할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최루탄이 지랄탄, 사과탄… 종류도 많았어요. 나도 그때 최루탄 피해서 다녔는데, 포위돼서 갇혀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까 가방도 없어지고, 안경도 없어지고…."

"사회 구조 변화에 농촌이 대응을 못했다"

6월항쟁 중에 사라진 박 이사장의 안경과 가방 다음으로 '개똥 보고서'가 자취를 감췄다. 박 이사장이 평생 연구‧활동을 해온 농업 분야에서도 사라진 것이 있었다. 농협 조합장 간선제. 6월항쟁의 성과로 농민들은 농협의 조합장을 다시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농협 조합장 직선제가 1988년부터 시작됐어요. 그전에는 소위 '농협 임직원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 보통 임시조치법이라고 하는데 그걸 박정희가 1962년에 했거든요. 임시조치법으로 농협 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나머지 조합장들은 중앙회장이 임명하는, 위에서부터 쭉쭉 내려오는 임명제로 바뀌어 버렸어요.

사실 농협은 협동조합이라서 대통령이나 중앙회장이 임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선 지금 사회 안정을 위해서 급하니까, 임시로 한다'는 뜻으로 임시조치법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던 거죠. 그게 87년까지 갔으니까 25년이에요. 임시가 아니죠. 박정희보다 더 오래 간 거지."

조합장 직선제는 '100만인 서명운동'(1983년)을 하는 등 농민들이 치열하게 싸워 쟁취한 결과물이었다. 사실 농민들은 군사 독재의 엄혹한 시절 내내 투쟁을 계속해 왔다. 71년 가톨릭농민회(가농)가, 82년에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기농)가 조직됐고, 85년에는 전국 20여개 군에서 2만여 농민들이 '소몰이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농민운동이라는 게 굉장히 지역적이라 잘 조명되지 않아서 그렇지 농촌 현장에서의 대중운동이랄까 민주화운동의 동력은 다 농민운동이었어요.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에서도 실제 조직을 구성할 때에 가농이나 기농의 활동가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그랬어요. 농민운동 진영이 대도시의 청년학생 진영과 함께 시군 단위에서 6월항쟁의 거점 역량으로 역할을 한 거죠."

87년이라는 시공간에서 실력과 위력을 발휘한 농민 운동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89년 2월에는 2만여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상경 집회를 열었고, 그 직후인 3월에는 전국 단위의 농민 단체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 이후 농촌의 상황은 계속 미끄러져 내렸다. 6월항쟁의 성과가 농촌만 빗겨간 걸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87년 이후에 한국 사회가 급속히 변했잖아요. 농업농촌이 그 이전보다 주변부로 밀려난 거죠. 87년의 성과를 떠나서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했는데 그 변화에 농촌이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고 봐야 해요."

농협은 농촌‧농민에 무관심하다?

농업과 농촌이 사회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데 실패한 원인은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농협의 책임은 빼놓기 어렵다. 박 이사장은 "농촌에서 농협이 굉장히 중요한 조직"이라면서 "농협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농업협동조합법(농협법)에 보면,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생산된 농산물의 판로를 확대하고 잘 유통하고 가공하고 해서 경쟁력을 높이고, 또 농민의 사회적인 지위 향상 등을 위해 노력을 하라'는 게 농협의 설립 목적이에요. 신용사업은 그런 사업을 뒷받침을 하는 거고요.

박정희 전에는 농업협동조합과 농민은행이 따로 있었는데, 박정희가 이걸 합쳤어요. 그러니까 농민 입장에서 보면 농협은 농산물의 생산, 유통, 가공, 소비 같은 본연의 일을 잘 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못해요."

