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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천만 미국의 아프간 대리전쟁...'악마의 게임'은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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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천만 미국의 아프간 대리전쟁...'악마의 게임'은 이렇게 시작됐다 [전쟁국가 미국] 1차 아프간전쟁(1979-89) (중)
소련의 아프간 점령 다음 날인 1979년 12월 26일, 브레진스키는 카터 대통령에게 올린 비밀 보고를 통해 미국의 대응책을 건의했다. "아프간의 저항이 지속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며 이를 위해 "아프간 반군에게 보다 많은 무기와 군자금이 지원돼야"하고, 이러한 반군 지원의 임무를 이웃 나라인 파키스탄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슬람 우방국들과의 협력을 통해 선전선동과 함께 반군 지원을 위한 비밀공작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1980년 1월 2일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소련군의 아프간 철수"이며 설령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소련 군사 개입의 부담을 최대한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비밀 메모를 제출하고, 대소련 비밀 군사 동맹 결성을 위해 이집트와 파키스탄을 직접 방문했다.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이집트 공군기지를 이용해 이집트가 보유한 소련제 무기들을 아프간 반군에 제공한다는 데 합의했다. 최초의 지원 무기가 1980년 1월 10일 파키스탄에 도착했다. 소련의 아프간 점령 후 불과 2주일 만이었다. 지아 울 하크 파키스탄 대통령과는 아프간 반군에 대한 무기 및 군자금 지원과 군사훈련을 파키스탄 정보국(ISI)이 도맡아 하며, 이러한 파키스탄의 아프간 반군 지원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는 데 합의했다. 철저한 보안 유지는 소련의 군사 보복을 우려한 조치였다. 그러나 반군 지원을 파키스탄에 일임함으로써 이후 미국은 이슬람 무장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가질 수 없었다. 파키스탄은 아프간 동쪽 국경 너머 자국의 서북부 지역 여러 곳에 군사캠프를 만들어 놓고 아프간 출신 반군은 물론 사우디, 이집트, 알제리 등 이슬람국가 출신의 용병들(이른바 '아랍 아프간'), 그리고 나중에는 미국과 서유럽 등에서 모집된 이슬람 전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들 중 군사능력이 뛰어난 자들은 미국으로 보내져 중앙정보국(CIA), 그린베레와 네이비실과 같은 특수부대에서 고도의 전문적 군사훈련을 받았다. CIA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렇게 양성된 이슬람 전사는 약 30만 명으로 이들 중 온건파는 1만 5천 명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과격파, 근본주의 세력이었다고 한다. 한편 1980년 7월 사우디 정보국(GID)이 미 CIA와 똑같은 액수의 군자금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이로써 미국이 기획하고 사우디가 자금을 대며, 파키스탄이 군사 지원을 맡고 이슬람전사들이 실제 전투를 담당하는 대소련 성전(지하드)의 얼개가 완성됐다. CIA 역사상 최대 비밀공작인 사이클론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아프간전쟁이 성전인 이유는 신을 부정하는 세력인 소련을 이슬람 땅에서 축출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1차 아프간전쟁에 투입한 전쟁 비용을 공개한 바 없다. 비밀전쟁인 까닭이다. 10년간 대략 30-50억 달러로 얘기된다. 사우디 정부도 같은 액수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우디에서는 종교단체와 자선단체가 엄청난 액수의 돈을 기부했다. 성전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아프간전쟁을 현지에서 관장했던 CIA 파키스탄 지국장에 따르면 매월 2500만 달러의 기부금이 전달됐다고 한다. 연간 3억 달러에 해당된다. 사우디 정부의 지원 액수와 거의 같은 수준이었을 수 있다. 이슬람 종교단체와 자선단체들은 이슬람 전사 모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이들 단체들의 지부를 통해 지원병들을 모집한 것이다. 1차 아프간전쟁은 비밀전쟁인 동시에 대리전쟁이었다. 비밀전쟁이었기 때문에 미 국민은 그 실상을 알 수 없었다. 대리전쟁이었기 때문에 미 정부도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관철시킬 수 없었다. 1990년대 이후 이슬람세력의 대미 테러와 그 절정인 9.11테러를 예견하거나 방지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이 비밀대리전쟁이라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10만 명 가까운 미군 병사의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프간 독립을 위해 미 지상군을 투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워터게이트사건 이후 미 의회의 집중적인 조사와 감시로 CIA의 해외공작에도 심각한 제약이 가해졌다. 결국 비밀공작도 우방국에 맡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사파리클럽

