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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자는 양심이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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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자는 양심이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 [기고]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병역거부와 양심의 개별성

오래전 유엔 인권이사회(현재는 인권이사회)에 갔을 때다. 한국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한국의 병역 거부자들의 인권 문제를 알리기 위해 왔다. 그들을 돕기 위해 평소 교류하던 국제 인권 단체들과 연락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단체들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게 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이때 작지만 꽤 유명한 '좌파' 성향의 단체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가 거부당하는 뜻밖의 경험을 했다. 좌파이고 반전 운동을 열심히 하는 단체였기에 당연히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단호하게 자기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답변했다. 상당히 당혹스러운 일이라 그들에게 왜 그런지에 대해 물었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는 인민의 권리(people's right)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individual right)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좌파 단체의 한계인가 싶어서 어이가 없었다. 반전 운동도 열심히 하는 단체가 병역 거부 운동을 개인의 권리라고 생각한다는 게 황당했었다. 그러다 문득 권리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면 뭔가 싶어서 그들과 그들이 권리를 개인의 권리와 인민의 권리로 나누는 것과 통상적으로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인권을 구분하는 게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 제법 길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투표를 하는 권리는 개인의 권리인가, 아니면 인민의 권리인가? 이것에 대해 그들은 자유권의 영역이지만 그것은 인민의 권리라고 했다. 인민으로서의 개인이 행사하는 정치적 권리가 투표이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과 의약품에 대한 접근 역시 인민의 권리이다. 그것은 인민으로서 개인들이 모두가 누려야 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이 이야기하는 인민의 권리란 정치공동체 안에서 그 구성원들이 누려야하는 정치적 권리와 경제사회적 권리를 합친 것이었다.

그럼 양심적 병역 거부는 왜 인민의 권리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라고 분류해야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그들이 정확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 판단이 개개인에게 맡겨진 것이기에 인민의 권리라고 볼 수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들도 양심적 병역 거부를 지지하지만 인민의 권리를 중심에 둔 자기들이 할 일은 아니고 다른 자유주의적 성향의 단체들이 하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답변은 충분하지 못했지만, 이들과의 대화는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이 이후에 나는 이들이 왜 양심적 병역 거부를 개인의 권리라고 말한 것인지를 서구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공부하면서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근대 사회'로서 한국 사회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보였다. 바로 개별성에 대한 감각이다.

개별적인 것으로서의 양심 혹은 신념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련해서 한국사회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것이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양심적이면 군대에다녀온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이냐는 질문이다. 한국어에서 '양심'이라는 말은 언제나 도덕 이상을 말한다. 사람됨의 근본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양심이 있다, 없다는 것은 도덕적인 의미와 가치를 넘어서 그 사람의 사람됨의 근본 그 자체를 의미한다. 양심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며, 인간에 반하는 존재라는 의미이기에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인 말이다. 한국어에서 양심이라는 말은 개개인을 넘어서 사람됨의 우주론적인 근본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 안에서 애초부터 영어의 "conscience"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양심이 아니라 신념이라는 말을 쓰는 게 낫지 않냐는 말이 있었다. 의미론적으로 보더라도 개개인이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내밀한 앎과 믿음에 따른다는 것에 더 부합되는 게 양심보다는 신념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양심이 우주론적 근원을 가르키는 말이라면 신념이라고 했을 때 보다 더 원래 의미인 '개별성'을 강조하는 말이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대를 거부한 저 좌파단체의 말을 빌려서 본다면 양심적 병역 거부의 가장 정확한 번역은 아마 '개인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가 될 것이다. 신념이라는 말에 이미 모든 신념은 개별적인 것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만 양심과 신념이 사회적 도덕/가치의 의미를 강하게 가진 한국 사회에서 그 개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양심'을 '신념'으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앞에 '개인적'이라는 말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사태가 바뀔 것 같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신념으로 바꾼다고 말을 하자마자 바로 돌아온 반응이 그럼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신념이 없냐는 반발이었다. 군대를 간 것도 자신의 신념에 비추어 옳다고 생각해서 간 것이고 가지 않은 것도 그 신념에 비추어 옳은 것을 한 것이라고 설명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양심이라고 불렀을 때랑 똑같았다.