과거 농협은 농민과 농촌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독재정권의 농업 정책을 현장에 시달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통일벼 보급, 미곡 수매 등 쌀 농정에 집중했는데, 그 결과 "쌀 농정이 파탄났다"고 박 이사장은 평가했다. 농협 안팎의 구조적인 원인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나라 농협은 종합농협이라 농민 조합원의 구성이 매우 다양해요. 어떤 조합원은 쌀농사를 주로 하고, 어떤 농민은 소를 주로 키우고, 어떤 조합원은 비닐하우스 농사를 주로 하지요. 게다가 그 경영규모도 매우 달라요. 논이나 밭 300평 이상 농사를 짓거나, 소와 같은 대동물 1마리 이상 키우면 다 농민자격이 있어요. 논농사 300평 짓는 농민이나 10만평 짓는 농민, 소 1마리 키우는 농민이나 500마리 키우는 농민이 모두 함께 조합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죠. 따라서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협동조합으로서 기능하기가 어렵죠. 여기에 비농민 준조합원을 포함해서 돈장사를 해서 수익의 대부분을 버는 구조에요. 이미 농사에 별 관심이 없는 고령농민들이 조합원의 대부분이고요.

이런 구조에서는 조합장 직선을 한다 해도, 진정으로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제대로 된 사람보다는 그야말로 ‘정치꾼’, 조합장이 뽑히기 쉬운 거죠."

이런 상황에서 조합장 직선제가 농협의 운영 방식을 민주화시키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질적인 부정부패 역시 그대로였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이를 빌미로 약 20년 만(2009년)에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대의원 간선제로 바꿔 버렸다.

"농협중앙회장을 다시 조합장 직선으로 뽑아야 하는데, 직선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요. 제대로 된 조합장이 10%도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맡겨봐야 사실은 큰 변화가 있을 게 없어요.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게 뭐냐면 '조합원의 총의가 반영된 조합장 직선제'라는 걸 하자. 지역 조합원들에게 지금 후보들 중에서 누구를 찍을지 묻는 미국의 선거인 제도처럼 그렇게 하자는 거예요."

ⓒ연합뉴스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

이토록 많은 농협의 문제들을 왜 지금껏 잘 몰랐던 걸까.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자니 갑자기 호기심이 동했다. 지금은 낯설기만 한, 아니 인기 없는 분야인 '농업' 연구에 박 이사장은 왜 40여년을 몰두했을까. 그는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고 답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70년에 우리나라는 농업의 비중이 국내총생산의 25%, 취업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하던 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농업경제에 관심이 있었죠. 그런데 그 후에 우리나라가 급속히 공업화하고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경제학자들의 관심도 급격히 국제경제, 금융, 노동 등으로 급속히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이농하듯이 경제학자들도 자연스럽게 이농을 한 거죠."

'자연스럽게 이농'해 간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제자리를 지킨 이유가 따로 있어 보였다. 박 이사장은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면서 본인 역시 "두 어 차례 이농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끝까지 버틴 이유는 고향(농업경제학)을 떠나지 못한 거죠. 굳이 따지자면 내가 시골출신이기도 하고, 친구들과 세상을 위해 각자 할 일을 나눌 때 내 몫으로 농업농촌분야가 주어진 것, 그리고 전봉준 장군을 존경한 것들이 이유가 되겠죠."

그는 결정적인 이유로 70년대 활동했던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의 활동을 꼽았다. 강원용 목사(경동교회)의 주도로 1965년 만들어진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당시 운동가 양성소로 꼽혔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중간집단이란 개념을 도입해서, 노동자, 농민, 여성, 교회 등의 현장 활동가들을 교육했는데, 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이후 우리사회의 각 분야에서 사회혁신과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했어요. 그때 교육을 담당하던 간사들이 노동 분야에서는 신일령 전 이대총장,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농촌분야에서는 이우재 전 국회의원, 장상환 경상대 명예교수, 황한식 부산대 명예교수, 여성분야는 한명숙 전 총리가 큰 역할을 하셨죠.

