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보호대를 착용하고 흰색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하얀 장갑을 낀다. 북소리가 울린다. 무릎을 꿇고 팔을 앞으로 쭉 뻗어 얼굴을 아스팔트에 얹는다. 북소리가 들린다. 머리를 들고 팔을 접고 다리를 펴 일어선다. 북을 연달아 친다. 두 손을 모으고 열 걸음을 내딛는다.
영하 7도.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이다.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박준호, 홍기탁이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75미터 굴뚝에 오른 지 391일째다. 공장가동 중단에 맞서 파인텍 모기업인 스타플렉스가 고용을 책임지라며, 지난해 11월12일 시작한 싸움이 다섯 번째 계절을 맞았다. 청와대에서 고공농성장까지 4박5일 20Km 행진이다.
열 걸음에서 멈추고 오체를 곧게 펴고 얼굴이 땅을 향해 내려가는데 누군가 뱉어놓은 가래가 보인다. 몸을 살짝 틀어 가래침을 피한다. 담배꽁초, 낙엽, 쓰레기를 피해 몸을 아스팔트에 포갠다. 흰 한복 옷이 아스팔트 검은 기름때에 더러워진다.
한파주의보 오체투지 행진
첫날은 청와대 사랑채에서 충정로까지 행진했고, 오늘은 풍산빌딩에서 여의도 산업은행으로 향한다. 돌풍이 불어온다. 장갑 두 개를 겹쳐 꼈는데도 손끝이 시리다. 열 걸음 걷고 오체를 땅에 던지기를 반복한다. 한 시간 만에 애오개역을 도착했다.
잠시 몸을 녹이고 다시 출발한다. 박준호 홍기탁이 굴뚝에 오르던 지난해 11월은 문재인 정부 출범 6개월 무렵이었다. 대통령 지지율이 80%를 넘었다. 사람들은 불평등한 세상이 공정하게 바뀌길 기대했다. 가난한 삶이 달라지길 바랐다. 적폐청산에 대한 기대도 높았다. 박준호 홍기탁은 재벌과 사법부 적폐청산을 요구했다.
오체투지 행진이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을 지난다. 헌법재판소가 국회 앞 집회에 대해 헌법불일치 판결을 내렸다. 국회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오체투지 행진을 하다 기소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서영섭 신부는 검사가 공소를 취하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제 재판에서 검찰은 법이 바뀌기 전까지 현행법이 유효하다며 벌금 300만 원을 구형했다.
"이게 정말 말이 되나요?"
재판 때문에 서울에 왔다가 행진을 하는 서영섭 신부가 말한다. 검찰청 옆 법원. 오늘 새벽 법원은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들은 법원행정처장 재직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 지시로 사법행정권을 남용하고 재판에 개입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라는 반헌법적 중대범죄로 기소됐다.
그런데 법원은 범죄 관여정도와 공모관계 성립에 의문이 있다며 그들을 풀어줬다. 가장 황당한 영장기각 사유는 "피의자가 수사에 임하는 태도에 비춰 구속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태도가 좋아서 구속을 안 시킨다? 전 대법관 박병대는 93세 노모를 돌봐야 한다고 했고, 법원은 그들을 석방했다.
전날 울산법원(재판장 오창섭)은 검찰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구형한 박세민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실장을 징역 10월로 법정 구속했다. 박 실장은 산재신청이 번번이 불승인되는 것에 항의해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공단 직원들과 충돌이 발생해 기속됐다. 형평성의 1도 찾아볼 수 없는 판결. 대한민국 적폐1번지는 오늘도 권력을 마음껏 누린다.
적폐1번지 검찰과 법원을 지나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시속 1.5Km.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걸음이다. 미친 듯이 경쟁하고 빨리빨리 해치우고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대, 지렁이의 속도로 세상을 걷는다. 고층빌딩 뒤편 허름한 건물. 고단하고 지친 젊은이. 계단에 쭈그려 앉아 쉬는 노인. 멈추면 보이는 풍경이다.
