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초기 살인도구와 범인 알고도 방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파악은 이 참사 규명의 가장 기초적인 활동으로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SK, 옥시 등 제조판매기업들이 주범이고 정부가 공범인 대규모의 소비자 집단살인사건'에 비유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집단살인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검경 수사의 출발은 희생자가 누구이고 몇 명인가? 그리고 범인은 누구며 범행도구와 수법 그리고 동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수백수천 명의 경찰과 군대가 동원되어 피해자를 매장한 것으로 의심되는 산과 들, 하천을 밤낮으로 뒤져서 피해자와 범행에 사용된 증거를 찾아내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 가습기살균제 집단살인사건도 그렇게 해왔을까? 이 사건은 2011년 초에 발생한 원인미상의 피사자와 상해자들이 발견되어 살인범을 찾아내는 역학조사를 통해 범행에 사용된 도구가 역학조사관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가습기살균제'라는 것을 밝혀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신속하게 역학조사 결과가 잘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역학조사 결과가 나온 직후부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살인사건의 범행도구를 찾아냈고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낸 직후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상한지 몇 가지만 시간 순서대로 짚어보자. 첫째, 2011년 이명박 정부 때의 일이다. 8월 질병관리본부(이하 질본)는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 가습기살균제를 만들어 판 기업들을 불러서 몇 차례의 회의를 갖는다. '이게 너희들이 만든 거 맞냐?', '이 제품에 들어 있는 성분이 무엇이냐?', '안전 여부를 확인했느냐?' 등등을 물은 것이다. 물증을 찾았고 대략의 범행전모를 파악했으면 수사권을 가진 검경에 수사를 의뢰해 압수수색과 구속영장 청구를 통해 범인 체포와 더불어 사건의 전모가 파헤쳐 지도록 했어야 했다. 그런데 질본은 범인들을 회의실로 모셔다가 조사 기록을 모두 보여주면서 이게 맞느냐고 하나하나 묻는다. 어떤 범죄든 범인들은 아니라고 발뺌하고 부정하면서 빠져나가려는 것이 생리다. 범인인 기업들이 평소 그들 편에 선 전문가들까지 대동하고 나타나 질본의 조사 내용을 전면 부정했을 것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고 실제 그렇게 진행되었다. 더 나아가 질본은 며칠 뒤 발표 예정으로 준비한 발표 자료마저 범인인 기업들에 보여줬다. 기업들은 '제품명과 기업 이름을 발표해선 안 된다'는 식의 막무가내 주장을 했고 질본은 '그래?'하고 받아들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11년 8월 31일 정부는 '원인미상의 산모 폐 손상과 사망의 원인이 가습기살균제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범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범행 도구와 범인 이름 등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물론 강제회수 및 사용금지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원래는 '원인미상의 산모 폐 손상과 사망 원인이 가습기살균제로 모두 수거하고 전면 사용 금지토록 한다'는 것이어야 했다. 밝혀진 살인 사건의 범행 도구인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이름과 종류를 번호 붙여 나열해놓고, 이 도구를 이용해 살인을 저지른 범인인 기업의 책임자들을 포승줄에 묶어 하나하나 언론 카메라 앞에 세웠어야 했다. 그러면서 소비자들 중 이 제품을 사용하는 분들은 당장 사용을 중단하고 피해 신고를 하라고, 지금부터 이 제품들은 강제 수거한다고 대국민 담화를 해야 했다. 질본의 엉터리 발표 과정 때문에 실제 가습기살균제 제품 수거와 사용 금지 조치는 2011년 11월 11일에야 그것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범인이 누군지 범행 도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회수하지 않는 바람에 소비자들의 안방에 있던 범행 도구들은 방치됐고 70여 일 동안 가습기살균제 사용이 계속했고 피해는 계속됐다.보수 정부나 진보 정부나