나는 농촌분야의 자원봉사자로 간사들의 일을 도왔는데, 자원봉사라 해도 허드렛일만 한 건 아니고, 강의도 하고, 저 멀리 전남 보성까지 찾아가서 농촌현장지도를 하곤 했어요. 이때 농촌 중간집단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후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지도자가 됐죠."

박 이사장은 이때 만나 농민운동 지도자가 된 이들이 "고생만 했지 아직도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어 미안하다"며 "그런 분들에게 진 빚을 갚는 마음으로 농촌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만약 그때 우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시민으로서 평범하고 행복한 생활을 했을 텐데,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감옥 가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산 것이 너무 미안해요. 정광훈이라고 해남의 전기기사이면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분이 계셨는데, 우리 교육을 받고 나서 투사가 되셨어요. 낙천적이고 정말 사람 좋은 분이었는데, 여러 차례 감옥도 가시고 넘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런 분들이 많아요."

'지역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해나간 연구와 활동들이 결국, 농업농촌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케 했다. 정부 정책의 변화만으로는 현실을 바꾸기 난망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지난 2004년 지역재단의 문을 열었다.

"93년도에 서울대에 있는 은사님이 농정연구포럼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걸 같이 도와드리다가 2000년 초에 다시 확대 개편해서 농정연구센터를 했어요. 중앙정부의 농정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는데… 틀렸네, 어쨌네, 이런 비판이죠. 그런데 농촌 현실이 바뀌지 않는 거예요. 왜 안 바뀔까 생각을 해보니 바뀔 이유가 없는 거죠. 중앙(정부)에서는 지금 좋은 데 바꿀 이유가 없잖아요. 지금 농민들을 잘 '다스리고' 있으니까요.

농민들은 자기네 힘으로 바꿔야 된다고 하는데 힘이 없어요. 2004년 한‧칠레 FTA할 때만도 농민들이 10만 명 씩 (서울로) 올라와서 데모도 하고, 사람이 죽기도 했어요. 그런데 (협정 체결) 하잖아요. 설사 정부가 정책을 바꿨다 해도 현장에서 그게 제대로 잘 되느냐? 안 되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으면, 중앙에서 변화가 생긴다 하더라도 효과가 없는 거죠."

지역재단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지역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문구를 창립 슬로건으로 걸고 출범했다. 해마다 '지역 리더'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는데, 2000년대 초 만해도 생소하던 개념이 10여년이 지난 이제는 "상당히 전파가 됐다"고 박 이사장은 말했다.

"지역의 문제라는 건 경제 뿐 아니라, 교육도 있고, 노인, 환경 문제도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나 조직을 '지역 리더'라고 명명한 거예요.

농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모범 사례) 모델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있어요. 예를 들어 남원자활센터라는 게 있어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일자리 사업을 하는데, 사업 형태가 여러 가지에요. 영농 사업도 하고, 자원 재활용이라고 해서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수거해서 돼지를 키우는 사업이라든지, 자기들이 만든 유기농 채소로 식당을 운영한다든지. 이게 여러 효과가 있는데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측면이 있고, 또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들은 일종의 환경 사업이죠."

'지역 리더'들의 사례는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지역재단의 초기 슬로건이 무슨 의미인지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농촌의 자원을 활용해 농촌다운 모습을 되찾는 것이 어째서 농촌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로 이어진다는 걸까.

▲ 박진도 이사장. ⓒ바꿈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자

"성장주의라는 게 생산력 높이는 거잖아요. 농업 분야도 국제 경쟁력을 높여 수입농산물에 대항해야 한다(는 식이에요). 그런 경제 성장주의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었어요. 소득은 열 배씩 높아졌는데 8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더라도 엄청나게 사회가 망가져 있거든요.

