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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만 싶던 제주, 떠나지 않을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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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만 싶던 제주, 떠나지 않을 제주 [제주도가 환경부 장관에게] 31

제주도는 한국에서 자연생태의 원형이 그나마 남아있는 드문 땅입니다. 그리고 현재 난개발에 따른 갈등의 섬, 지구온난화로 인한 위기의 섬입니다. 살아야하고 살려야한다는 절박감에 동료 시민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가 환경부 장관에게 가 닿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류가 뭇 생명과 더불어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노력만이 아니라 정책과 노선의 전환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주 제2공항 전략환경영향평가가 임박해 위기의식 가운데 연재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환경부가 동의하고 국토부가 기본계획을 고시하면 제주 제2공항 사업은 법적 지위를 갖게 됩니다. 전략환경영향평가에 대한 환경부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매일 글을 이어갈 것입니다. 제주 제2공항 사업만이 시대와 지역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 구체적인 사안을 배경으로 우리의 제주발 문제의식은 펼쳐질 것입니다.

제주도가 환경부 장관에게 연재 바로가기

열아홉 살의 꿈 ‘탈제주’

제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여느 친구들처럼 청소년기 최우선 목표는 탈(脫)제주였죠. 육상 면적도, 인구도, 재정도 전국에서 고작 1%인 외딴 섬. 바다로 가로막혀 오랜 세월 변방이자 유배지였던 곳.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을 내내 되새기며 컸습니다. 제주도는 말이나 뛰어놀 곳이지 사람이 살 곳은 아니라는 뜻만 같았거든요. 제주를 꼭 벗어나고 말겠다는 의지와 결기로 고등학교 3년을 버텼습니다. 안타깝게도 입시에 실패하고 탈제주는 좌절됐습니다. 우울과 방황에 한껏 절여진 채 스무 살을 맞았습니다. 서울로 간 친구들이 새로운 세계를 휘젓고 다닐 때 제주에 남은 저는 홀로 박탈감, 자격지심, 피해망상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지냈죠. 다행인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더라고요.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2-3년이 지나고서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자각이 생기자 제자리를 찾아보려고 애썼습니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 제주를 다시 보게 된 거죠. 여기는 말만 뛰어노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식생의 보고이자 공동체가 굳건한 섬이라는 걸, 둘레를 휘감은 바다 덕분에 고유한 문화가 깃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연하고 지겨웠던 오름과 바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특별한 감수성을 키워줬다는 사실도요. 그토록 바랐던 탈제주에 대한 열망은 기성세대의 세뇌였습니다. 좁고 견고하고 폐쇄적인 지역사회에서 나가 뜻을 마음껏 펼치며 살라는 바람도 없지 않았겠지만요. ‘척박한 땅에선 뭘 해도 안 된다’, ‘산업이 취약한 경제 구조에선 개발만이 살 길이다’, ‘후지고 미개한 섬의 습성을 탈피하고 도시화를 이뤄야 한다’는 논리가 한창 가치관을 만들어가는 시기에 주입식 교육 방침과 순응을 다그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맞물리면서 그대로 내면화됐던 거였습니다. 무지하고 무심했던 지난날을 만회하려면 반성만으론 부족했습니다. 단지 좋아하는 마음에 그쳐선 안 되니까요. 제주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첫 직장을 고른 이유였죠. 마침 그 무렵 제주에선 어떤 조짐이 일었습니다. 2010년부터 제주에서 나가는 인구보다 제주로 들어온 인구가 더 늘어나기 시작했거든요. 하는 일 덕분에 변화의 서막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제주 올레 열풍, 저가 항공편 증가,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는 다운 시프트(Down Shift) 현상 등에 힘입어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관광객 1500만 시대 진입과 더불어 제주 이주는 ‘붐’ 되었습니다. 사람도 돈도 제주로 몰린다고 어딜 가나 호들갑이었습니다. 매스컴에 비친 제주는 누구나 살고 싶은 곳으로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정말로 한라산에서 공을 차면 바다에 빠지느냐고 묻던 뭍사람들의 비아냥거림도 수그러들었습니다. 제주는 투자의 대상이자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제주도 풍경 ⓒ김수오

격랑의 제주 사회, 과연 누가 행복해졌나?

