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50~60년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베트남 침략
미국은 1950년 소련과 중국이 동맹조약을 체결하자 동아시아 정책을 크게 바꾸었다.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소련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을 승인하려 했지만, 중소동맹이 맺어지자 패전국 일본과의 동맹을 추진하며 소련에 이어 중국을 봉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50년 1월 중국과 소련이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이는 북베트남 호치민 정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자, 미국은 이에 맞서 '프랑스의 괴뢰정부'인 남베트남 다이 (Bao Dai) 정부를 승인했다. 수송기와 탱크를 비롯한 대량의 군수물자를 남베트남의 프랑스 군부에 지원하기 시작하며, 1952년 프랑스가 북베트남 또는 베트남 독립동맹 (Viet-Minh)과 종전 협상을 벌이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트루먼 (Harry Truman) 정부는 동아시아에서 한반도와 중국에 이어 베트남에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반드시 막고 싶었던 것이다. 1954년까지 프랑스에 약 14억 달러를 지원하며 거의 80%에 이르는 전쟁 비용을 부담했지만, '명분 없는 전쟁'을 벌인 프랑스는 북베트남을 이기지 못했다.
이에 앞서 베트민 지도자 호치민은 1945~46년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부에 적어도 8번이나 편지를 보내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의해 인도차이나에서 쫓겨났던 프랑스가 일본이 패배하자 다시 인도차이나를 점령해 평화를 위협한다며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의 4대 강국이 유엔을 통해 해결해달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트루먼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1954년 5월, 1946년부터 시작된 제1차 베트남전쟁 또는 '항불 (抗佛)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 또는 프랑스의 항복으로 끝났다. 아이젠하워 (Dwight Eisenhower) 정부는 미국이 직접 베트남과 전쟁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핵무기 사용까지 검토하면서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를 북베트남 통킹만 (Gulf of Tonkin)으로 보내기로 했다.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프랑스 병력까지 해를 입을 수 있다며 프랑스가 반대하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결국 1954년 7월 제1차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한 제네바협정이 이루어졌다.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되 2년 안에 선거를 통해 통일국가가 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사국들과 4대 강국 가운데 미국은 반대했다. 나아가 남베트남에 경제 및 군사 지원을 시작했다. 선거가 실시되면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을 추구해온 호치민의 북베트남이 압도적으로 이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만약 선거가 실시되면 북베트남의 호치민이 80% 안팎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되리라 예상했다. 1955년 10월 남베트남에 디엠 (Ngo Dinh Diem)을 앞세워 반공정권이 들어서도록 지원하고 1957년엔 특수부대까지 보냈다. 제네바협정에 따른 베트남 총선거가 끝내 실시되지 못했던 배경이다. 베트남이 공산화하면 주변 국가들도 공산화하리라는 '도미노 이론'을 바탕으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반대한 것이다.
1961년 남베트남에서 흔히 '베트콩 (Viet-Cong)'으로 불리는 공산주의자들의 군사조직인 인민해방군이 결성되고, 사회 혼란 속에 디엠 정권의 부패와 폭정이 지속되자 케네디 (John Kennedy) 정부는 1963년 11월 군사쿠데타를 지원했다. 디엠이 항복했지만 그와 동생이 살해당한 뒤 공교롭게 미국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쿠데타를 통해 들어선 민 (Duong Van Minh) 정권이 베트콩 세력의 확산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대화를 추구하자 존슨 정부는 1964년 1월 또 다른 군사쿠데타를 지원했다. 칸 (Nguyen Khanh)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사회 혼란과 베트콩 세력의 확산이 지속되는 가운데 존슨은 케네디의 베트남 정책을 유지하면서 군사 개입을 확대해나갔다.
미국은 1964년 7월부터 북베트남 통킹만에 함정을 보내 정찰 활동을 펼쳤다. 1964년 8월 북베트남이 미국 함정을 공격하는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빌미로 1965년 3월부터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였다. 제2차 베트남전쟁 또는 '항미(抗美)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통킹만 사건'은 7년이 지난 1971년 6월 미국의 유력 일간지가 국방부 비밀문서를 폭로함으로써 조작이라고 밝혀졌다.