미국의 대소련 비밀대리전쟁을 가능하게 한 선구적 국제 조직이 있다. 1976년 9월 공식 창립된 '사파리클럽'이란 조직이다. 프랑스, 이집트, 사우디, 이란, 모로코 정보기관 수장들의 협의체로 1970년대 후반 앙골라,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등에서 벌어진 민족해방투쟁에서 미국을 대신하여 반공세력을 지원했다. 말하자면 미국의 해외비밀공작을 외주 받은 셈이다. 사우디의 투르키 빈 파이잘 왕자는 1977년부터 9.11테러 직후까지 무려 24년간 사우디 정보국장을 역임한 인물인데, 그는 2002년 2월 자신의 모교인 미 조지타운대 동창회에서 사파리클럽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76년이 되면 워터게이트사건의 여파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문자 그대로 의회에 의해 손발이 묶여버리고 말았죠.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스파이를 보낼 수도 없었고, 정보 분석을 할 수도 없었으며, 공작금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미 정보기관의 활동 불능 상태를 벌충하기 위해 일단의 국가들이 반공투쟁의 희망으로 뭉쳤습니다. 사파리클럽이 그것이죠." 사파리클럽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은 1972년부터 10년간 프랑스 대외정보기관 SDECE의 수장을 역임한 알렉산드르 드 마렌쉬 백작이다. '프랑스의 키신저'로 불리는 그는 일찍부터 소련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지역이 소련의 급소임을 간파했다. 1973년 왕정 붕괴부터 아프간 정세 변화를 주시하던 그는 브레진스키에게 아프간 이슬람 세력을 활용한 소련 공격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1981년 취임 직후의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 마약을 이용해 소련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파리클럽의 역할이 아프간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소련 침공 직후 곧바로 이집트가 아프간 반군에 무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전임 나세르의 자주노선에서 친미로 전환한 사다트는 1981년 10월 이슬람세력에 암살된다. 1970년 나세르 사후 집권한 사다트는 1972년 소련 군사고문단을 전격 철수시키면서 친미로 방향 전환을 했는데, 당시 미 안보보좌관 키신저와 사다트 간 비밀 협상의 연락 창구 역할을 한 것은 사우디 초대 정보국장인 카말 아담이었다. 이후 사우디와 이집트, 팔레비 국왕 치하의 이란은 친미 국가로서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1979년 3월 미국-이집트-이스라엘의 캠프데이비드 평화협정을 위한 이집트-이스라엘 간의 비밀협상은 사파리클럽의 일원인 모로코의 중재로 이뤄졌다.
▲ 탈레반 대원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스프레이로 지워진 미용실 광고판 앞을 총을 들고 지나가고 있다. 카불/AFP 연합뉴스

악마의 게임

미국의 독립저술가 로버트 드레퓌스가 2005년 펴낸 <악마의 게임(Devil's Game)>은 2차 대전 후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이슬람세력과 손을 잡은 결과가 9.11테러로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2차 대전 후 세계적 대세였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이슬람세력과 손을 잡았다. 그 결과 주적인 소련을 붕괴시킬 수 있었으나 9.11테러라는 대재앙을 불러왔다는, 따라서 미국과 이슬람세력의 제휴는 악마와의 거래였다는 얘기다. 이슬람근본주의, 또는 정치적 이슬람(Political Islam)으로도 불리는 이슬람주의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세속주의를 거부하고 이슬람에 기반을 둔 신정 정치체제를 지향한다. 공산주의와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1차 대전 이후 중동지역을 장악한 영국과 이후의 미국이 이슬람주의와 손을 잡은 것은 이들의 강력한 반공주의 때문이었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기독교 세력과 손을 잡았던 미국은 중동지역에서는 이슬람세력이 유럽의 기독교 정치세력과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슬람주의가 정치세력으로 본격 등장한 것은 1920년대다. 1927년 아라비아반도에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건국됐고, 1928년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출범한 것이다. 사우디왕국은 용맹하지만 잔인한 사우드 가문과 매우 보수적 이슬람 교리를 설파하는 와하브 가문의 결합으로 탄생한 나라다. 즉 성전(지하드)에 의해 생겨난 최초의 근대국가다. 무슬림형제단은 세계적 차원의 이슬람운동을 제창했는데, 1952년 집권한 나세르의 세속주의와 대립했다. 1954년 나세르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대다수 인사들이 사우디로 망명했고, 사우디의 극단적 보수 이슬람 신앙인 와하비즘과 연대한다. 한편 파키스탄에서는 1941년 이슬람협회(자마트 이슬라미)가 출범한다. 1962년 사우디는 이슬람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위해 세계무슬림연맹을 창설했다. 이 무렵부터 중동지역에서는 사우디 주도의 반(反)나세르, 반소 '이슬람동맹'이 결성됐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사우디, 이집트, 파키스탄 등이 주도하는 이슬람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사우디의 어마어마한 석유 자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유 가격이 4배 인상된 1973년의 석유파동을 경계로 사우디의 국가예산은 자그마치 15배 이상 늘어났다(73년 이전 5년간 92억 달러에서 74년 이후 5년간 1420억 달러로). 이 막대한 석유 자금이 각지의 이슬람국가들에 흘러들어가면서 지역적이며 일상적 차원에 머물렀던 이슬람교가 국제적이며 정치적 성향을 지닌 극단적 이슬람운동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한 연구자는 1970년대 이후의 이슬람주의운동을 '석유달러 이슬람(Petro-dollar Islam)으로 부르기도 했다.  1967년 6일전쟁으로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참패하고, 3년 후 나세르가 사망하면서 나세르의 위협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소련의 위협뿐이며 1979년 아프간 사태를 빌미로 한 아프간 비밀전쟁이 그 과제를 완수할 터였다.

