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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나꼼수'를 듣고 정치에 눈을 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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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나꼼수'를 듣고 정치에 눈을 떴다고? [블랙리스트에서 여성혐오까지 ③] 나꼼수 상편, 나꼼수 비판은 설자리가 없었다
일베 현상의 중요한 시사점 중 하나는 지성을 조롱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넷상에 발화했다는 것이다. 비단 일베뿐만이 아니다. 지식인의 권위는 인터넷 혁명과 맞물려 급전직하했다. 대중문화 비평이 더는 권력을 지니지 못한다. 뉴스의 정보 독점력도 사라졌다. 이른바 전문가로 지칭되는 이들의 뉴스 코멘트에 대중이 어떤 태도를 지니는가는 인터넷 포털 댓글로 확인 가능하다.

그런데, 지성에의 거부감이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발달에 따라 커졌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이들 신문명이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평할 수는 있겠으나, 지성인을 향한 대중의 혐오는 오랜 연원을 가졌다는 평이 나오기 때문이다. 매카시즘 광풍 이후 미국의 당대를 정리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역작 <미국의 반지성주의>(유강은 옮김, 교유서가 펴냄)는 미국 사회가 일찌감치 지성에의 불편함을 지니고 있었음을 사회 다방면의 분야를 향한 스케치로 그려냈다. 이는 과거의 현상이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이 지식 계층의 예상과 다른 결과를 낳자, 미국 출판계는 올 한해 이 현상을 조명키 위한 책을 쏟아냈다. <힐빌리의 노래>(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흐름출판 펴냄), <자기 땅의 이방인들>(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유강은 옮김, 이매진 펴냄) 등은 힐러리와 민주당으로 정체성을 대변하던 이들을 향한 대중의 거부감, 이른바 ‘PC함’에 관한 미국 대중의 피로의 연원을 나름의 방식으로 찾으려 한 책이다.

과감히 '반지성주의'라는 용어를 차용하자면, 오늘날 한국에서도 이는 하나의 강고한 흐름이 되었음을 쉽게 짐작 가능하다. 민주당과 진보정당을 갈라 보길 거부하는 사회 태도, 이른바 '747 성장' 공약으로 대표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시대 착오적 공약에 열광한 대중, 약자 혐오를 정당화하려는 분위기는 어제오늘의 결과물이 아니다.

특히 여성주의가 사회적 논쟁 대상으로 떠오른 지금, 여성을 향한 혐오는 미국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 볼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상의 근원에의 이해를 거부하는 대중의 시각은 피해의식과 맞물려 강고한 흐름을 만들었다. 이는 여성집단의 대대적 반발로 더 커지면서 소셜 미디어를 막말의 전쟁터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오랜 기간 문화 현상을 관찰했고, 여러 매체에 관련 글을 쓴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로부터 받은 한국의 반지성주의에 관한 글을 나눠 싣는다. 필자는 글에서 한국의 반지성주의를 낳은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식민지 남성성을 꼽는다. 이를 바탕으로 약자의 상황을 애써 모르려 하는 태도가 집단 반지성주의로 현현했다고 그는 진단한다. 필자는 우리 문화의 반지성주의를 드러내는 현상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행해진 블랙리스트 사태, 이명박 정부 시절 큰 반향을 낳은 나꼼수 현상, 그리고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는 반여성주의 현상에 관해 세밀한 의견을 글로 정리했다. 편집자.

▲ 팟캐스트 붐의 견인차 역할을 한 <나는 꼼수다>는 진지함을 멀리하며 청취자의 정치 참여를 이끌었다. 하지만, '나꼼수'가 정권교체 이상의 목적을 보여준 것 있느냐는 논란과 더불어 여성혐오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나꼼수

