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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수난사, 그 현대사는 누가 지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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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수난사, 그 현대사는 누가 지웠나? [고려인 강제추방 80주년] ① 러시아 강제 이주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고려인, 그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이 잘 열리지 않는다.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드물기도 하려니와 그들 앞에 선 우리 자신이 너무 왜소하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은 왜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부각되고 있는가.

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미군과 소련군의 남북 분할 점령으로 국토가 분단되었다. 아직 이국(異國)에서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이 엄청 많았지만, 그들에게 눈길을 돌릴 겨를도 없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격화 때문에 남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북방과는 벽을 쌓게 되었다. 더욱이 6.25 한국전쟁을 겪고 난 뒤에는 북한을 비롯한 중국과 소련은 적성국(敵城國)으로 치부되어 그들과 편지 한 장 주고받아도 국가보안법으로 잡혀 들어가는 세상이었다. 고려인, 조선족, 그리고 사할린에 억류된 동포들은 잊힌 동족이었다. 중국과 연해주, 시베리아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우리의 북방 현대사는 억지로 지워진 '백지'나 다름없다.

▲ 1937년 고려인 강제 이동 경로. ⓒ고려인이주15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지워진 '백지' 북방 현대사, 고려인 수난사 정리 필요

2017년 올해는 연해주에서 고려인 18만 명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지 80주년 되는 해다. 1937년 8월 21일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연해주에 정착해 살고 있던 고려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강제 이주는 일본과 소련의 관계 악화가 원인이었다. 1933년에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이 수립되고 독일에 히틀러 나치 정권이 등장하자, 소련은 동서 양 전선에서 협공당할 위협에 직면한 채 극도의 긴장에 휩싸였다. 바로 그해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일본과 소련 간 군사 충돌도 발생했다.

앞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시베리아에서 적백(赤白) 내전이 벌어졌을 때부터 고려인 강제 이주의 씨앗을 뿌려졌다. 이미 고려인 사회는 볼셰비키 적위군과 연대해 백군에 반대하는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또 친일 고려인들은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점령한 연해주와 시베리아 철도 인근에서 백군을 돕고 있었다. 1922년 내전이 끝나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자 일부 고려인의 친일성향은 러시아인에게 큰 앙금이었다. 소련은 고려인의 자치주를 거부, 이는 1937년 강제 이주의 원인이 됐다. 결국 일본과 소련의 갈등 사이에 낀 고려인들은 양측의 군사적 충돌 과정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1937년 늦가을에 시작된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는 6000여 km 떨어진 중앙아시아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3~4주간 가축용 화물열차 속에서 추위와 기아에 시달렸다. 유배지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카자크, 우즈베크, 키르기스, 타지크의 벽지에 분산 배치됐다. 대부분이 집단농장에 거처를 정했다. 지도층에 대한 검거와 처형이 계속되는 등 고려인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으며, 거주지를 이탈할 경우 처벌받았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처절한 생존 투쟁을 벌여 박토(薄土)를 옥토(沃土)로 바꾸고, 뛰어난 노동 열정과 창의적 영농으로 작물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 그리고 자녀 교육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스탈린 사망 후 거주 제한 조치가 풀리자 고려인들은 고등교육기관으로 진출,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9년 현재, 고려인의 도시 거주 비율은 85%로 치솟았고 대학 진학률은 소련 내 민족들 가운데 최고를 기록했다. 고려인의 직업은 55%가 교사, 의사, 기술자 등 전문직 종사자이며 30%가 노동자, 12%가 농민, 나머지 3%가 학생이었다. 소련에서는 유례없는 집단적 신분 상승이었다.

하지만 고려인의 성공 역사는 여기까지였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고려인에게도 시련이 다가왔다. 그들이 주로 정착했던 중앙아시아 회교 공화국에서는 지난날 소련과의 관계보다는 새로 형성되는 이슬람 민족주의가 고려인에게는 역풍으로 작용했다. 고려인에게 닥친 새로운 차별과 배제를 막아보고자 1994년 필자와 당시 여당인 민자당 안무혁 의원(안기부장 역임)이 조사단을 만들어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순회하면서 '의원 외교'를 통해 피해를 무마한 일이 있다.

지금 고려인 50만 명은 '소련방' 해체 후 새로 생긴 15개 민족공화국이 국경을 넘나들며 다시 일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취업, 이주 등을 위해 조상의 나라 한국을 찾은 사람도 5만여 명에 이른다.

1863년에 시작된 '고려인 이주사'에 대해서 우리 독립운동사와 고려인에 대한 역대 러시아 정부의 왜곡된 정책을 알아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고려인에게 동족으로서 진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어야 하는 몫은 우리 한국인에게 있다. 정부는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있는 고려인의 동향을 관리하는 민간단체를 만들어야한다.