이 현상을 가리켜 피할 수 없는 ‘성장통’이라고 입을 모은 이들은 경제든 인구든 양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며 개발을 다그쳤고, 대책이 시급한 ‘병증’이라고 진단했던 이들은 자연이 망가지고 공동체가 무너지는 변화의 격랑에서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내놓기만 하면 부르는 게 값이라던 부동산 시장은 호황을 넘어서 활황이었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지역으로 떠올랐죠. 명암은 뚜렷했습니다. 정작 소득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매년 받던 국가장학금에서 탈락하고, ‘갓물주’들과 달리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들에게는 넘보지 못할 그림의 떡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값이 잔뜩 올라 땅 판 돈으로 부모님이 가게를 차려준 지인이 있는 반면 치솟은 주택가격 때문에 결혼을 엄두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죠. 누가 맞고 누군 틀리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저를 포함한 대다수의 제주 사람들은 이 가운데서 우왕좌왕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찬성과 반대로 갈라지는 공동체만이 아니라 당장 나 자신도 쪼개지고 부대낀다는 사실이 괴로웠습니다. 제 선생님 표현으로는 일상에서 체험하는 떨림과 긁힘으로 진동을 느끼는 때이죠. 늘어난 자동차 탓에 출퇴근길에 한껏 짜증을 내고 어디를 가나 경관을 망치는 호텔과 리조트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가 렌터카 업체에서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냈던 후배와 리조트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생계를 꾸리는 친구들을 떠올리면 착잡해집니다. 당장 제 처지도 그렇습니다.
▲제주도 풍경 ⓒ김수오

이런 제주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속솜행 이시라”(아무 말 하지 않고 입을 다물라는 뜻의 제주어) 어릴 적부터 어른들은 말했습니다. 어디 가서 모나지 않게 행동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앞장서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똑똑하고 야무진 청년들이 무참하게 목숨을 잃었던 4·3 이후 암묵적으로 굳어진 삶의 태도라고 짐작합니다. 제주지역의 근대화 과정에서 지역민의 삶은 고려되지 않은 채 국가 주도의 개발이 수월하게 이뤄졌던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어른들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개발은 곧 성장이라고 되뇌곤 했죠. 관광단지 개발, 국제자유도시 추진, 거대 외국 자본 유치. 성인이 되어 물려받은 제주의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사람들은 알게 됐습니다. 이대로는 행복하지 않다는 걸, 그토록 부르짖던 개발의 과실은 도민들에게 오지 않는다는 걸.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중산간 허리가 잘려나가고, 해안가의 빌레(너럭바위)들이 가려지고, 대대로 손대지 않았던 자연녹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타운하우스가 들어섰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제주에 쉬러 온 사람도, 제주에 살러온 사람도 제주가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주변에 꽤 많이 봤어요. 자신들 같은 사람 때문인 것 같다고, 제주를 좋아하는 마음이 제주를 망쳤다는 것이죠. 지난여름 제2공항 쟁점해소 토론회가 열리고 난 뒤에 유튜브에 부동산 관련 채널에 해설 영상이 수두룩 올라오더라고요. 제2공항은 국책사업이고 예정대로 추진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온라인 뉴스 댓글을 보면 제2공항을 반대하는 사람들더러 지역발전도, 경제성장도 모르는 순진하고 무식한 사람이라는 조롱이 넘쳐납니다. 당장 일상이 고된데 오버 투어리즘이 어떻고, 관광 시장에 질적 전환이 필요하고, 결국엔 탈성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냐고 타박을 듣기도 했습니다.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자꾸만 저를 덮쳐옵니다.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변의 동료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상상한 미래를 앞당기고 싶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모임에서든 술자리에서든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꾸만 말을 걸어봅니다. 더 이상 ‘속솜’하지 않고 말하고 떠들고 설치고 다닐 겁니다.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내내 ‘대상’이었던 경험이 무력감이라는 관성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 섬 안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온 친구들, 가족과 친지들. 우리가 ‘공동체’라고 부르는 작고 큰 단위들이 저에게는 잃어선 안 될 터전이니까요. 열아홉 살 제가 떠나고만 싶던 제주를 이대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주도 풍경 ⓒ김수오

김태연은 제주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모빌리티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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