성장이 아니라 행복으로 가야 한다. 행복으로 간다는 이야기는 소득, 물질 뿐 아니라 문화나 환경, 공동체, 교육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얘기에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농촌이 망가져서다. 성장주의로 대도시에 사람들이 몰려 사니, 일자리도 없고, 교통문제, 주택문제, 환경문제, 교육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는 그동안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역할을 너무 무시했지요. 그저 값싼 농산물이나 공급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지만 농업농촌은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기능이 있어요. 건강한 먹거리, 지역사회의 균형발전과 일자리 창출,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 환경 및 경관의 보전, 휴양 및 휴식 공간의 제공, 어린이를 위한 학습 공간 등은 국민행복을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에요."

박 이사장은 농업과 농촌의 가치가 도시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량이 아닌 생태와 환경을 중시하는 농업으로, 아파트와 넓은 도로가 건설된 도시를 닮은 모습이 아닌 농촌의 풍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농촌 문제를 나와 무관하게 여기는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을 비롯한 광역시의 인구가 전체의 70% 가량 될 거예요. 광역시를 제외한 나머지가 30%인데, 이 지역은 농업 생산에 굉장히 의존하고 있는 지역이죠. 농업 생산에서부터 나와서 가게도 생기고, 농기계 상인도 생기고 다방도 술집도 병원도 생기는 거니까요.

더 큰 도시, 예를 들어 대전이나 광주, 대구 이런 지역들도 사실은 그 배후지(농촌)를 먹고 사는 거예요. 대전만 하더라도 그 주변 지역에 농업지역이 쇠퇴한다고 하면 같이 망하는 거예요. 농업이 GDP에서 2%도 안 되고, 농가 인구도 5%가 안 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회를 지탱하는 굉장히 중요한 뿌리에요."

물질이 아닌 행복을 중시하는, 도시와는 다른 농촌농업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박 이사장의 이야기는 87년 체제의 한계 극복, 다시 말해 2017년 촛불광장이 열어준 새 시대의 과제와도 맞물렸다.

"87년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사고 중심이 경제에 있거나 소득에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때만 해도 우리가 고도성장을 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97년말 IMF 외환위기로 우리 사회는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IMF와 세계은행의 권고(강요?)를 받아들이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를 강타한 거죠. 재벌은 급성장하는데 일자리는 생기지 않고, 가계부채는 천문학적으로 늘고, 소득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해 서민 대중의 삶이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했어요. 극심한 경쟁으로 나만 살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해졌지요. 청년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헬’(지옥)이라고 욕하기 시작했어요. 살기 힘든데 국가든 가족이든 친구든 기될 곳이 없는 외톨이 사회는 지옥이나 다름없어요.

지금 우리는 저성장 시대에 살고 있어요. 저성장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옛날이 파이를 나눠먹는 시기였다면, 지금은 있는 파이를 서로 뺏어먹는, 싸움이 더 치열한 시기죠. 사회적 갈등 관계가 복잡해지고, 첨예해지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성장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격차사회에 살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박근혜의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거지요."

행복정책의 필요성, 국민은 이미 안다

박진도 이사장은 국민들의 관심사가 '행복'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박근혜 씨 역시도 알고 있었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국민행복시대를 공약으로 당선된 것이에요. 성장이 아니라 행복을. 그런데 실제로는 박정희식 성장주의를 답습했지요. 국민들이 사기당한 거지요.

성장주의는 기본적으로 있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하고 그게 넘쳐나서 그 국물로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한다는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 이론에 기초한 거예요. 이게 이제는 전혀 작동하지 않아요. 반면 행복정책은 ‘아직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맞춤형 정책을 해야 성공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도록 하고, 아픈 사람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고, 돈이 없어서 대학 못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좋은 먹거리와 환경으로 국민이 건강하도록 하는 게 국민행복정책이지요."

박 이사장은 '농민이 불행하면, 국민이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국민 행복을 위해서는 농민이 행복해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자니 이번 19대 대선에서 농업‧농촌 문제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에서 터져 나온 국민들의 목소리가 30년 전과는 달리 다양해졌다는 점은 꽤 긍정적인 신호로 읽힌다. 과제는 많고, 갈 길은 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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