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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5년간 이 전쟁을 준비해 왔다"...美 군사주의 부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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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국은 15년간 이 전쟁을 준비해 왔다"...美 군사주의 부활하다 [전쟁국가 미국] 1차 이라크전쟁(1990.8-1991.2) (상)
1차 이라크전쟁(걸프전쟁)은 탈냉전 후 미국이 치른 첫 번째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의 압도적 승리로 미국의 군사주의는 화려하게 부활한다. 베트남전쟁 패배 이후 사용을 자제했던 군사력이 대외정책의 핵심수단으로 재부상한 것이다. 또한 역사상 처음으로 미군이 중동지역(사우디아라비아)에 상시 주둔하게 된다. 그러나 아프간전쟁에서 군사적 실력을 닦은 이슬람 무장세력은 미군의 사우디 주둔에 크게 반발했고, 이는 9.11로 정점을 이루는 일련의 대미 테러를 초래했다. 1차 이라크전쟁은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미국은 즉각 군사대응 돌입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미국은 반응은 즉각적이고 단호했다. 사흘 후인 8월 5일 부시 대통령은 "쿠웨이트에 대한 침략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직후 체니 국방장관이 슈와르츠코프 중부군 사령관을 대동하고 사우디를 급거 방문, 파드 국왕에게 미국의 사우디 방어 계획을 설명했다. 사우디 방어를 위해 미군의 사우디 주둔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넘어 사우디까지 침략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틀 후인 8월 7일 사막의 방패(Desert Shield) 작전이 전격 시행된다. 미 본토와 인도양 디에고가르시아 미군기지 등에서 F-15 전폭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와 병력이 속속 사우디에 도착했다. 두 달간 10만 7천명의 인원과 52만 톤 분량의 전쟁물자가 사우디에 들어왔다. 10월 초에 이미 미국은 사실상 전투 태세를 완료한 셈이다. 이로써 미 플로리다주 탐파에 본부를 둔 중부사령부는 자신의 작전지역인 중동지역에 실제 전투 역량을 배치할 수 있게 됐다. 1983년 1월 출범한 중부군의 당초 임무는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사우디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중부군은 출범 직후 ‘아라비아반도 방어’를 위한 작전계획(OP 1002)을 준비했다. 그러나 1989년 11월 냉전 종식으로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면서 이라크가 새로운 주적으로 떠올랐다. 이미 1990년 1월 상원 청문회에서 슈와르츠코프 중부군 사령관은 "이라크는 걸프 지역 최강의 군사 강국"이며 "이웃 국가들을 군사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중부군은 이라크를 주적으로 설정한 새로운 작전계획(OP 1002-90)을 작성했다. 이 작전계획이 ‘사막의 방패’ 작전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미국은 당초부터 외교보다는 군사력에 의한 문제 해결을 작정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우디 방어를 명분으로 배치시킨 미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동지역에 대한 패권, 즉 석유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노렸다고 할 수 있다. 냉전 기간 서독 등 서유럽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집중됐던 미 군사력의 전진 배치가 중동지역으로까지 확대되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당시 오사마 빈 라덴은 아랍 국가들 간의 분쟁에 이교도를 끌어들인 것에(미군의 사우디 주둔) 반대하면서 아프간전쟁 출신의 무자헤딘을 동원해 쿠웨이트를 해방하자고 제의했다. 사우디 왕실은 거부했고, 이후 그는 해외로 망명해 반미 투쟁에 나선다. 이미 이때부터 새로운 전쟁의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미국의 전쟁 의지와 후세인의 오판

전투 태세를 완료한 이후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전쟁에 대한 국내외적 지지 확보를 위한 외교 총력전에 돌입한다. 11월 29일 유엔 안보리는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의 퇴각을 요구했고(안보리 결의 668), 미 의회는 이듬해 1월 12일 대이라크 전쟁을 승인했다. 상원 52 대 47, 하원 250 대 183이었다. 나아가 이라크전쟁에 참여할 30여 국가를 확보했고 사우디, 일본, 독일 등으로부터 540억 달러의 전쟁 자금을 모금했다. 전쟁이 아닌 협상에 의해 이라크군을 철수시킬 수는 없었을까? 부시 행정부는 처음부터 그럴 의향이 전혀 없었다. 전쟁 승리를 통해 국내적으로는 1970년대 이후의 베트남 증후군(미 군사력 사용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하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자신의 의지를 타국에 관철시킬 수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전쟁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이러한 미국의 전쟁 의지를 오판했다. 그는 미국의 공습 직전인 1월 중순 타리크 아지즈 외교장관을 모스크바로 보내 소련의 중재를 요청했다. 2003년 바그다드에 진입한 미군이 확보한 이라크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지상군 투입 하루 전인 2월 23일 고르바초프는 미국에 미소가 함께 유엔을 통해 위기 극복 방안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협상에 의한 철수를 성사시킴으로써 소련의 우방국(이라크는 1974년 소련과 우호조약을 체결)을 구원하는 한편 국제외교와 분쟁 해결에서 소련을 미국과 대등한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헛된 기대였다. 후세인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미 지상군은 투입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 역시 오판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소련을 미국의 세계 경영에 참여시킬 의향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탈냉전으로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면서 미국은 아무런 제약 없이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됐고, 이라크전쟁은 이를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미국은 냉전 종식 당시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 나토를 동쪽으로 단 1인치도 확대하지 않겠다고 고르바초프에게 구두로 약속했다. 하지만 클린턴 행정부 이후 나토의 동진(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구 동구권 국가들의 나토 가입)이 이어졌고 이 약속은 결국 빈말이 됐다. 이렇게 볼 때 탈냉전 후 미국의 일방주의는 1차 이라크전쟁과 함께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조지 H.W 부시 전 미국대통령이 1990년 11월 22일 걸프전 당시 추수감사절을 맞아 사우디 아라비아에 주둔한 미군 부대원들과 만나고 있다. ⓒPhoto By: Courtesy of George Bush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미 국민은 다시 그들의 군대를 사랑하게 됐다"

