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야권은 지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국회 일정을 마비시키고 있다. 보수 야당의 태클 때문에 다수 국민의 기대와 달리 보편주의 아동수당 정책은 선별적 방식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최저임금 정상화 정책이나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도 여전히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청년 일자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다수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
대통령 개헌 발의권 행사의 전망
지난 한 해 동안 국회는 개헌 특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개헌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은 3월 중순까지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어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에서 정해구 위원장을 단장으로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 연대 공동대표와 연세대 법전원의 김종철 교수가 공동 부위원장이 되어 3월 중순까지 개헌안을 대통령께 보고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대통령이 발의할 개헌안을 정리하는 바쁜 일정을 진행하고 있다.
총강 및 기본권 반영을 담당하는 분과(분과장 곽상진 경상대 법대 교수)에서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과 같은 기본권 강화를 담을 예정이고, 정부 형태 분과(분과장 정태호 경희대 법전원 교수)에서는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할 것인지 대통령제를 유지할 것인지 등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지방분권-국민주권 분과(분과장 이국운 한동대 법학과 교수)에서는 국민소환, 국민발안, 배심재판 등의 근거 마련과 같은 직접 민주제 도입과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비례성 원칙 명시 방안 등을 담당하고 있다.
헌법자문특별위원회의 국민참여본부는 오프라인(off-line)에서 개헌에 대해 의견을 제시해 온 시민사회단체와 학계로부터 의견을 듣고 있다. 또 무작위로 추출된 시민들이 참여하는 숙의형 시민토론회를 권역별로 개최하고, 청년·청소년 워크샵, 지역순회 간담회와 각종 토론회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국민 제안 사이트를 통해 다양한 국민의 의견들을 수렴한 경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홈페이지(☞바로 가기 : )를 통해 22개 핵심 의제 등 중요 쟁점들에 대해 국민들이 의견을 객관식으로 표시할 수 있도록 하고, 댓글도 달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최대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국회를 압박하여 실질적으로 개헌안을 심의하도록 하려면, 또 대통령 발의 개헌안에 국민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대통령이 국민의 총의를 모아 개헌안을 발의해도 국회 표결 통과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개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므로 보수 야당의 동의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전국을 다니면서 강연회를 개최하고 지속적으로 야당들을 설득하는 등의 노력을 해도 쉽지 않아 대통령까지 나서게 된 것처럼, 실질적으로 여야가 합의해서 개헌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현재 상황에서 쉽지 않다.
물론 지난 대선에서 '6월 국민 투표'를 공약했으므로 이를 위한 절차를 진행한다는 것만으로도 국민과의 약속을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 야당 후보들도 모두 개헌에는 동의했기 때문에 개헌 논의 자체를 거부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번 김영철의 방남 과정에서 보듯이 이념 대립까지 가중된다면 헌법 전문에 4.19와 5.18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항쟁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 등 시작부터 첩첩 산중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쉽지 않은 쟁점들이 즐비하다.
촛불세력들, 개헌 통해 국민전선 형성해야
그러나 이번의 개헌 추진은 단순히 대선 당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수준의 문제를 넘어서는 시대적 과제를 담고 있다. 지난 1987년 6월 항쟁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헌법 체계는 많은 한계를 이미 노출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진 상황이다. 특히 광화문 촛불혁명에서 나타난 민심은 답답한 정치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국민의 요구를 '개헌'이라는 방식으로 반영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들을 지금의 정치 체제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 30년 간의 정치 과정에서 지겹도록 증명됐다.
정당의 이름을 바꾸고 정치 지도자와 국회의원들을 교체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이런 사실을 충분히 알게 됐다. 이제 낙후된 정치 시스템을 바꾸고 변화한 경제사회적 환경에 맞도록 새로운 정치 구조를 도입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보수 야권이 개헌을 반대하는 이유가 지방선거와 맞물린 시기상의 문제라면 6월이 아니라 10월이나 올해 말까지 시점을 확정하여 국민 투표 시기를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야당에서 요구하는 제안 중의 일부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기 위해서는 바른미래당과 자유한국당에서 60표 정도가 동의를 해줘야 한다. 이들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정부 형태 등의 권력 구조에서 얼마나 양보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제 열린 자세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 권력의 일부를 국회로 이관하는 방식으로 총리 선출 권한을 국회에 부여하는 형식을 통해 국회의 내각 추천권을 상당 부분 반영할 수 있는 조항 등이 향후 논의의 핵심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개헌을 통한 정치구조의 변화에 대해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정부의 형태나 권력 구조에 대한 문제보다도 선거법 개정의 내용을 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해왔다. 현재의 국회 구조와 낡은 정당 정치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대통령의 권력을 국회로 분산한다고 하면 국민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와 국회 논의를 계기로 복지국가를 위한 "개헌 국민전선"의 형성이 필요하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지금의 정치 구조를 지속적으로 잔존시키자는 수구 세력들이 한편이 되고, 복지국가를 위해 새로운 정치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과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국민이 다른 한편이 되어 전선을 형성하는 '개헌 국민전선'이 필요하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해답이다
정당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지역주의와 계파 중심의 정치에서 벗어나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수용하고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줘야 한다. 이런 조건이 확실하게 전제되어야 권력 분산에 대한 개방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바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해답이다. 이를 통해 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의사가 사장되지 않고 모두 국회로 반영되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특정 계파의 보스가 공천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유능하고 실제로 일할 수 있는 국회의원들이 선출될 것이라는 믿음을 국민에게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낡은 정치가 아니라 진정한 새로운 정치는 대한민국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경제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이다. 다양한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담아낼 수 있는 정치 구조여야 하며, 실제로 국민 다수의 의견이 비례적으로 반영되어 개혁 입법들이 속도감 있게 진행돼야 한다.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모인 국민의 의사를 신속하게 정책에 반영하는 정치 체제라야 한다. 적어도 다음 총선은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같은 비례성 강한 선거제도 속에서 치러져야 한다. 그래야 촛불혁명 정신의 진정한 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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