3. 남한의 적극적 파병 제안과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바로 다음 달부터 미국에 베트남 파병을 제안하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이 1965년 3월 베트남을 침략해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당시엔 꽤 엉뚱한 제안이었다.
첫째, 1961년 6월 정일권 주미대사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청하고 "한국은 미국과 한국이 같은 운명체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양국의 공통된 목표를 위해 한국인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둘째, 1961년 7월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우리는 특히 공산주의 침략에 대항하는 전 세계에 걸친 방위에 대한 당신의 언급을 환영합니다. 우리 역시 평화를 원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전쟁이 강요된다면 한국은 싸움에 참여할 미국의 첫 번째 동맹국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셋째, 1961년 11월 박정희가 워싱턴을 방문해 케네디와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굳건한 반공국가로서 극동의 안보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북베트남은 잘 훈련된 게릴라부대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유형의 전쟁에 잘 훈련된 백만 병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규부대에서 훈련받았는데 지금은 분산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하면 한국은 베트남에 자체 병력을 보낼 수도 있고, 정규부대를 보내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면 지원병을 모집해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자유세계 국가들 사이에 행동 통일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나는 출국 직전 이 문제에 관해 고위 장교들과 협의했는데 모두 열광적이었습니다. 대통령께서 군사자문관들에게 이 제안을 검토해보도록 하고 그 결과를 알려주기 바랍니다."
박정희의 제안에 케네디는 "활력을 얻었다 (was refreshed)"고 간단히 말했다. 회담 다음날 케네디가 박정희 환송을 위해 잠깐 다시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는 베트남이나 다른 지역의 게릴라전투에 남한 병력을 보낼 수 있다고 다시 제안했다. 케네디는 그런 약속을 할 만한 때가 아니라며, 그 문제에 관해서는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서로 연락하자고 했다.
넷째, 1962년 3월 송요찬 국무총리가 해리만 (Averell Harriman) 국무부 극동문제담당 차관보와 대담하면서 파병을 거듭 제안했다.
다섯째, 1964년 3월 김현철 전 총리가 버거 (Samuel Berger) 주한미국대사에게 한국은 미국과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과 전쟁을 수행하는 데 3000~4000명의 병력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정일권 외부부장관 역시 한국의 베트남 참전을 원한다면서 한국의 해외파병을 막는 장애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버거 대사는 그러한 조치의 결과를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하는데,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면 일본과의 협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 같다고 우려했다.
남한은 남베트남과의 접촉도 늘려갔다. 1964년 3월엔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가 사이공을 방문했고, 4월엔 남베트남 군사사절단이 남한을 방문해 군사훈련 및 군사정권의 민정 이양을 시찰했다.
이렇듯 남한은 미국이 1965년 3월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이기 시작하기 훨씬 이전인 1961년 5.16쿠데타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다. 그 배경이나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남한과 미국의 정치적 상황이나 정책을 살펴보아야 한다.
남한에서는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잡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미국의 신임이나 지지를 받는 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남한이 1980년대 말부터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룰 때까지는 위정자들이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게 정권을 잡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1940년대 말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박정희가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가장 먼저 반공을 내세운 것은 미국에 보내는 신호였다. 냉전 시대 미국 대외정책의 가장 큰 목표는 반공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밖으로 미국의 신임을 받기 위해 반공을 내세웠다면, 안으로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제성장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61년 11월 워싱턴을 방문해 케네디를 만나기에 앞서 러스크 (Dean Rusk) 국무부장관을 만나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공산주의 위협에 비추어보아 한국은 60만 병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중략) 60만 병력의 가장 확고한 반공국가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 될수록 많은 경제 원조를 얻는 게 필요하다."
박정희는 자신의 공산주의 이력에서 벗어나면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반공을 앞세우는 한편, 경제성장을 위한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던 것이다.