개인적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는 존재냐는 반발이 이어졌다. 뭐라고 해명하고 무엇을 붙이건 간에 반발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한국 사회의 특성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이 바로 개별성에 대한 감각이다. 양심이라고 부르건 신념이라고 부르건, 가치에 대한 개별성, 개별성의 가치에 근거하지 않으면 뭐라고 이름을 붙이더라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신념과 양심의 개별성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신념과 양심은 이분법적인 것이 된다. 한쪽에 신념/양심이 있으면 그것에 반하는 다른 쪽은 신념/양심이 없는 것이 된다. 그쪽은 그쪽의 양심/신념에 비추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고 다른 쪽은 또 그 반대의 양심과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념과 양심이 있다/없다의 문제로 판단되는 한 이것은 존재 전체의 가치를 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별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념의 차이는 서로 반(反)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이다. (물론 보편성에 어긋나는 신념과 양심이 있다.) 그렇기에 신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신념/양심과의 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비추어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만이 문제가 된다. 소위 말하는 진정성이 문제인 것이다. 그럼 그것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는 누구만이 알 수 있을까? 자기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알 도리가 없다. 그렇기에 이 신념의 진정성은 양심의 문제가 된다. 신념과 양심이 하나로 묶이는 이유다.

신념의 진전성이 양심의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신념은 철저하게 개별적인 것이다. 개별성의 순환을 이룬다. 이 양심, 즉 진정성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다. 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도 이 양심의 개별성을 훼손할 수 없다. 사람마다 신념이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신념의 진정성은 그 개인 이외의 다른 누구도 알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것, 이 원리 위에 세워진 것이 근대 사회이고 이것을 존중받고 실현시키는 존재가 개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소위 '좌파' 단체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민'의 권리로서의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인민과는 무관한 그저 개인의 권리이며 자신들은 그런 개인의 권리에는 '무관심'하다고 말한 것이다. '사회'주의자로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이 자유주의/개인주의 너머의 사회이며 인민으로서의 개인이기 때문이다.

누가 양심을 거는 사람인가?

이 점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그럼 군대에 다녀온 사람은 양심이 없냐는 반발은 정확히 전도/도착된 질문이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에게 누구도 그것이 너의 신념이었느냐고 묻지 않는다. 아주 강한 소신을 가지고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대부분 가야하니까 가는 것이다. 여기서 신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념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양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념의 진정성을 물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군대에 다녀오는 대다수는 양심이 없는 게 아니라, 군대를 양심의 문제로 환원하여 제기할 이유 자체가 없다.

반대로 병역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사람이다. 병역 거부를 하기 때문에 이들이 양심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은 자기의 신념의 진정성에 대해 끊임없이 물으며 만일 그것이 진정한 것이 아니었다면 스스로 양심없는 자가 되어버리는 '도박'을 감행하는 것이다. 양심을 거는 자는 군대를 가는 사람이 아니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이 '도박'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은 사회나 남이 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고 혹 존재한다면 신이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그 개인의 신념에 대한 양심적 행위였는지 아니면 신념도 아닌 것을 기만한 비양심적 행위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다. 다른 사람과 사회는 이 판단으로부터는 물러나야 한다. 이것이 개인이 존재할 수 있고, 개인을 보호하고, 개인을 존중하는 사회다.

그러하면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의 신념과 양심에 대해 무관심해져야 한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하는데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가져서도 안된다. 대신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그것이 그 개인의 양심적인 행위이건 비양심적인 기만이건 간에 군대를 가는 것과 같은 정도의 의무를 수행하게 하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 딱 그만큼 해야 한다.

나는 한국 사회가 병역 거부자들이 제기한 문제 제기의 방향을 병역거부자들이 아니라 한국사회로 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는 개인'주의'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없어서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개인의 핵심에 양심과 신념의 개별성이 있다. 양심과 신념이 집단적인 것인 한, 그리고 다를 여지가 들어설 수 없는 한, 그 사회에 스스로를 점검하는 존재로서의 개인은 만들어지지도 않고 존재할 수 없다.

병역거부자들은 바로 이런 한국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다. 신념과 양심의 개별성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더 나아가 신념과 양심을 개별적인 것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인식론적인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병역 거부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다. 병역 거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양심과 신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양심과 신념이 개별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될 때 우리 사회에 비로소 개인이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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