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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폐쇄 20년 지난 지금도 '직업병' 환자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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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폐쇄 20년 지난 지금도 '직업병' 환자 발생 [문송면과 원진레이온 25년] <2> 원진레이온 사건은 현재진행형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 사망 25주기 추모 조직위원회'(조직위)가 지난 24일 구성됐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다. 온도계에 수은을 집어넣는 작업을 하던 15세 문송면 군이 수은에 중독돼 두 달여간 치료를 받던 중 1988년 7월 2일 사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진레이온의 노동자 11명이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강제 퇴직을 당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이 두 사건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대한민국의 '산재 역사'를 다시 쓰게 된다.

문송면·원진레이온 사건 이후 노동자들은 산재에서 안전해졌는가. 조직위는 24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건이 난 지 사반세기가 지나가고 있다. 그 사이 국민 소득은 5배 이상 뛰었다. 그러나 50% 이상의 비정규·영세 노동자 계층은 아직도 세계 1위의 산재 사망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5년 전에 비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타이어 집단 사망 사태, 삼성반도체 집단 사망 사태 등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에게 일터는 안전한 곳이 아니다.

조직위는 "우리에게 안전한 미래를 선물하자"며 산재 사망 처벌 강화 특별법 제정과 원청 사업주 책임성 강화 등을 촉구했다. <프레시안>은 문송면·원진 사태를 되짚고 현실을 돌아보자는 취지로 조직위의 기고를 3차례에 걸쳐 싣는다. 조직위 참여 단체는 다음과 같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원진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산재노동자협의회, 건강한노동세상, 일과건강,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조계종노동위원회, 기독교노동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 한국산업구강보건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사회공공연구소, 사람과환경연구소, 참여연대, 인권연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한국여성단체연합, 보건의료단체연합. <편집자>

문송면과 원진레이온 25년
15세 소년, 수은 중독 사망…한국, 바뀌었나?


▲ <한겨레> 1991년 12월 17일 자에 실린 원진레이온 농성 사진. ⓒ한겨레 지면 캡처

원진레이온 직업병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한 지 벌써 25년이 지났다. 적잖은 세월이 지나서인지, 일반인들이 아직도 이황화탄소 직업병 문제를 기억하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 중요한 역사가 잊히는 것 같아 노동자 건강 문제를 연구하는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써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스러움이 든다.

과거 40여 년 동안 우리나라의 직업병 문제를 비롯한 노동자 건강권 문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진폐증과 소음성 난청만이 유일한 직업병으로 보고되었던 1960-1970년대가 있었고, 직업병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반하는 행위로 여기는 암울했던 5공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시기를 거친 후 1988년에는 15세 소년 문송면 군의 수은 중독 사건과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원진레이온의 집단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이 사회에 알려졌고, 비로소 직업병 문제가 사회 문제로 이슈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산업 보건 정책 및 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군사정권 시절이었던 1981년에 처음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되었고, 1989년과 1995년에 걸쳐 대폭적인 법 개정이 있었다. 이후 2002년에는 근골격계질환, 스트레스, 실내 공기질 등에 대한 사업주 의무 사항을 법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직업병 문제에 대한 정책 범위가 확대되기도 하였다.

노동자 스스로 '직업병' 인식하게 된 계기

이러한 변화 과정 속에 원진레이온 직업병 인정 투쟁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나라 노동 안전 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첫째, 산재 추방 운동 확대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인정 투쟁은 1980년대에 소수의 전문가와 시민단체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산재 추방 운동을 노동 단체, 시민 단체, 나아가 일반 시민들에게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90년대 들어 광주, 대구, 인천 등 주요 지방 도시에 산재 추방 운동 단체가 설립되면서 전문가들과 노동자들이 산재 추방 운동을 함께하기 시작하였다.

둘째, 노동 안전 분야의 정책적 변화와 발전을 이끌었다. 1981년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새로운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노동자의 건강권 확보보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최소한의 보장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문송면 수은 중독과 원진레이온 사건으로 인해 열악한 환경과 심각한 직업병 문제가 알려지면서 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결국 1989년 12월에 법이 개정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때 산업재해예방기금 설치,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통한 노동자 대표의 참여권 보장, 산재 예방 교육 의무화 등의 많은 부분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 이와 같은 제도 개선 투쟁은 1995년 작업 중지권과 노동자의 알 권리, 산업 의학 전문의 제도 등의 신설로 이어지게 된다.

셋째, 우리나라 직업병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직업병은 진폐증과 소음성 난청이었다(특히 진폐증 비중이 90% 이상). 이 두 가지 직업병이 전체 직업병의 99% 이상을 차지하였고, 기타 직업병은 극소수(연간 10명 미만)에 불과했다. 이러한 왜곡된 직업병 통계가 문송면 수은 중독과 원진레이온 사건들을 계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문송면 수은 중독 사건은 중금속 중독이었고, 원진레이온은 유기용제 중독인 관계로 이 분야에 대한 환자 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1990년 중반 이후 급증하기 시작한 뇌심혈관계질환과 2000년대 들어 근골격계질환자의 폭발적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넷째, 노동조합이 비로소 노동보건 활동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노동조합에 노동안전부가 조직되어 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담당 부서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1988년 문송면 군의 죽음과 원진레이온 사례가 이슈화되면서 노동조합이 건강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시기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지만 이 두 사건으로 인해 노동조합이 직업병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고, 노동자 스스로 직업병을 인식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다.

다섯째. 일반 시민들이 환경병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에는 공장에서 발생되는 유해물질로 인한 피해를 담장 안에서는 직업병, 담장 밖에서는 환경병으로 인식되어 왔었다. 그러나 원진레이온 직업병 문제가 알려지고, 또한 1989년 상봉동에 위치한 연탄공장으로부터 피해를 본 지역 주민의 진폐증 소송이 승소하면서 이러한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원진레이온 공장 폐쇄한 지 20년, 아직도 '직업병' 환자 발생

이와 같이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은 전문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피해자들이 함께하면서 일회적인 투쟁이 아니라 지속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우리나라 산업 보건의 역사를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원진레이온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공장이 폐쇄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직업병 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원진레이온과 같은 심각한 직업병 문제는 그 대상이 반도체 공장으로, 다양한 직업성암 문제로, 그리고 또 다른 노동 현장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역사를 교훈 삼는 것은 똑같은 불행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25년 전에 시작된 원진레이온의 투쟁 사례와 교훈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노동자 건강 문제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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