둘째, 2012~2015년의 박근혜 정부 때의 일이다. 피해자들에 대한 대책을 환경보건법상의 환경성질환으로 규정해 지원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환경부의 환경보건위원회는 가습기살균제 문제는 제품의 하자이지 수질 대기 폐기물 토양과 같은 환경오염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자 국회에서 거의 전원 동의하는 결의안이 채택됐고 야당의원들이 피해구제특별법을 발의했다. 환경부는 법이 만들어지면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 상태였다. 그런데 박근혜 청와대는 이를 여야 간의 정치적 힘겨루기로 받아들였고 당정 입장으로 특별법 제정을 반대했다. 대신 환경보건위원회가 이미 아니라고 했던 환경보건법 상의 환경성질환 지정카드를 환경부에 들이밀었다. 환경부 차관이 위원장인 환경보건위원회는 정식회의도 열지 않고 청와대 뜻대로 기존 입장을 번복한다. 그러는 사이에 환경부가 확보해준 피해 지원 예산도 거의 사용하지 못해 불용처리된다. 2016년에 촛불혁명이 일어났고 2017년 1월에야 피해구제법이 제정되어 그해 8월부터 시행된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의 몽니로 5년여 동안 피해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셋째, 2017~2021년의 문재인 정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2020년 말 국회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법을 개정해 1년 6개월을 연장하고 조사 기능을 보강하면서 정작 가습기살균제 진상규명 기능을 삭제해버린다. 가습기살균제 진상규명국을 없애고 대신 세월호 피해자들이 요구한 조사관 30명을 세월호 진상규명에 충원하도록 했다. 2021년 초 관련 시행령에서는 그나마 남아있던 가습기살균제 피해 지원부서의 조사권도 박탈해버린다. 모두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와 환경부가 진행한 일들이다. 그리고 국민들이 '안전하고 나라다운 나라 만들라'며 180석이 넘는 압도적인 다수당으로 만들어준 민주당이 한 일이다. 국회 환경노동상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가습기살균제 피해문제를 잘 알고 있던 한정애 의원은 민주당 정책위원장을 하면서 특조위법 개정의 방향과 내용을 주도했고 이후 바로 환경부 장관으로 영전한다. 장관 취임 후에는 기자들에게 '가습기살균제 진상규명 다 끝났다'라고 주장한다. 국민의 뜻을 받들어 참사를 해결해야 할 국민의 대표이자 피해자의 대표였어야 할 자가 갑자기 돌변해 참사의 공범인 환경부를 두둔하더니 나아가 주범들에게도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4년 전 취임 직후 피해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사과하고 위로하면서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동의와 묵인 없이 불가능한 일들이다. 넷째,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하게 짚고 있는 피해자 찾기의 문제다. 가습기살균제가 처음 출시되고 판매되었던 18년 전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으로 이어지는 보수-진보-진보-보수의 색채가 엇갈려온 긴 세월이다. 보수건 진보건 이 기간 동안 어느 누구도 가습기살균제 집단 살인사건이 은밀하게 자행되어 온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생활화학제품의 안전 문제와 환경보건에 대해 무능했고 무관심했다. 그리고 사건이 수면으로 떠오른 2011년 이후 2021년 8월 말까지의 10년은 어떠한가.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으로 보수-보수-진보의 색채가 거듭 바뀌지만, 역시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진상규명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피해규모 파악과 피해자 찾기는 우선순위는 고사하고 아예 순위에도 들지 못하고 방치된다. 지난 10년 동안 질본, 환경부, 총리실, 청와대, 정권인수위원회 등의 어떤 정부의 가습기살균제 공식 자료에도 피해 규모를 적시한 경우가 없다. 피해 규모에 대한 조사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간접적으로 파악한 자료도 인용하지 않고 무시했다. 살인사건에서 주범과 공범이 잡혔는데도 피해자를 특정하지 못하고 찾아내지 않으면 수사팀이 무능한 것이거나 결과적으로 주범과 공범을 봐주고 놓치게 된다. 범인을 잡지 못하거나 피해자를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에 수사가 미궁에 빠지고 소위 장기미제 사건이 된다. 