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평범한 학생으로 세계사적 사건에 관여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평범한 학생으로 세계사적 사건에 관여하다 [병역거부는 평화운동이다] ② 일본 자위대, 이미 방어적인 군대 아냐
'징병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은 지난 10월 말,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자 인트레피트 항공모함을 이탈해 스웨덴으로 망명한 크레이그 W. 앤더슨(Craig W. Anderson) 씨를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50여 년의 세월을 뛰어 넘은 양심적 병역거부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세계는 어떻게 변했는지, 각자 신념은 어떤 것이었는지, 전쟁이란 무엇이고, 국가란 무엇인지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여정의 기록을 독자 여러분과 세 번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필자.

병역거부자들, '프리즌 파이브'를 결성하다

# 시민의의견 30의 모임, 도쿄

10월 27일 우리는 통역자 시무 씨와 함께 시민의 의견 30의 사무실이 있는 타마치(田町)로 향했다. 우리는 다마치 역에서 호소이 아케미(細井明美) 씨를 만났다. 호소이 씨는 베헤이렌 활동가이자, '시민의의견 30' 회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민의의견 30은 회원들의 자발적인 회비와 자원봉사로 운영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호소이 씨는 2000년대 초반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직접 중동으로 가 이라크 어린이들을 위한 건강 검진 활동을 했던 활동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민의의견 30의 회지에 실릴 인터뷰에 응했다.

호소이 씨는 병역거부자들의 경험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다. "각자 어떤 이유로 병역 거부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박정경수 씨가 대답했다. "2000년대 초반 한국군이 이라크 전쟁에 파병된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라크전이 큰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당시 중동에 관한 상황도 크게 작용했다."

최기원 씨는 자신이 병역을 거부하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했다. "2009년 서울 한복판에서 철거민 4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한 '용산참사'가 일어났다. 공권력의 무분별한 사용을 보고, 국가 폭력의 일부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박정훈 씨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했다. "국가폭력에 동참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자들과 철거민들과 소수자들이 비국민 취급을 받는 것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앞서 병역거부에 관한 소견을 밝힐 때도 전쟁으로 인한 죽음보다 사회구조로 인한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야기 한 바 있었다.

박유호 씨와 강길모 씨도 비슷한 이유였다. 국가폭력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사회에 만연한 군사주의 등이 병역거부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많은 병역거부자들이 군대가 제시한 남성성이 사회에서도 이어지면서, 군사문화와 가부장제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데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 또한 군사주의 일변도의 방법으로는 평화를 달성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호소이 씨는 병역거부자들의 '병역 거부 이후의 삶'에도 관심이 많아 보였다. "각자 병역거부 이후의 삶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가족들과의 관계라던가, 사회적인 대우에 관해서 어떤지 묻고 싶다."

박정경수 씨가 이야기했다. "감옥에 다녀온 지 10년 정도 돼서 이제는 가족들이 내가 병역거부로 수감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이 말에 모두가 웃었다. 사람의 삶이란, 어느 곳에서나 상쇄와 마모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다른 이들의 대답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가족과의 갈등이 있다. 그러나 일단 나 자신이 감옥에 가겠다고 결정한 이후에는 대부분 받아들인다. 그 이후의 삶은 일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무래도 흔히 생각하는 대기업이나 '괜찮은 직업'을 갖기는 어렵다."

최기원 씨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활동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역거부자들은 사회적 차별이 만연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생활을 지켜나가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있다."

일본에 모인 병역거부자들은 종교적 병역거부자들과는 달리, 정치적인 관점에서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병역거부자라고 하면, 완고한 평화주의자거나 한없이 여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편견과 달리, 병역거부자 대부분은 복합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다. 이들 중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과 군사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또는 한국 징병제의 인권 문제와 비합리적인 강제성에 반대하여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경우다.

호소이 씨는 한국에서 온 각양각색의 병역거부자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우리는 인터뷰를 마치고 크레이그 앤더슨 씨와의 좌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신주쿠 교엔마에로 향했다.

