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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아직도 한가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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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아직도 한가로운가? 김기식‧김경수 사태 심상치 않다
2003년 12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이 폭탄 발언을 했다. "우리가 쓴 불법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

이듬해 5월 검찰이 불법 정치자금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 측은 113억8700만 원,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측은 823억2000만 원의 불법 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회창 전 총재 쪽으로 7배나 많은 불법 정치자금이 흘러들어간 셈이지만, 노 대통령의 '상대적 청렴함'은 어떠한 정치적 효용도 발휘하지 못했다.

'차떼기당' 오명을 뒤집어 쓴 한나라당에 애진즉 기대를 접었던 국민들은 노 대통령이 던진 '10분의 1' 승부수에만 주목했다. 검찰 발표로 난처해진 쪽은 당연히 노 대통령이었다. 한나라당이 되레 노무현 정부를 꾸짖고, 임기 내내 곶감 빼먹듯 '10분의 1' 발언을 정치공세 소재로 써먹는 기이한 일이 반복됐다.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이 사퇴했다. 문재인 정부의 차관급 이상 고위공직자 중 8번째 인사 실패다. 그의 낙마는 사실상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결정했다. 정무적 판단을 미룬 청와대가 법을 정치의 복판으로 끌어들인 탓이다.

명분은 이랬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김 전 원장 행위의 적법성 여부를 선관위에 맡기며 고위공직자 인사 기준에 관한 "새로운 가치와 기준을 세워야 할 때"라고 했다. 인사 때마다 반복되는 법적, 도덕적 논란에 기준점을 세우자는 취지라는 것.

하지만 9년 집권기에 적폐를 쌓아온 보수 야당에 견줘 청렴도가 상대적으로 높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우월감이 깔려있었다. 문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김 전 원장의 행위 중 "어느 하나라도 위법"한지, "관행에 비추어 도덕성에서 평균 이하"인지 확인하자고 내기 걸듯 판을 키웠다. 민주당을 뒷전으로 물리고 대통령이 야당과 싸우는 듯이 비쳤다.

문 대통령의 도박은 본전도 못 건졌다. 김 전 원장이 물러난 지 이틀째 문 대통령은 아무런 말이 없다. 대신 여권은 "사후적으로 불법이라고 해석한 선관위가 무능과 직무유기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선관위를 두들기고 있다.

"우리가 피해자"라는 청와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사 청탁과 정실 문화 근절 의지가 대단했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부터 "인사나 이권을 청탁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을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밀어주고 당겨주기식 연고주의에 의한 집단 형성 등의 폐해는 돈을 주지 않아 죄의식은 없더라도 모두를 망친다"고도 했다.

그런 강직함과 소탈함, 정치적 소신에 매료됐던 이들을 크게 실망시킨 이는 친형 노건평 씨였다. 2004년 노건평 씨는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으로부터 인사 청탁과 함께 3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법정에 섰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 청탁이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 뒤로 노 대통령의 "패가망신" 발언은 보수 야당으로부터 조롱받는 단골 소재가 됐다.

'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에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이 얽혔다. 댓글 조회수를 올려 여론 조작을 시도한 필명 '드루킹'의 일탈 행위에 김 의원이 연루되면서 파장이 커졌다. 김 의원은 누구나 인정하는 문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드루킹은 김 의원에게 자기가 아는 변호사를 오사카 총영사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민주당 법률자문단을 통해선 청와대 행정관 자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드루킹의 인사 청탁도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과정이 매우 석연치 않다.

드루킹이 추천한 인사는 김 의원을 통해 청와대 인사수석실에 전달됐고, 백원우 민정비서관이 만나기까지 했다. "열린 인사시스템에 따른 추천"이라는 게 김 의원과 청와대의 주장이지만, 부적절한 인사 청탁과 경계가 모호하다. 드루킹이 도대체 김 의원과 어떤 관계이기에 청와대 인사‧민정 라인을 움직일 정도로 실력을 발휘했는지, 상식적인 의문이 꼬리를 문다.

그럼에도 청와대의 사태 인식은 한가롭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김경수 의원 같은 대통령의 최측근이 추천했는데도 인사에서 걸렀다는 것을 오히려 칭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인사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협박한 것인데 그러면 우리가 피해자 아닌가"라고도 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 야당은 김기식-김경수 '쌍끌이' 특검을 요구하며 총공세 모드다. 임종석 비서실장과 조국 민정수석을 타깃으로 공격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를 정치 공세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빌미를 모두 여권에서 제공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그랬듯, 정의와 공정을 국정 좌표로 삼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상대적 청렴함'은 방패가 되지 못한다. 대통령의 최측근이 댓글 조작 주모자와 인사 청탁 문제로 결부된 사건도 연루의 정도와 무관하게 위기의 징후다.

검경의 수사는 철저하게 진행하되, 측근들을 돌아보고 시스템을 새로 정비해야 할 정치적 책임은 대통령 몫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어쩌다 최악의 인사 파동으로 기록된 2005년 '이기준 사태'를 맞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문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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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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