12시 25분 공덕 로터리. 돌개바람이 불더니 플라타너스 낙엽이 땅에 엎드린 사람들을 덮친다. 파란불을 기다리는 시민들이 갑자기 닥친 한파에 발을 동동 구른다. 행진 때문에 신호가 길어진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 엄동설한에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을 기느냐며 걱정한다. 굴뚝에 390일 넘게 사람이 매달려있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는다. 아직 정이 있는 사회다.
로터리에서 차량들이 신호를 대기하다 오체투지 행진을 만나자 경적 소리를 울리며 항의한다. 채 3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 경찰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지만 소용없다. 충정로에서는 외제차를 탄 젊은이가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 5분만 기다리면 되는데, 다른 사람의 아픔에 귀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들의 인생은 행복할까?
공덕동 5거리를 지난다. "야, 이 ××들아, 빨리 안 가고 뭐 하는 거야?" 한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욕을 하며 오체투지 사이를 위태롭게 질주한다. 뒤돌아보며 욕을 더 내뱉고 간다. 오토바이 배달통에 ‘요기요’라고 쓰여 있다.
우리는 소파에 누워 '요기요'와 '배달통' 앱으로 간편하게 주문하고, 빨리 오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치킨가게 사장님은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배달앱에 가입해 건당 배달료를 지급하면 된다. 약속한 시간 내에 배달하지 못하면, 일자리를 잃고 불이익을 당하는 ‘라이더’ 노동자의 분노가 오체투지 행진단으로 향한다.
배달앱 등 플랫폼을 기반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근로계약’이 아닌 ‘위탁계약’을 맺어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일한다. 누구보다 힘들게 노동하는데, 노동자가 아니고 사장님이란다. 한파와 황사가 몰아쳐도 장갑 한 켤레, 마스크 한 장 챙겨주지 않는다. 배달앱으로 떼돈을 버는 회사는 사용자의 책임을 1도 지지 않는다.
창문을 열어 빨리 가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체를 땅바닥에 포개며 대한민국의 오늘을 생각한다. 며칠 전 아현동 철거민이 "사흘간 추운 겨울을 길에서 보냈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빨리 더 빨리, 높이 더 높게, 싸고 더 싸게…. '빨리빨리'가 만든 비정한 사회다. 지렁이처럼 기어가며 느리지만 정이 있는 사회를 그려본다.
'요기요' 배달기사의 분노
순댓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마포대교를 건넌다. 매서운 강바람이 온몸을 덮친다. 날카로운 바람이 꽁꽁 싸면 몸뚱이를 파고든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무릎이 저려온다. 아침에는 얼굴이 아스팔트에 닿을까 조심했는데, 이제는 이마를 땅에 기대고 쉬고 싶은 마음이다.
전경련과 국회가 보인다. 재벌 총수와 박근혜의 불법 뒷거래를 주도했던 전경련과 대기업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세등등하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밀실야합으로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정치개혁법, 사립유치원 비리를 처벌하는 박용진 3법,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노동관계법을 깔아뭉갰다. 정말 대한민국은 촛불 이전과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오체투지 2일차 목적지인 산업은행으로 향한다. 무릎이 점점 더 아파온다. 더욱 정성껏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75미터 굴뚝. 불안과 공포가 안개처럼 자욱하고, 고독과 절망이 공기처럼 스며있는 공간. 100일 남짓 고공농성을 하고 내려온 친구들도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진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가고 있다. 400일을 앞둔 친구들이, 아프지 않고 무탈하게 내려오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고공농성이 있었다. 정부가 적극 나서서 100일이 되기 전에 땅을 밟았다. 그런데 노동자들을 적대시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고공농성을 철저히 외면했다. 한진중공업 309일, 스타케미칼 408일, 기아차비정규직 363일이라는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 기록이 모두 이명박근혜 정권 때 세워졌다. 노동자들을 말려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노동존중 사회를 표방하는 문재인 정권에서 고공농성이 400일이 되어가고 있다. 지렁이처럼 땅바닥을 기어가며 묻는다. 노동존중 정부가 '하늘감옥'에서 절규하는 노동자들을 외면한다면 지난 정부와 무엇이 다른가? 회사를 맘대로 팔아치우고, 노동자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나쁜 사장을 가만히 두고 어떻게 노동존중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올해가 가기 전에 박준호, 홍기탁이 우리 곁으로 내려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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