'사막의 폭풍(Desert Storm)'으로 명명된 미국 주도의 이라크 공격은 1월 17일부터 약 40일 간의 공습, 그리고 2월 24일 이후 나흘간의 지상전 끝에 2월 28일 자정에 공식 종료됐다. 전쟁이 끝난 후 미 육군의 한 고위 장성은 "실제 전투는 100시간에 불과했으나 우리는 15년간 이 전쟁을 준비해 왔다"고 소회를 밝혔다. 베트남전쟁 패배 이후 명예 회복을 위해 절치부심해 왔다는 얘기다. 미 육군은 베트남전쟁의 교훈을 바탕으로 반란진압(counter-insurgency)으로 불리는 게릴라전은 가급적 피하고, 압도적 군사력으로 단기간에 끝낼 수 있으며, 명확한 전쟁 목적과 출구 전략이 확보된 상태에서만 전쟁을 시작한다는 전략을 추구해 왔다. 와인버거 독트린, 또는 파월 독트린이 그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대 동안 소련을 가상 적으로 한 공지전(Air-Land Battle) 개념을 발전시켰다. 압도적 화력의 공습을 퍼부은 이후 지상전을 개시한다는 개념이다. 이라크전쟁은 이 공지전 개념을 적용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미국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퍼부은 것에 맞먹는 양의 폭탄을 이라크에 쏟아 부었다. 이라크전쟁을 이끈 파월 합참의장은 "미 국민은 다시 그들의 군대를 사랑하게 됐다"며 승리를 자축했다. 부시 대통령은 "신의 가호로 우리는 베트남 신드롬을 완전히 영원하게 떨쳐버렸다"고 선언했다. 전쟁 승리로 군은 실추된 명예를 회복했고, 정치지도자는 군사력 사용에 대한 국내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타임>은 이라크전쟁의 승리로 "새로운 미국의 세기가 열렸고 단극시대가 시작됐으며,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고 평가했다. 냉전 승리에 이은 이라크전쟁 승리로 미국은 천하무적이라는 자기도취에 빠졌다.
▲조지 W 부시(왼쪽) 전 미국 대통령, 그리고 아버지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깔끔하지 못한 마무리

하지만 베트남 신드롬의 극복은 이제 곧 ‘사막의 폭풍 신드롬’으로 이어질 터였다. 천하무적인 미국의 군사력으로 미국의 의지를 세계에 관철시킬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이 그것이다. 후세인 정권을 살려둔 미국의 실책과 미 군사력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이 맞물리면서 이후 미국은 끝없는 전쟁의 악순환에 말려들어가게 된다. 부시 대통령은 전쟁이 끝난 2월 28일 일기에 "역사상 이런 승리는 없었다"고 자축하면서도 "마무리가 깔끔하지는 못했다"고 적었다. 후세인 정권이 건재한 데 대한 불편함의 표시였다. 당시 미군은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에 만족했고 후세인 정권의 교체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 아랍 국가들의 반발이다. 당초 전쟁 목적인 쿠웨이트 해방을 넘어 이라크 정권 교체까지를 추구할 경우 다국적군의 단결이 깨질 수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이집트를 다국적군에 참여시키기 위해 무려 1백억 달러에 이르는 무바라크 정권의 대미 부채를 탕감해줬다. 둘째, 전쟁 패배의 여파로 후세인 정권이 자연스럽게 붕괴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있었다. 체니 국방장관의 설명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후세인 정권이 무너질 경우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에 대한 대항마가 사라진다는 전략적 우려가 있었다. 부시 대통령과 스코크로프트 안보보좌관은 그들의 공동 회고록에서 "이라크의 공격 능력을 손상시키되 이라크와 이란의 균형이 파괴돼 힘의 공백 상태가 생기지는 않을 만큼만 약화시킨다"는 것이 미국의 전쟁 목표였다고 밝혔다. 결국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온존시킨 채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종전 다음 날인 3월 1일 이라크 국민들에게 반후세인 궐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에 따라 촉발된 남부의 시아파와 북부의 쿠르드족이 반정부 시위를 후세인이 군사력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음에도 미국은 이를 방치했다. 이 때문에 부시 대통령은 미국 내 네오콘과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민주주의의 대의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클린턴 행정부 들어 네오콘은 집요하게 이라크 해방, 즉 후세인 제거를 요구했다. 부시 행정부는 후세인의 자국민 탄압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1991년 7월과 1992년 8월에 각각 북위 36도 이북, 북위 32도 이남을 이라크 공군의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하고 미국과 영국 전투기를 동원해 이를 강제했다. 2003년 2차 이라크전쟁까지 미영 전투기의 출격 횟수는 각각 10만회, 15만회에 이른다. 즉 1차 이라크전쟁 종료 이후에도 이라크는 저강도 전쟁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라크에 대한 가혹한 경제제재로 영유아 50만 명이 사망하는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라이라크전쟁에서 이란에 대항한 아랍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이라크는 왜 쿠웨이트는 침공했던 것일까? 또한 이에 대해 미국이 협상에 의한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외면한 채 이라크에 대한 군사 공격에 나서고 이후에도 12년간의 대치 끝에 끝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동지역 석유자원에 대한 통제권 때문이었다. 다음 회에는 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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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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