중국, 영국, 이란, 이스라엘의 참전

그런데 아프간 비밀전쟁에 참여한 것은 사우디나 파키스탄, 이집트 같은 중동국가만이 아니었다. 중국도 참여했다. 브레진스키는 1980년 1월 2일 메모에서 아프간 반군을 지원할 국가로 파키스탄 외에 중국을 콕 짚어 지목했다. 실제로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이 1980년 1월 4일부터 13일까지 무려 열흘간 베이징을 방문했다. 당시 브라운 장관은 '전략적 협력'이라는 말 외에 구체적 방문 목적을 밝히지 않았으나 중국의 아프간전쟁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브라운 장관의 방문 이후 열흘만인 1980년 1월 24일, 미 의회는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MFN) 지위를 승인했다. 수교 후 1년 만에 중국을 정상적 무역 파트너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프간전쟁 협력의 대가일 것이다. 중국은 1978년 12월 16일 미중 수교 방침을 확정한 지 이틀 만인 12월 18일 중국공산당 3중전회를 열어 개혁개방 방침을 결정했는데(실제 수교는 1979년 1월 1일), 이제 MFN 지위는 중국경제의 순항에 돛을 달아준 격이었다. 미국은 군용으로도 사용될 수 있는 첨단 통신, 운송장비 판매를 허용하는 등 이후 양국간 군사협력이 매우 긴밀해진다. 또한 중국은 신장지역에 미국의 대소 전자감청기지 설치를 승인한다. 중국 전략가들은 미중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로 1980년대를 꼽는데 그 배경에는 중국의 아프간전쟁 협력이 있었던 셈이다. 주중 미국 대사를 역임한 찰스 프리먼에 따르면 중국은 1981-84년 동안 약 6억 달러에 이르는 무기를 아프간에 지원했다. 또한 신장위구르지역의 무슬림들을 아프간전쟁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와 동투르키스탄 독립운동을 벌인다. 오늘날 중국이 이 지역에서 직면한 저항과 혼란의 시작, 즉 중국판 역풍(blowback)인 셈이다. 영국이 참여한 것은 1982년 3월 포클랜드전쟁 이후였다. 당시 미국이 영국의 적국 아르헨티나의 군사 움직임에 관한 온갖 극비정보는 물론 불법으로 스팅어 미사일을 제공하는 등 영국의 승리를 도왔기 때문이다. 영국은 군사 훈련 및 정보 수집을 맡았다. 특히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영국 일반정보본부(GCHQ), 그리고 프랑스 정보국까지 참여한 정보 수집 및 분석으로 미국 진영은 소련 측의 군사 동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당시 소련 군인들은 유령처럼 나타나 귀신처럼 사라지는 반군의 신출귀몰한 행태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아프간전쟁을 '유령의 전쟁'이라고 불렀는데, 그 비결은 서방 진영의 첨단정보 수집이었던 셈이다. 반미 혁명에 성공한 이란도 반소 성전에 동참했다. 이란은 아프간에 공산혁명이 발생한 1978년 4월부터 이미 아프간 공산정권에 반대한다는 공식 정책을 세웠고 이에 따라 이란 접경 아프간 서부에 있는 이란계 시아파 반군을 지원했다. 팔레비국왕 시절의 반소 정책이 이슬람혁명 정부에서도 계속 유지된 셈이다. 이란은 자국 내에 16개의 군사캠프를 세워 게릴라 전사들을 양성했는데, 이들에게는 '이슬람 세계 정복의 선봉'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줬다고 한다. 이란의 행태는 이슬람주의의 근본 성격을 선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소련은 물론 미국도 반대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대소 성전에 이스라엘의 참여는 의외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1999년 <성스럽지 않은 전쟁(Unholy Wars)>이란 책을 통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아프간전쟁을 실상을 밝힌 미국 기자 존 쿨리(1927년 생)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그동안의 아랍전쟁에서 포획한 소련제 무기들을 지원했고 아프간과 파키스탄에서 군사교관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다만 쿨리는 이스라엘의 보안 유지가 워낙 철저해 목격자 증언 외에 구체적 참전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소련의 바레니코프 장군이 "우리는 동네북 신세였다"라고 한탄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참여국들의 면면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아프간전쟁 참여는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조직인 하마스의 탄생이라는 역풍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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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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