'나꼼수'와 무학의 통찰

정보를 얻는 형식의 변화는 단지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의 변화까지 이끈다. 그 예로 팟캐스트의 등장을 들 수 있다. 팟캐스트에는 대안 언론 역할, 지식을 쉽고 편하게 접하는 다양한 통로 역할 등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 생산자 진입 장벽이 높지 않기에 기존의 라디오처럼 청취자와 생산자 사이의 구별도 흐릿해졌다. 라디오가 팟캐스트 시장으로 진입하는 추세로 볼 때, 이제 라디오와 팟캐스트는 경쟁관계라기 보다 상호 보완하는 관계에 가깝다. 많은 기관과 유명인이 팟캐스트 시장에 참여하여 대중과 소통을 시도한다. <지대넓얕>이나 <과학하고 앉아있네> 사례처럼 팟캐스트 내용을 발판으로 제작자들이 출판시장으로까지 진출한다는 점에서 팟캐스트는 대중과 대중이 만나는 주요한 미디어임이 분명하다. 미디어는 언제나 변화하고 새로 태어난다. 뉴 미디어의 등장 자체를 경계하고 두려워하거나, 혹은 과도하게 미화할 필요는 없다.

초창기에 큰 성공을 거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도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높였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호불호를 떠나 그 영향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없고 도무지 목소리를 듣지 않는 위정자들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는 시민에게 '나꼼수'는 희망을 주었다. 재미가 있으니 오락적이고, 재미와 함께 얻은 정보를 통해 정치 관심도 높아진다.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청취자라는 어떠한 집단이 뚜렷하게 형성되어 나름의 공감대와 연대의식도 가졌다.

나꼼수는 2011년 민주언론상을 수상하면서 언론으로서 역할도 인정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명박 정권에서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꼼수는 위험한 목소리를 최전선에서 내는 정의로운 대안 언론으로 각광받을 수 있었다. 팟캐스트가 아직 낯설던 시절 나꼼수는 입 소문을 타고 빠르게 청취자를 늘려갔다. 2012년 2월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방송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나꼼수를 알고 있다'는 응답자가 56.4%로, 전년 10월에 비해 12.4%포인트 증가했다. '방송을 들어본 적도 있고, 잘 알고 있다'는 청취 경험자는 30.0%로, 전년 10월 조사에 비해 두 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응답자 10명 중 9명 가까이가 나꼼수를 인지하고 있고, 그 중 3명 가량은 청취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니, 유권자수로는 대략 1100만 명이 나꼼수 청취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많은 인기와 높은 지명도를 확보한 나꼼수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 '나꼼수 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미디어가 다양한 통로 중 하나에 그치는 걸 넘어 과열된 양상을 띠면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당시에도 나꼼수 현상에 관한 옹호와 비판적 목소리가 모두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 이를 다시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나꼼수가 정치를 소비하는 새로운 대중적 플랫폼을 제시했다는 긍정적 면이 있음에도, 나는 이 장에서 위험한 열정과 반지성적 면모, 그 반지성적 태도가 어떻게 마초적 남성성과 결합하여 성차별을 '자유롭게 민주화' 하도록 이끌었는지 짚어보려 한다.

쫄지마 정신

<나는 꼼수다>는 2011년 4월부터 2012년 말까지 1년 8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딴지일보> 총수인 김어준, 방송 PD출신인 김용민, 국회의원 출신인 정봉주, 현직 기자인 주진우 네 명이 팀을 이루어 방송을 진행했다. 마지막 방송 날짜는 2012년 12월 18일이다. 그 다음 날인 12월 19일은 18대 대선 투표일이었다. '국내 유일 가카 헌정방송'이라는 목적에 걸맞게 이 방송은 대선과 함께 사라졌다. 여기서 '가카'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 '각하'다.