▲ 2003년 11월 강철민 이병은 현역 군인 신분으로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며 노무현 정부의 파병 결정 철회를 요구했다. ⓒ연합뉴스

# 앤더슨 씨와의 만남, 신주쿠

크레이그 앤더슨 씨와 만나기로 한 곳은 신주쿠 교엔마로 근처였다. 최근 한국에서도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시간제로 빌릴 수 있는 회의실이었다. 이 좌담회는 <매거진9>의 제안으로 열렸으며, 웹진의 편집장과 필자들과 함께했다.

나로서는 오랜만에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였다. <매거진9>의 이사인 츠카다 히사코(塚田壽子) 씨와 아마미야 카린 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도시샤대학 와타나베 타케사토(渡辺武達) 교수가 통역을 도왔다. 또 한국 병역거부자 초청을 위해 동분서주한 요시다 씨와 세키야 시게루(関谷滋) 씨가 함께했다. 세키야 씨는 교토에서 베헤이렌과 자테크 활동을 하며 미군 탈영병을 해외로 망명시키는데 한몫했던 이다.

좌담회 주제는 '우리들이 말하는 비전(非戦)'이었다. 앤더슨 씨는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그는 자신이 50년 전 자신이 겪은 일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는 신주쿠를 떠돌았다. 이 앞의 공원을 떠돌기도 했고, 지하철에서 잠을 자거나 커피집을 떠돌았다. 그러다가 거리에서 한 학생을 만났다. 그는 머리에 반전(反戰) 구호가 적힌 반다나(두건)를 두르고 있었다. 말을 걸었지만,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떠돌았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도쿄대 학생 켄지였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세키야 씨가 엮어 출판한 <옆에 탈영병이 있던 시대(となりに脱走兵がいた時代-ジャテック、ある市民運動の記録)>(思想の科学社 펴냄)에 잘 나와 있다. 앤더슨 씨와 3명의 탈영병은 1967년 10월 26일 밤, 히피 차림새의 학생을 신주쿠의 음악다방 후게츠도(風月堂) 앞에서 불러 세웠다. 그는 당시 도쿄대 학생이던 야마다 켄지 씨였다.

"저렴하게 잘 수 있는 곳을 알려 달라." 앤더슨 씨는 130엔을 야마다 씨에게 보여주며 말을 붙였다고 한다. 당시 물가 기준으로도 130엔은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야마다 씨는 잠시 생각한 뒤, 그들에게 제안했다. "내 하숙방으로 올래?" 탈영병들이 물었다. "4명이 묵을 수 있나?" 야마다 씨는 "4명이나 재울 정도의 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잠시 의논을 한 뒤, 두 명씩 떨어져 행동하기로 했다.

그렇게 야마다 씨 방으로 온 사람은 존 배릴러 1등 항공병과 크레이그 앤더슨 2등 항공병이었다. 방에서 한숨을 놓게 되자 이들은 "이스케이프 프롬 유 에스 네이비(Escape from US NAVY)"라고 말했다.

야마다 씨는 딱히 반전주의에 관한 사명감은 없었으나, 상당히 흥분했다고 한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을 불러내 대화를 이어갔다.

야마다 씨와 친구들은 두 사람이 탈영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 일본 정부에 신고하는 것, △ 군대로 돌아가는 것, △ 일본 내에서 숨어 사는 것, △ 일본에 망명하는 것, △ 제3국 주일 대사관에 망명 원조를 요청하는 것, △ 반전단체에 연락해 보호를 부탁하는 것.

배릴러 씨와 앤더슨 씨는 일본에서 숨어 사는 것을 선택했지만 미일관계를 생각했을 때 가능성이 낮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에 신고하거나 군대로 돌아가는 방법을 설득했지만, 두 사람은 강력하게 "싫다(No)"라고 말했다. 결국 반전단체에 연락해 보호를 부탁하기로 했다.

앤더슨 씨는 "정치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자 야마다 씨는 "탈영을 한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 문제였다"라고 말했다. 이에 두 사람은 의견을 나누더니, "그렇다면 탈영한 의도를 공표하고 싶다. 하지만 정치단체는 싫다"고 선을 그었다.