케네디는 베트남에 군사침략을 감행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1961년 4월엔 쿠바의 카스트로 (Fidel Castro)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쿠바 남부의 피그스만 (Bay of Pigs)을 침공했다가 1000명 이상이 죽거나 생포 당한 참담한 패배를 겪은 터였다.
그 무렵 미국이 남한에 가장 원했던 것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재정적자가 심각해졌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방비와 대외원조를 감축해야 했다. 국방비를 줄이려면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규모 및 대외 군사원조를 축소해야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완강하게 반대하자 그를 달래기 위해 1958년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던 나라 가운데 하나인 남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줄이려면 남한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미국 대신 남한에 경제 원조를 할 수 있고 나아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반공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이승만은 군비감축 뿐만 아니라 한일수교도 반대했기 때문에 4월 혁명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을 받고 물러났지만, 박정희는 일본과의 협상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환심을 사야 했던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앞세우면서 베트남 파병을 적극 제안했고, 베트남에 대한 군사침략을 준비하지 않고 있던 케네디 정부는 남한의 베트남 파병이 한일수교 협상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부정적으로 검토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들어선 존슨 정부가 베트남 정책을 서서히 바꾸기 시작한 가운데, 12월엔 박정희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63년 12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직접 공격하겠다고 의결했다. 미국은 1964년 3월부터 베트남 문제에 동맹국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구상하고, 4월부터 베트남에 '될수록 많은 국기를 꼽는 운동 (More Flag Campaign)'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존슨 정부는 1964년 5월 한국을 포함한 25개 우방국들에게 북베트남의 공산정권을 패배시키기 위해 병력이나 물자 또는 다른 형태의 지원을 제공해달라고 호소했다. 한국 정부엔 야전병원 1개 부대를 요청함으로써 1964년 6월 한국이 130명의 야전병원 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을 보내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이 왜 베트남에 아직 군사침략을 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전투부대를 보내고 싶어 했다. 존슨 정부는 남베트남이 전투부대를 아직 요청하지 않은 데다 게릴라전쟁의 특성상 특히 제3국으로부터의 지상군 운용이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
1964년 7월부터는 미국이 북베트남 통킹만 연안에서 정찰 활동을 펼치면서 8월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9월 130명의 야전병원 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들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군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다.
한편, 1964년 3월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동맹국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구상할 때부터 1964년 9월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의 정치 상황은 몹시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다. 1964년 3월부터 서울에서 한일협상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나는 가운데 군부 내의 쿠데타 움직임도 있었다.
주한미군은 권력투쟁엔 중립을 지키되 친미 군부가 박정희 정부를 전복시킨다면 지원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민주공화당 내분도 한일협정에 앞장서고 있던 김종필 의장의 권세 때문에 꽤 심각했다.
이에 미국은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을 박정희의 '밀사 (eminance grise)' 또는 러시아 황제의 신임을 얻어 권세를 휘두르다 암살당한 '라스푸틴 (Rasputin)'으로 간주하며, 박정희에게 김종필을 제거하고 공화당을 재건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미국은 한국에 수십 억 달러를 퍼부어도 박정희 정부가 '혼란스러운 독재 (messy fief)'에 머물러있다며 한국을 '커다란 실패작 가운데 하나 (one of our great failures)'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4년 6월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격렬해지자 서울대학교 총장은 박정희에게 65명의 대학생들과 많은 교수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박정희는 이를 빌미로 6월 3일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6.3사태'다.
하워즈 (Hamilton Howze) 주한미군사령관과 버거 대사는 박정희에게 '미국의 승인이나 동의 (approval or agreement)'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여, 한국군 2개 사단을 작전통제권에서 풀어주었다. 미국이 박정희와 공화당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사이에 민간인 1344명과 학생 523명이 체포되고, 학생 191명이 수배되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대로 김종필을 미국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1964년 9월 한국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에도 미국은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공산주의자들이나 반미주의자들에 의한 쿠데타나 봉기가 일어나면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지만, 내부의 권력투쟁엔 중립을 지킨다는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계엄령으로 반대세력을 제압하며,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의 신임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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