나꼼수 구성원 네 사람의 조화는 훌륭했다. 기자의 정보력과 정치인 출신이 가진 인맥과 현장 경험, 모든 구성원의 입담과 재기 등이 어우러져 어지간한 예능 방송보다 큰 재미를 선사했다. 여기서 '재미'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과 사실을 왜곡할 위험을 모두 포함한다. 예를 들어 나꼼수에서 김용민은 이명박과 BBK의 관련을 밝히기 위해 "눈 찢어진 아이를 조만간 공개하겠다. 유전자 감식이 필요 없다."는 발언을 했다. '눈 찢어진 아이'와 BBK가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중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폭로 자체가 던져주는 쾌감을 즐겼다. 이런 식으로 나꼼수는 자극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풀어놓았다. 던져진 미끼를 중심으로 추리가 확산되면서 사실과 음모 사이의 경계는 점점 불투명해졌다. 음모론을 털어내고 사실만 골라내는 작업에 착수하다 보면 재미는 진지함으로 퇴색할 수밖에 없기에 재미를 유지하기 위한 과장과 왜곡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스튜디오 안의 팟캐스트로 시작했으나 인기가 커지자 나꼼수 멤버들은 광장으로 나와 '나꼼수 콘서트'를 열었다. 그들은 더는 '골방의 잡놈'이 아니었다. 콘서트는 나꼼수 청취자의 규모를 실감하는 자리였다. 첫 번째 콘서트는 2011년 10월 29일 서울 한남동에서 1400여 명의 관객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가카를 위한 경례'로 공연은 시작한다. 당시 기사를 참고하면 "1400여 명의 관객이 일제히 일어나 '나꼼수 청취자들의 교신 신호'인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들자, 무대 중앙에는 양 팔로 '하트'를 그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가카의 사진이 나타났다."고 한다. 청취자들간의 교신 신호가 있을 정도로 나꼼수 열성 청취자들 간의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극우 사이트 일베 회원 간에도 일베임을 인증하는 손 모양이 있다. 서로 진영은 반대이지만 일베와 나꼼수는 거칠고 자극적인 언어를 즐기며, 적이 명확히 존재하고, 청취자/사용자 간의 유대의식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문화평론가 최태섭은 "일베는 나꼼수 현상의 거울 반전상"이라고 했다. 일부 평론가는 나꼼수와 일베의 차이를 오프라인 결집 정도로 보았다. 나꼼수가 광장에서 콘서트를 할 정도로 서로의 존재를 드러내고 참여한다는 우월감까지 가진 반면, 일베는 온라인 바깥에서 일베 회원의 모임을 보여주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4년 즈음부터 일베 회원은 더는 온라인에서만 활동하지 않게 됐다. 세월호 유족을 조롱하는 광화문 폭식투쟁이나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추모 집회에 등장한 핑크 코끼리의 등장이 그 예다. 일베 회원들이 우월감을 갖게 되었다기 보다는 수치심에 둔해졌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일베의 태도와 사회의 윤리 감각 간 거리가 좁혀졌다는 뜻이다.

일베가 점점 아무 거리낌없이 온라인에서는 물론이고 오프라인에서도 세력화하는 바탕에는 혐오를 제도적으로 공급하고 지원하는 힘이 있다. 국정원과 일베의 관계에 관한 의혹은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2013년 국정원이 일베 회원들을 대상으로 안보특강을 개최한 사실이 알려진 적도 있다. 이 특강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20대 초반 남성들로 구성되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일베는 국정원에 의해 조직적으로 관리되었음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정부가 조직적으로 특정 정당과 정치인, 지역, 여성 차별을 조장한 셈이다. 이렇게 정부가 혐오를 생산하고 퍼뜨리지만, 그렇다고 전라도 혐오와 여성 혐오가 '일베 때문에' 느닷없이 새롭게 만들어지진 않았다. 혐오의 기반이 갖춰진 토양에서 정부가 양분을 주어 일베는 무럭무럭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나꼼수로 돌아가면, 첫 번째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한달 후 여의도에서 열린 콘서트에 주최 측은 5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고 했다. "2011년 11월 30일 19시 30분 부터 서울 여의도 광장 태극기 아래에서 팟캐스트 방송 '나는꼼수다(정봉주, 김어준, 주진우, 김용민 진행)' 4인방의 한미 FTA 반대 특별 콘서트(연출 탁현민 성공회대 겸임교수)가 두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다. 주최측은 약 10,000명 정도가 광장을 찾을 것으로 예상하고 의자 6,000개를 준비했으나, 이를 훌쩍 넘은 약 50,000명(경찰추산 16,000명)의 관람객이 광장을 메우다 못해, 광장 주변의 숲 사이사이 빼곡히 자리를 잡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나꼼수 콘서트는 전국 7개 도시를 돌며 전국투어를 이어갔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 문제로 시민은 촛불을 들었으나 응답은 듣지 못했다. 분노한 사람들에게 '가카헌정방송'인 나꼼수는 그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반갑고 좋은 매체였다. 나꼼수에서 가카 이명박은 대한민국 모든 문제의 절대악이었다. 나꼼수는 반복적으로 가카를 위해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을 개사한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목사 아들 돼지'로 칭하는 김용민 PD가 '말씀'을 전달한다. 이 모든 태도는 한국의 부패한 개신교에 관한 풍자이며 개신교 신자인 이명박 조롱을 목적으로 하는 희극이다. 묘하게도 이 종교적 비틀기는 대중의 열광을 발판으로 결국 또 하나의 종교적 성격을 만들어낸다.

