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러시아의 작가 겸 언론인, 역사가인 막심 아르테몌프의 '서방은 1990년대 러시아의 취약함을 악용했고, 이에 따른 러시아인들의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한다(The West took advantage of Russian weakness in the 1990s and is unable to understand the trauma it unleashed)'라는 제목의 글이다.
필자는 현재 서방에 의해 침략자로 매도되고 있는 러시아가 사실은 지난 30년간 서방에 의한 최대 피해자였으며, 서방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지만 러시아인들은 결코 잊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투데이(rt.com) 9월 9일자에 실려 있다. 편집자
지난 8월 <워싱턴 포스트>에 연재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기사는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서방 사람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에 이른 연유와 현재의 상황을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이제부터 나는 미국과 유럽에서 종종 간과되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제기하고자 한다. 현재 갈등의 뿌리는 고르바초프 집권기인 1985-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일방적으로 끝냈고 냉전을 종식시켰다. 그의 이러한 움직임은 세계를 핵전쟁의 파멸로부터 구원한 것처럼 보였다.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고르바초프는 서방의 정치가들이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련의 일방적 조치들을 추가로 단행했다. 아프간에서 소련군을 철수시켰고, 베를린 장벽의 철거와 독일의 통일을 용인했다. 서유럽 주둔 미군이 그대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일방적으로 철수했고, 나토의 동진 금지에 관해, 즉 동유럽 국가들이 미국 주도 군사동맹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약속을 받아내지도 못한 채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일방적으로 해체했다. 소련은 또한 니카라과, 앙골라, 캄보디아, 에티오피아 등 제3세계 국가들의 반서방 투쟁에 대한 지원을 일방적으로 끊었다. 여기에 더해 고르바초프는 미국이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선물을 안겨주었다. 소련을 해체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러시아 영토였던 상당 지역이(예컨대 크림 반도) 나머지 14개 공화국에게 소속됐고, 러시아 인구의 약 절반이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 바깥에 거주하게 되었다. 소련이 해체된 후 새로 태어난 러시아는 그 대가로 무엇을 얻었는가? 한마디로 말해 아무것도 없다. 소련의 일방적 냉전 종식에 대해 서방은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나토는 유지됐으며, 미국은 자신의 제국에서 단 1인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괌, 사모아, 푸에르토리코(모두 19세기 말 미국의 영토가 됐지만 이곳 주민들에게는 참정권이 없다. 즉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다) 등에게는 여전히 자결권이 허용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도 반환되지 않았다(1898년 쿠바 독립 당시 미국이 영구 임대, 아직도 미군 점령 하에 있음) 이와 반대로 미국은 러시아의 일시적 허약함을 이용해 러시아의 전통적 영토들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왔다. 미국은 러시아의 무력 침공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중부유럽의 체크와 헝가리 등을 나토에 가입시킨 것은 물론(1999년), 1700년대 초기 이래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러시아 지배 아래 있던 발트 3국도 나토에 받아들였다(2004년). 미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조지아)까지 나토에 끌어들이려 했다(2008년). 이 두 곳은 소련의 최장수 지도자였던 브레즈네프와 스탈린의 고향이다. 1992년 이후 러시아가 옛 영토와의 연계를 강화시키려는 노력을 미국은 공개적으로 저지해 왔다. 심지어 워싱턴은 러시아가 다시는 강대국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방책들을 동원했다. 나아가 서방은 고르바초프 치하의 소련이나 옐친 치하의 러시아에 대해 실질적 재정 지원을 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즉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는 일방통행이었다. 반복해서 말한다. 서방은 모든 것을 얻었고, 러시아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러시아는 약화됐고 분열됐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러시아 지도자들이 서명한 외교문서들 중 모스크바의 자멸을 요구한 문서는 없었다. 심지어 1991년 8월에는 미국 대통령 부시가 키예프에 직접 가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소련을 해체하지 말라고 촉구할 정도였다. 미국 정책당국자들에게 소련의 해체는 무수한 재난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예를 들어 각 공화국에 배치된 소련 핵무기의 처리 등). 1980년대와 90년대 소련, 그리고 러시아의 정치지도자들이 유능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의 많은 국민들이 보기에 지도자들은 많은 실수(누군가에게는 배신)를 저질렀다. 하지만 서방, 특히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냉전 및 핵군비 경쟁의 종식을 가져온) 러시아의 희생에 대해 좀 더 신사적으로 대응했어야 했다. 러시아의 일시적 약화에 관대하게 대응했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의 실제 행동은 러시아의 약화를 틈타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것이었다. 소련은 2차 대전 때의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패전국이 아니다. 소련은 미국에게 항복문서를 써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냉전이 끝났다고 해서 소련의 15개 공화국이 독립해야 할 아무런 필연적 이유도 없었다. 역사적 러시아의 붕괴는 고르바초프의 유난히 취약한 지도력과 옐친의 개인적 야심 때문이었다. 옐친은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에게 정권을 넘겨주느니 차라리 작지만 보다 확실한 러시아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1991년 12월 소련 해체 당시) 누구도 몇 세기에 걸쳐 형성된 역사적 러시아를 해체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특히 신생 러시아공화국 바깥에서 살게 될 수천만 러시아인들의 삶은 어떻게 될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일부 사람들은 서방이 1991년 이전부터 '러시아의 해체'를 추구했다든가, 냉전 시절부터 벨라루스나 타지키스탄 사람들이 독립을 꿈꿔왔다고들 말한다. 이런 주장들은 소련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냉전 시절 서방 정치인들이 흐류쇼프나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 등과 회담할 때 이런 얘기를 꺼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 혐오의 선봉장 중 하나인 폴란드야말로 자신의 역사적 경험으로 나라가 해체된다는 것의 아픔이 어떤 것인가를 생생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 2차 대전 후 스탈린은 폴란드에게 실레지아, 동프러시아, 포메라니아 등의 옛 영토를 되돌려주는 관대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냉전 종식 후 누구도 러시아의 영토 상실을 보상해주지 않았다. 오늘날의 러시아공화국을 폴란드에 비유한다면 르보프, 그로드노, 빌니우스뿐만 아니라 브로슬라프, 스테틴, 그다니스크까지 빼앗긴 격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를 들어 역사적 상상을 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45년 이후 모리스 토레즈가 이끄는 공산당이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하고(결코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나라를 민족별 공화국들로, 즉 브르타뉴, 알자스로렌, 플랑드르, 코르시카, 옥시타니아 등으로 분할했다고 치자(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후 러시아가 그랬다). 그리고 1991년 프랑스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고 각 민족 공화국이 독립국가가 됐다고 상상해 보자. 옥시타니아는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하고, 빅토르 위고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대신에 프레데릭 미스트랄의 동상을 세울 것이다. 또한 마르세유의 옥시타니아정부는 파리정부에 대해 과거 식민 시절의 탄압과 옥시탄 언어의 소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아마도 현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연설을 할 때마다 '나는 옥시타니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지금 러시아는 갈갈이 찢겨졌지만, 언젠가는 다시 하나가 될 것이다. 이미 역사적으로 그런 사례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가 1600년대 초반의 '고난의 시대(Time of Trouble), 그리고 두 번째가 1917년 혁명 이후다. 역사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1천년의 분열 끝에 통일됐다. 이스라엘이 국가로 거듭 태어나는 데는 2천년이 걸렸다. (러시아가) 1991년 이후 분열의 역사를 역전시키는 데 30년이 걸렸다. 러시아의 향후 진로가 어디로 향할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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