고려인문화센터 2010년 10월 준공, 활동의 중심으로

▲ 2010년 10월 완공된 고려인문화센터. ⓒ이부영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추모 회상 열차 행사는 국제한민족재단(회장 이창주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석좌교수) 주최로 함세웅 신부와 필자가 공동추진위원장이 돼 7월 23일부터 8월 4일까지 14일 동안 연해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까지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눈물과 한이 서린 고려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행사였다. 필자가 공동위원장을 맡은 까닭은 2005~10년 사이에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고려인문화센터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어렵게 완공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정치인으로 몇 차례 고려인 관련 업무를 다뤄봤다는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개혁개방 이후 한-러 관계가 진전이 있었다고는 해도 지난 10년 동안 나아진 것이 없었다. 원인은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고서는 러시아나 중국과의 관계도 풀리지 않는다.

남북관계 안 풀리면, 중·러 관계도 그 모양 그 꼴

7월 23일 인천공항을 떠난 강제 이주 회상열차 추모단은 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어로 '동방을 정복하라')에 도착하자마자 연해주 고려인의 고향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 블라디보스토크를 둘러본 뒤, 24일 오후 시베리아횡단 열차를 타야 하는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필자는 2000년대 초부터 여러 차례 우수리스크를 다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고려인문화센터의 오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득 찼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민족자치회 김 니콜라이 회장을 비롯한 강 니콜라이 선생, 아리랑가무단 강 발레리아 단장 등이 일행을 맞았다. 이석배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도 우리를 영접해주었다.

문화센터는 잘 운영되고 있었다. 아리랑가무단은 우리 전통 무용과 노래 공연을 마련해 주었다. 일행은 회관 전시관에서 고려인 초기 이주사와 독립운동사에 관한 사진과 기록물, 그리고 생활상을 관람했다. 고려인문화센터는 연해주에 있는 50여 개 소수민족들 가운데 고려인들만 가지고 있는 유일한 회관이며, 러시아인들까지 이용하는 다용도 문화시설이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원만해지면, 이 문화센터는 연해주에서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일행은 비극의 현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18만 고려인들이 처음 떠난 라즈돌노예 기차역이었다. 우수리스크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역이었다. 이곳에서 대다수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실려 갔다. 판자로 차 벽을 둘러친 가축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였다. 실려 가는 동안 갓난아이들은 대부분 감기나 영양실조로 죽었다. 노인 다수도 악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숨졌다. 함세웅 신부는 추도 기도로 간단한 추도식을 가졌다. 일행은 고려인 강제 이송과 희생을 회상하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 러시아 연해주에서 항일 투쟁을 이끈 독립운동가 최재형(1860∼1920) 선생의 97주기 추모식이 지난 4월 사단법인 최재형기념고려인지원사업회 주최로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우리는 이어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代父)로 일컬어지는 최재형 선생 저택을 둘러봤다. 20세기 초에는 대규모 저택이었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러시아인으로부터 구입해 수리 중이었다. 우수리스크에 문화센터와 최재형 선생 유택이 마련된 것으로, 1차 문화유산 정리는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강제 이주의 출발지 라즈돌노예 역사에 기록을 남기려는 노력은 러시아 정부가 강제 이주 역사 자체를 지우려 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명물이 된 현대호텔은 일행이 언제나 묵는 숙소다. 자주 와본 사람들은 오전 일찍 일어나 인근 공원을 산책했다. 오후에는 복잡한 일정 가운데 열차를 탑승해야 하므로, 버스에 짐을 싣고 블라디 시내를 돌아다녔다.

우선, 옛날 신한촌 자리 탐방이다. 이곳에 올 적마다 해외한민족연구소를 이끌면서 유적을 일으킨 이윤기 박사를 떠올렸다. 신한촌이 있던 자리에는 세 개의 하얀 돌기둥이 우리를 맞았다. 기둥은 각각 하늘, 바람, 흙을 나타낸다.

러일전쟁 직후 조성된 신한촌은 한때 20만 명 이상의 고려인이 집단촌을 형성해서 거주했다. 이곳에서는 망국 이후 가장 먼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대한국민회의'라는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대표는 헤이그 밀사의 정사(正使)였던 이상설 선생이었다.

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 최재형 선생이다. 최 선생은 1860년대 말 고려인 최초의 미민으로, 함경도 노비 출신이었다. 그는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 교육을 받은 최초의 고려인이었다. 최 선생은 러일전쟁 전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납업과 건설업 등으로 거부가 되었으며, 러시아 도헌(都憲) 즉 지방정부 시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적극적 주동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 거사도 최재형 선생의 후원으로 성사됐다. 그는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들에게 체코와 러시아제 기관총 등 무기를 구입해 공급하며 승리를 견인했다. 일본군은 1920년 우수리스크를 급습, 4월 참변을 일으키며 최재형 선생을 제일 먼저 즉결 처형했다.

망국 전후 연해주 독립운동은 최재형 선생을 빼놓고서는 기록할 수 없다. 그런 최재형 선생을 우리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 역사의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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