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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르바초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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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르바초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해외 시각] 중국의 반면교사가 된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좌절

냉전 종식과 핵 전쟁을 막는 군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마지막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뒤 1990년 최초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991년 12월 퇴임하기까지 6년 9개월간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간 핵 전쟁 위협을 포함해 극한 대립으로 치닫던 냉전 상황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이력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한국 언론은 주로 그를 '개혁가'이지만 실패한 정치인으로 묘사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의 위대함에 대해 "귀족이자 왕당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계급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근대 시민 사회의 도래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인 점"을 들었다. 이를 두고 '리얼리즘 문학의 승리'라 했다. '신체제' 소련의 문학적 전위에 섰던 이 '리얼리즘론'은, 결국 1980년대 '구체제'로 전락해버린 소련의 말로와 고르바초프의 운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자신이 속한 체제의 몰락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고르바초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세계화 반대' 활동가인 월든 벨로 전 필리핀 국립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 5일 <카운터펀치>에 기고한 글을 번역해 소개한다. 이 글의 제목은 "Gorbachev Rode the Tiger and Ended Up Inside It" (호랑이 등에 탔다가 잡아먹힌 고르바초프)다.편집자

▲미하일 고르바초프(1931~2022년)가 1991년 8월 군사 쿠데타 이후 시골 집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발언하던 모습. ⓒAFP=연합뉴스
지난 8월 30일 타계한 고르바초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우선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 개혁의 시동을 걸었으나 그 과정을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소련 사회주의 자체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후 그의 후계자 옐친과 서방, 그리고 IMF는 아무런 제약 없이 러시아에 (약탈적) 자본주의를 이식했다. 극단적 민영화를 통해 기존 국가사회주의의 모든 제도들을 없애버린 자본주의 이식 과정(충격요법)은 대단히 파괴적이었다. 이렇게 태어난 러시아 자본주의는 당초 IMF의 이데올로그들이나 러시아 추종자들이 기대했던 자유시장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막대한 국유자산을 극소수의 공산당 간부와 그 측근들이 독점한 해적 자본주의(pirate capitalism)였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자본주의 이행에 따른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어찌나 컸던지 러시아 국민들은 새 지도자로 등극한 KGB 출신 푸틴을 야만적 자본주의로부터의 “구세주”로 받들었다. 서방이 강요한 충격요법의 경제적 고난과 자유민주주의의 혼란에 질려버린 러시아 국민들은 지난 20년에 걸친 푸틴의 권위주의 및 패거리 자본주의적 통치가 그래도 옐친 시절보다는 낫다며 견뎌내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고르바초프의 교훈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절대 서방을 믿지 마라, 둘째 경제를 개혁하고 민간기업을 장려하되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견지하라, 셋째 정치 과정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를 확고히 하라. 이러한 세 가지 결론들에 대해 한두 가지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이뤄낸 결과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중국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렸으며, 중국 내 빈곤계층을 5% 이하로 줄였고, 정치체제 또한 안정돼 있고 (적어도) 국내에서는 광범위하게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환경 문제와 민주적 정치 참여의 부재 등 중국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래, 우리에게도 많은 문제들이 있지.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식 체제를 따라야 할까? 절대 아니지.” 현재 미국의 공공기반시설과 경제 전반은 너무도 낙후돼 있어 철도 시설 비교만으로도 중국식 사회체제의 우수성을 설득시킬 수 있다. 중국의 고속철도는 베이징-상하이 1300킬로미터를 4.5시간 만에 주파하는 반면 미국의 암트랙(Amtrak)은 워싱턴D.C.-보스턴 830킬로미터를 달리는 데 7시간이나 걸린다(미국에는 고속철도가 단 1킬로미터도 없다!). 다시 고르바초프로 돌아와,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확실히 서방 엘리트들에게 그는 영웅이었고, 또 지금도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주요 경쟁 체제를 제거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진보파들은 소련체제에 개혁이 필요했다고 말하겠지만, 결국 고르바초프는 개혁에 실패했고 푸틴의 권위주의적, 패거리 자본주의적 통치를 초래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그런 식으로(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 추진) 경제와 정치 체제를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점, 즉 반면교사로서 고르바초프의 중요성을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평가는 무엇인가? 나는 고르바초프가 레이건 및 서방과의 협상에서 지나치게 순진했다고 생각한다. 서방은 소련의 개혁이 아니라 붕괴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 체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자신의 개혁이, 소련 공산당이 지배해온 거대하고 복잡한 체제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호랑이 등에 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일부 정책들에 동의할 수 없지만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은 존중한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호랑이 등에 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늘 존경해 왔다. 고르바초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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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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