희화화와 조롱은 나꼼수의 매력이면서 위험 요소다. 재미가 진실을 압도한다. 나꼼수는 수시로 외쳤다. "쫄지 마, 시바!" '쫄지 마'라는 구호는 흥미롭다. 이미 '쫄아 있음'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대중을 향해 "쫄지 마"를 외치며 소영웅이 되어가던 이들은 급기야 대전 콘서트에서 놀라운 발언을 한다. 당시 사회자는 "가카 추모 공연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입니다. 그것도 임기 중에!"라고 외쳤다. 살아있는 사람의 추모 공연을 임기 중에 기획하고 싶다는 야심 찬 '농담'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관객은 열광했다. 임기 중에 절대악인 가카의 추모 공연을 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분노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조롱으로 이어질 때 얼마나 섬뜩해지는지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거의 가카 허수아비라도 만들어 놓고 가카 서거를 빌며 칼을 던지는 제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통이 막힌 시민으로서는 그렇게라도 분노를 해소하고 싶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마음을 이용해 나꼼수 콘서트장에서 무책임한 정보 흘리기가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에리카 김이 "(이명박과 나는) 부적절한 관계였다"고 직접 이야기하는 통화내용을 공개했다. 대중은 더욱 열광했다. 정치적 사건은 가십으로 소비되었다.

나꼼수는 또한 노무현의 FTA와 이명박의 FTA를 구별했다. 2007년 노무현 정권 당시 한미FTA를 반대하기 위해 분신한 허세욱 열사가 있다. 하지만 나꼼수는 사실보다 당파성이 중요했기에 노무현 정부 당시 FTA에 반대했던 수많은 목소리를 '없는' 취급한 채 이명박의 FTA만 문제로 삼았다. 선택적 기억, 이는 일종의 속임수다. 이명박 비판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임의 법칙은 철저히 지켜졌다. '가카 헌정 방송'은 그렇게 '노가카' 헌정으로 향했다. 다시 말해 나꼼수는 노무현의 명맥을 잇는 새로운 가카 헌정방송이기도 하다. 정권교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로에게 "쫄지 마"라고 외치며 힘을 북돋아주고, 다른 의견 앞에서는 "닥치고"를 외치며 오직 하나의 길만 제시했다.

누가 나꼼수를 비판하는가

나꼼수는 청취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일종의 '정치 예능'을 지향했다. 나꼼수 4인방 중 한 명인 언론인 주진우는 당시 '언론계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치와 언론의 예능화는 과연 바람직한가. 이념 논쟁 따위는 찌질한 '먹물'들의 다툼이며 '구좌파'의 유물이고, 청취자의 감정에 강렬한 호소를 해야 소통과 공감을 하는 태도인 양 여기는 건 바람직한가. 이에 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때 대중은 나꼼수를 비판하는 자들을 '새누리당 알바'라고 칭하거나, 질투에 눈 먼 엘리트 지식인으로 칭했다. 나꼼수를 비판하는 소위 지식인을 향한 분노가 잘 드러나는 글을 하나 보자.