악명 높았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이 그랬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경우도 이미 그런 조짐이다. 주범이 밝혀졌지만 공범은 한 놈도 잡지도 특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수많은 피해자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지만 정작 구체적인 피해규모와 피해자를 특정하지 못하고 그저 신고전화만 받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상황이다. 그 사이 법원마저 SK, 애경, 신세계 이마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 잡아 놓은 주범들도 빠져나가고 있다. 옥시의 외국인 사장인 거라브제인 등 주범 중의 주범들도 이미 빠져나간 상태다. 특별수사본부 격에 해당하는 특조위는 포와 차가 빠진 장기판 신세의 개점휴업상태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그렇게 만들었다.국민 5명 중 1명 가습기살균제 사용
지난 10년 동안 가습기살균제 피해 규모 조사는 모두 3번 있었다. 첫 번째는 2015년 환경보건시민센터가 서울대 보건대학원과 공동으로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한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사용률은 22%, 건강피해경험률은 20.9%로 응답했고 이를 토대로 가습기살균제 사용자 984만~1087만 명, 건강피해경험자 29만~227만 명으로 추산했다. 두 번째는 2016~2017년에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과학원이 한국환경독성보건학회에 의뢰한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 범위 확대를 위한 질환선정 및 판정기준 마련'이란 연구용역에서 보조적으로 피해규모를 파악한 것으로 19세 이상 성인대상 1500명씩 두 차례 조사했다. 가습기살균제 사용률 6.7% 건강피해경험률 10.1%로 전체 사용자는 350만~400만 명, 건강피해자는 49만~56만 명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환경부는 보고서에 실린 이 피해규모를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세 번째는 사회적참사특조위의 조사로 2019년 전국 5천 가구(가구원 1만5472명) 표본을 계통 추출해 가가호호 방문해 가족 중 세대주를 대상으로 면접 조사했다. 연구자들이 특조위의 조사결과를 보완해 2020년 한국환경보건학회지에 학술논문으로 보고했다. 가습기살균제 사용률은 18.4%, 건강피해경험률은 10.7%로 사용자는 893만8857명으로 추산됐다. 대한민국 국민 5명 중 1명꼴이다. 건강피해경험자는 95만2149명이고 이중 78만6619명이 병원치료를 받았다. 사망자는 2만366명으로 추산되었다. 2021년 7월 16일까지 정부에 신고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7500명이고 그중 사망자는 23%인 1678명이다. 이는 전체 건강피해경험자의 0.78%에 불과하다. 이중 절반이 조금 넘는 4117명(사망 1014명)만이 피해구제법에 의해 피해자임이 인정되었는데 이는 전체 건강피해자의 0.43%이다. 구제인정자 중 그동안 700여 명만을 기업들이 배상했다. 이는 전체 건강피해자의 0.07%이다.가습기살균제 참사 해결에 함께할 것
2021년 5~6월 두 달간 강원 춘천에서 제주까지 전국 15개 광역 조직을 순회하면서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별 가습기살균제 피해규모 조사결과와 실제 피해 신고 및 구제법에 의한 인정/불인정 실태를 발표하고 지역거주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기자회견 및 캠페인을 전개했다. 법원이 무죄라고 했던 cmit/mit성분의 신세계 이마트 PB상품을 사용하다 쓰러져 13년간 투병 끝에 작년에 사망한 박영숙 님의 부군 김태종 님이 두 달간 내내 동행했다. 지역별로 건강 피해 추산 규모의 0.4~0.9%밖에 안 되는 실제 피해 신고와 그 절반 정도인 구제법 피해 인정 현황의 실태를 접하고 언론과 시민들은 모두 놀라워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과 사회적참사특조위 가동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작년 말 집권 민주당이 특조위법에서 가습기살균제 진상규명 기능을 삭제하고 다시 조사권마저 없애버리고 조사 대상 기관인 환경부의 한정애 장관이 '가습기살균제 진상규명 끝났다'라고 강변하는데 대해서 지역 시민사회와 피해자들은 분노하며 끝까지 가습기살균제 참사 해결에 같이 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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