당시만 해도 순진한 학생이었던 야마다 씨는 다음날 담임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미군 탈영병을 숨겨주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평소에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상담하라고 했던 교수는 "그런 일에 관여하지 말고 경찰에 연락하라"고 말했다.

교수는 수업 중 "학생들 중에 탈영병을 숨겨주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경찰에 신고하고 학생 본분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산케이 신문>에 흘러 들어가면서 '도쿄대생 히피, 탈영병을 숨겨주다'라는 기사가 나왔다.

야마다 씨와 친구들은 베헤이렌이 미군 기지 앞에서 탈영을 권유하는 전단을 나눠주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베헤이렌에 연락했다. 종교 단체나 '총평'(당시 일본의 전국 단위 노동조합)에 연락하기보다는 시민운동가 모임인 베헤이렌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연락을 받은 베헤이렌 측은 처음에 FBI가 아닌지 의심했다고 한다.

10월 28일 탈영병들은 서로 떨어져 베헤이렌에 합류했다.(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해 첩보원처럼 움직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탈영의 이유를 밝힐 인터뷰 영상을 촬영했다. 이후는 알려진 대로, 비밀리에 소련 상선을 타고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이들이 소련에 도착할 즈음인 11월 13일 오다 마코토 씨와 츠루미 슌스케 씨를 비롯한 베헤이렌 활동가들은 도쿄 사학회관에서 미군 탈영병의 인터뷰가 담긴 영상과 함께 망명 사실을 발표했다. 얼마 후, 일본 전역에는 미군 탈영병들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는 뉴스로 도배됐다.

▲ 크레이그 앤더슨 씨(가운데)와 한국의 병역거부자들, 그리고 이들을 초청한 작가 아마미야 카린 씨. ⓒ전쟁없는세상

야마다 씨는 지금 생각해도 평범한 학생으로 세계사적 사건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털어놨다.

앤더슨 씨는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이야기한 후, 현재 일본에 관한 이야기로 운을 뗐다. "그때 나를 도와준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나? 지금 일본은 어떤 상황인가?" 그는 현재의 정세에 불만이 많은 듯했다.

"전쟁은 작은 일이 모여서 일어난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나라 간 대화 단절도 그런 일 중 하나다. 난 이것이 일종의 신호(Signal)라고 생각한다. 중국도, 미국도, 북한도, 일본도 좋은 신호를 보내고 있지 않다. 중국은 이제 강대국이 되었으며, 북한은 핵무장을 시작했고, 일본은 계속 군비를 늘리고 있다."

함께 참석한 <매거진9> 사람들이 물었다. "'평화헌법 9조'(일본이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전쟁을 방기하도록 규정한 조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앤더슨 씨는 이에 굉장히 비판적으로 말했다. 일본의 호헌파(평화헌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견해였다.

"내가 보기에 헌법 9조는 중요하지 않다. 일본은 이미 재군비가 끝났다.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일본은 미일 안보조약이 있는데, 왜 재군비를 하는가. 역사를 반복하려 하는 것인가. 이렇게 재군비가 계속되면 그 끝은 핵무장이다. 이 군대(자위대)는 이미 방어적인 군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본의 헌법 9조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앤더슨 씨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실제로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중요하다. 이 곳에서 재군비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

강길모 씨가 물었다. "국제적으로 전쟁을 막기 위한 연대활동이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앤더슨 씨는 비관적인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은 14년간 전쟁을 했다. 그러나 그 이후 유의미한 평화운동이 거의 없었다. 미국도 현재 굉장히 절망적인 상태다. 나는 헛된 희망을 주고 싶지 않다. 현재 상황이 힘든 것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앤더슨 씨는 계속해서 지금 자신과 주변의 상황에 관해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의 평화운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무언인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평화운동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나는 기존의 평화운동과는 거리가 있다. 일부 무의미한 평화운동에 대해서는 동의 할 수 없다. 제인 폰다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고통을 겪고 온 사람들에게 침을 뱉고 욕을 했다."

당시 제인 폰다는 북베트남에 가 대공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귀환한 미군 포로들의 고문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몇몇 평화 운동가들은 귀환병들에게 물건을 던지는 등 모욕을 줬다.