"지식인이라는 부류가 있다. 이 가련한 백성들 무간지옥을 헤매다가 인터넷에 재미난 라디오 프로가 있다기에 그거라도 들으며 좀 웃고 낄낄대겠다는데, 거기에다 대고 황빠 노빠 심빠 온갖 빠자 돌림의 딱지를 붙여가며 비난하는 지식인이 있다. '씨바, 이제 나꼼수도 진중권 눈치 보면서 들어야 되냐?' 지식인들 늘 하는 소리, 그래봤자 '신자유주의 세계화' 여덟 글자, '이명박 나쁜 놈' 여섯 글자, '복지국가' 네 글자로 끝나는 가난하고 거창한 레토릭들. 그러면서도 근엄한 얼굴로 동아시아가 어떻고, 87년 체제가 어떻고, 매일 큼지막한 이야기 주워섬기는 지식인들이 있다. 사람은 계속 죽어나가고, 절규는 언어가 되지 못해 가슴을 후벼 파는데, 이 삶이라는 게 어느 날에는 너무 공허해서 술에 취하고 그러면서 우울함에 젖어 가는데, 세상은 이미 망해버린 것도 같은데, 지식인들은 그렇게들 살고, 언론도 권력도 그렇게들 한 시절을 구가하고, 세상은 또 그렇게 돌아간다."

이 글에서 지식인은 거창한 말만 읊어대며 전혀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 대중은 '백성'이라는 이름의 가련한 존재로 묘사된다. 대중을 조롱하는 지식인을 비판할 수 있지만, 지식인의 레토릭을 그저 '몇 글자'로 욱여넣으면서까지 왜곡할 필요는 없다. 나꼼수를 즐기는 대중을 가련하고 우울함에 젖은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런 식의 대결구도를 짜는 형태가 더 위험하다. 간단하고 단순한 대결구도는 매사를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고, 저것이 아니면 이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급기야 나꼼수 비판의식을 두고 '나꼼수 죽이기'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면서, 비판은 '죽이기'가 되었다. 모든 판단 근거가 진영에 달렸다. 팬덤 정치가 새로운 운동 방식이고, 기존의 운동은 낡은 '꿘'이다. 비판은 지식인의 지분 다툼으로 인해 벌어진 나꼼수를 향한 불만인 양 수렴된다. 하지만 '닥치고'가 몰고 오는 '입을 다물게 하는 힘'이야말로 비판을 죽이는 태도다.

노무현의 자살이 이 사회의 정치적 담론에 남긴 상흔이 크다. 진보 정치인을 지켜주지 못하면 또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가 대중의 뇌리에 새겨졌다. 지키는 대상이 '사람'이 되면서 팬덤 정치는 곧 정의가 된다. '우리 편'을 향한 믿음은 종교화되고 정치적 지향은 일종의 신앙심과 다름없어졌다. 사실여부가 아니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적이다. 이들은 패거리를 만들고 욕을 한다. 교양 없는 역할을 맡아 교양에 도전한다. '진보 지식인'이 또 다른 '진보 지식인'을 비판하면 '명박 퇴진'에 방해가 되고 '우리 편'을 위협하는 내부의 적처럼 여겨지는 현상으로까지 치닫는다. 여성혐오와 성희롱은 이 당파성에 숨어서 정당화된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을 향한 대중의 분노는 '나꼼수'로 상징되는 정권교체 열망에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지 못하게끔 했다. ⓒ연합뉴스

무지의 권력과 성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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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 PD는 <인물과 사상> 2011년 12월호 인터뷰에서 나꼼수를 통해 여성이 "정치에 눈을 뜨기 시작"하여 "비로소" 행동하게 되었다고 발언한다. 이제 이 변화는 아무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나꼼수를 듣기 전에는 정치에 무관심하던 여성이 나꼼수를 즐겨 들으며 '정치에 눈을 떴다'는 발언을 무심히 지나치기란 어렵다. 자신이 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케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을 계몽했다는 의식은 그 '계몽된' 대상을 알려고 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무지 그 자체가 아니라, 무지를 권력으로 가동케 하는 태도를 문제 삼아야 한다. 정치는 여성을 늘 배제해왔으며 어느 정도는 여성이 정치를 모르도록 사회적으로 권장해오기도 했다. 정치는 남성의 영역이라는 관념을 심어둘 때 남성 중심의 정치 세계가 훨씬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는 '대한민국 남자'라는 홍보 문구를 만들었다가 거센 비판을 받고 폐기한 적 있다. 이러한 홍보는 박근혜라는 '여성' 후보를 상대로 정치의 남성성을 강조한 전략이었다.

오늘날은 "여성이 정치 활동이라는 더러울 수밖에 없는 남성의 세계에 들어서면 그만 타락해서 여자다움을 잃는다."라고 대놓고 무지한 발언을 하는 이들은 보기 어렵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여성을 정치에서 배제한다. 정치에 관심 있는 여성은 매번 남성에 의해 계몽되어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호들갑스럽게 반길 존재가 된다. 그럼에도 비선 실세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면 "그냥 아줌마"가 된다. 2016년 하반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났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 중 하나는 '아줌마' 였다. 주진우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근혜를 "돈, 연예인 좋아한 아줌마"라고 표현했고, 최순실을 두고 "그냥 아줌마, 무당 좋아하는"이라고 했다. 이는 아줌마를 정치에 무지하고 지성적이지 않은 인물로 보는 사회적 편견에 기대어 박-최 게이트 사태를 '무식한 여성'들의 국정농단으로 치부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 개입은 무지몽매한 여성의 정치 개입이 만들어낸 결과로 규정된다. 후에 주진우는 박근혜 탄핵 정국 당시 "박근혜 동영상"이 이제 나올 것이라고 일본 와세다 대학 강연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정치는 역시 남자가 해야 한다'는 관념을 더욱 공고히 했고, 급기야 "100년 내 여성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는 발언까지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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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정치적 선택을 두고 드물게 대중이 여성의 주체적 선택에 열렬히 환호하는 순간이 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을 때'만'이다. (상당수 남성이 성매매와 성폭력 사건을 접할 때 여성의 '자발적 의지'를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비키니 사건, 혹은 코피 사건 으로 알려진 사건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 이후 여성회원이 60만 명인 삼국카페는 나꼼수 지지 철회 성명을 냈다. 나꼼수는 응답하지 않았다. '정치에 눈을 떴다'고 칭하던 여성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나아가 가르쳤다. '응답하지 않기',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매번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는 무엇인가. 우선 수감된 남성을 응원하기 위해 '여성의 역할'로 떠올린 것이 비키니 사진이었다. 여성이 정치에서 몸으로 응원하도록 조장한다. 개인이 비키니 응원을 하든, 나체 응원을 하든, 이는 누가 뭐라고 할 이유가 없는 문제다. 그러나 이를 농담의 소재로 활용할 때는 차원이 달라진다. 나아가 비키니 사진을 두고 '코피'를 조심하라고 했다. 사진을 성적 대상으로 명명백백 소비하는 태도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강해지면서 언론에서도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 <한겨레> 역시 2012년 2월 사설로 나꼼수의 태도를 지적했다. 이 사건을 비판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다. "얼마 전 우크라이나의 페미니스트 단체 활동가들이 다보스 포럼 회의장 주변에서 빈곤층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며 상반신 나체 시위를 벌인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다보스 포럼 회의장 주변에서 가슴을 노출하고 시위를 벌인 페미니스트 단체 페멘(Femen)의 활동은 여성이 몸을 통해 시위를 할 때마다 언급되는 사례다. 페멘이 가슴을 노출하고 시위하는 이유는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사회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그들의 노출은 코피를 조심하라며 낄낄거리는 메시지를 받는 대신, 경찰에 의해 진압당한다. 빈곤층이 페멘이라는 여성단체에게 다보스 포럼 저지를 위해 가슴 노출 시위를 독려하지도 않았다. 페멘의 방식은 응원의 몸, 쾌락의 몸으로 이용되는 여성의 몸을 저항의 몸으로 만든 노출 시위다. '여자의 벗음'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김어준 역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데서 자유롭지 않다. 김어준은 "생물학적 완성도에 감탄한 것도 사실이고, 신선한 시위의 방법에도 감탄했다"고, "여성들을 약자라는 의식으로 바라보고 비키니를 성적 담론에만 머물게 하는 건 1960년대 사고방식"이라는 말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기만적이며 묵살에 해당한다. 말을 듣지 않음, 들을 의사가 없음, 상대의 말을 눌러서 없애 버림, 이렇게 여성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 뚝심 있고 '남자답게' 밀어 붙인다. 이렇게 물러서지 않으며 과오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오히려 지지자들에게 더욱 신뢰를 주기도 한다. 소위 '리버럴'들이 말하는 대로 '60년대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여성도 성적으로 자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여성이 '자유롭게 대상화'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약자에서 벗어나라'는 말은 사회의 권력구도를 모른 척 한 채 '쿨'하게 자유를 말하는 데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여성의 몸이 정치에서 응원의 도구가 되는 상황의 심각함은 결코 가볍지 않다. 여성의 몸을 평가하는 국제적인 미인 대회부터 전쟁에서 전리품으로써 벌어지는 강간까지, 여성은 권력도 몸으로 쟁취하고 희생도 몸으로 한다. 위로도 몸으로 하며 처벌도 몸으로 받는다. 이는 우리 사회가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증거다. 여성의 몸이 정치에서 활용되는 방식에 관한 문제의식이 없으면 나꼼수 코피 사건이 왜 그저 웃고 넘어갈 문제가 아닌지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이해하고 싶지 않은 적극적 의지 아래에서 홍성담의 출산 그림이나 이구영의 <더러운 잠> 논란에서 보듯, 다른 방식으로 같은 문제는 계속 변주된다.