또한 그는 "불행하게도 미국의 새로운 세대들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호의적이다. 우리는 이점부터 인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던 중 화제는 한국의 병역거부자로 넘어왔다. 그는 우리와 만나기 전부터 한국의 병역거부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앤더슨 씨는 이들이 겪는 이야기를 듣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전쟁과 군대에 반대하여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처음부터 베트남전에 의문이 많았다. 그렇지만 집안 사정과 여러 이유로 해군에 지원해서 파병되었다. 소극적으로 명령 불복종도 하고, 임무도 거부하면서 군대 안에서 싸웠다. 나는 딱히 사상도 종교도 없었고, 그래서 스스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지휘관도 나를 딱히 처벌하지 않았다. 그래서 탈영하게 되었다."

앤더슨 씨는 자신을 가리켜 '애국적 탈영병'이라고 말했다. 내일로 예정된 강연회 제목이기도 했다. 강길모 씨와 박정훈 씨가 "'애국적 탈영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다." 그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대체로 병역거부자를 겁쟁이나 배신자라고 생각했다. 정부가 잘못된 일을 할 때, 그에 맞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나를 그것을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에 반대하는 탈영병은 나치 독일 치하에도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도 있었다. 정부가 잘못된 일을 할 때 거부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차례 베트남전에 다녀온 뒤, 요코스카에 인트래피드호가 기항 중인 상태에서 탈영했다.

"미군 9만 5000명(1967년 10월 당시의 기준으로 병력의 투입량을 이야기 한 듯)이 베트남으로 갔다.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나는 전쟁도 싫었고, 군대도 싫었다. 당시에는 버클리 대학가를 중심으로 사회 운동이 활발했는데, 관심은 있었지만 깊게 관여하지는 않았다. 성인이 되어 군대에 가야 했을 때, 그래도 최대한 전쟁을 피하고자 해군에 지원했다. 나는 군대에서 군복도 제대로 입지 않았고, 임무도 최대한 거부했다. 불합리에 대항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전역을 당하든, 어떻게 되든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분명 명령 불복종에 해당했을 텐데, 왜 나를 그냥 내버려 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지휘관들은 앤더슨 씨의 행동을 일시적인 일탈로 본 것 아닐까? 병력 부족으로 마구잡이 식 징집에서 벌어진 촌극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알다시피, 강력한 징병제하에서 전역은 행운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군에서는 사소한 문제를 덮고 지나가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전에 투입되었을 때, 내가 있던 항공모함에서는 매일같이 전투기가 발진했다. 나는 당시 신호수 보직을 받았는데, 그래서 매일 항공모함에서 폭격을 위해 떠나는 전투기를 봤다. 하지만 베트남에 있는 동안 나에게는 총알 한 방도 날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바다 위에서 육지로 폭탄을 들이붓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쟁은 정말 잘못되었다고 느꼈고,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4명이 탈영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신분증과 증명서를 모두 찢어서 버리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군복도 쓰레기통에 버렸다. 지금도 탈영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그 후에도 5년이나 전쟁을 계속했다. 탐욕 때문이었다. 우리가 탈영한 이후, 많은 미군이 탈영했고 전쟁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개개인이 모여 모두 함께 만든 것이다."

두 시간여의 간담회가 끝나고, 우리는 근처 한 이자카야에서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한국에서 온 노리미트 서울 사무국 사람들도 합류했다. '동아시아 최대의 DIY 페스티벌'이라고 불리는 '노리미트 페스티벌'은 2016년 코엔지에서 처음 시작했고, 지난해 여름에는 서울에서도 열렸다. 나는 노리미트 서울 사무국에 참여했다. 페스티벌 기간 중 사무국 사람들에게 앤더슨 씨 강연회 소식을 알리자, 이들 중 일부가 흥미를 느껴 즉석에서 일본행을 결정했다. 이들 중에는 특히 풀뿌리 지역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서울 송파지역 풀뿌리 활동가인 이강원 씨가 앤더슨 씨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랐다. 나는 당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자 앤더슨 씨는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그냥 내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당신도 당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길 바란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