'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이지 마라'고 하지만 실제로 많은 여성에게 '다큐'로 벌어지는 일을 남성은 농담으로 소비한다. 이 말은 올바르게 돌려줘야 한다. 다큐를 예능으로 소비하지 마라.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이뤄진 탄핵 집회 현장에서 수많은 여성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호소했다. 대의 속에 숨어있는 여성을 향한 성 착취는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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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과 마초성은 어떻게 연결 되는가. 자칭 "간지 나는 진보"인 이들은 "경찰 출두할 때 얼마나 멋있게 나갈까만 생각한다, 일단은 저희들이 휠체어 4개 모아서 나갈 생각"이라고 한다. 김용민은 "남자들 잔뜩 모아서 '김 총수 힘내세요' 이런 거 하자."라고도 했다. 강함, 단호함, 물러서지 않음, 실수를 인정하지 않음, 쫄지 마 시바. 이러한 성격을 남성성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들은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김어준은 나꼼수를 만든 이유가 "쫄지 말자"였음을 콘서트장에서 말한 적 있다. 쫄지 않는 정신이 그들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실제로 쫄지 않는 태도는 그의 매력이다. 개인을 억압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태도는 긍정적 요소도 있다. 그러나 이 쫄지 않는 태도는 때로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 김어준은 과거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을 옹호했던 문제를 두고 실수를 시인하지 않듯이, 코피 사건에 관해서도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일관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18대 대선 개표 조작 음모론을 펼친 <더 플랜>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초에게 사실보다 중요한 문제는 내 주장의 '힘'이다.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더라도 '쫄지 마 시바'를 외치며 고개를 뻣뻣하게 들어야 마초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다. 반지성-마초-혐오가 연결되는 방식이다.

이들의 소영웅주의는 정권교체의 최전선에 서있다는 이미지를 만든다. 나꼼수의 기획자였던 탁현민이 '촛불 정권'의 의전비서관인 행정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가 말과 글을 통해 보여준 여성 비하도 이러한 세계에서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는 허세로 보일지언정, 그는 꾸준하고 일관되게 여성 비하를 책으로 써왔다. 그럼에도 탁현민을 두고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서슬 퍼런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자신이 옳은 삶을 산다고 생각한 문 대통령을 도왔던 진심을 믿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라며 옹호했다. 여성을 비하한 정도로 발목이 잡히면 오히려 유약하고 남자답지 못하여 큰 일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 된다. 이명박 이후 이 사고방식은 더욱 굳건해졌다. (실제 능력 유무를 별개로 하고) 그래도 능력은 있다, 그래도 일은 잘 한다, 왜 '도덕군자'를 찾느냐, 저쪽은 더하다,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등의 태도로 약자 폄하나 각종 차별의식을 변호한다. 그렇게 이 사회의 지성과 민주주의를 '룸살롱'에서 길어 올리는 형국이다.

▲ 지난 2011년 11월 30일 서울특별공연을 연 나꼼수. 나꼼수는 한편 여성혐오를 이명박이라는 '거악'과의 싸움에 원동력으로 썼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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