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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심주의는 식민주의에 대한 면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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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심주의는 식민주의에 대한 면죄부 [인문견문록] 제임스 블로트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새해가 되어 책장에 묵혀두었던 카렌 암스트롱의 책 <축의 시대>(정영목 옮김, 교양인 펴냄)를 펼쳤다.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있었지만, 읽지 못하고 있던 책이었다. 수녀 출신의 저명한 종교연구자 카렌 암스트롱이 쓴 책이다. 4000년 전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책을 읽던 중 불편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암스트롱이 고대 중국을 설명하면서 쓴 문장이다. "상나라는 평등한 사회가 아니었다. 위계와 서열을 몹시 따졌으며 이것은 이후 중국 문명의 특징이 된다." 상나라(商, 기원전 1600년경~1046년경)를 설명하면서 불평등한 국가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신분제적 불평등이 이후 수천 년간 중국의 특징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수천 년 전에 평등한 사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중국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만 중국인들의 몸속에 깊게 박혀 있는 '불평등 DNA'를 논하는 것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귀족은 농민을 인간으로 여기지도 않았지만 야만인들과 마찬가지로 농민도 중국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3000년 전 사회에서 민초들이 존중받았던 사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항목에만 이런 혹독한 평가를 삽입해 놓았다.

암스트롱의 황당한 생각의 백미(白眉)는 다음 문장이다. 동물들의 모양을 본뜬 상나라 청동제기들에 대한 칭찬에 뒤이어 나오는 문장이다. "그러나 그들은(상나라인. 필자 주) 그렇게 꼼꼼하게 관찰하던 짐승을 도살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왕의 사냥에서는 야생동물을 무지막지하게 죽였으며", "상나라 종교에는 잔혹 행위와 폭력이 있었다". 고대에는 채식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오늘의 잣대로 고대의 동물도살을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대 종교에서는 잔인한 희생제의가 동반되는 것이 흔했다. 이런 사실은 종교연구의 슈퍼스타 르네 지라르가 이미 밝혀 놓았다. 암스트롱은 중국 고대를 설명하면서 유독 무리수를 둔다. 왜일까? 탁월한 종교학자이자 사회활동가인 그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현대인은 자신이 유럽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사이비 종교인조차도 가끔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회의한다. 그런데 멀쩡한 지식인들이 궁극적으로는 식민주의와 연결되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 유럽중심주의는 종교 미신과 달리 유수한 대학의 석학들이 만든 이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암스트롱의 책을 접고 다른 책을 펼쳤다. 유럽중심주의를 주조하는데 기여한 학자들을 발가벗겨 놓고 지적으로 분해하는 제임스 M. 블로트(James M. Blaut)의 책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박광식 옮김, 푸른숲 펴냄)를 읽기 시작했다.

▲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한다>(제임스 M. 블로트 지음, 박광식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유럽중심주의는 계몽된 지식인의 교양으로 체득되어 있기 때문에 특정한 한 사람을 논파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문화지리학자인 제임스 블로트(James M. Blaut)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유럽중심주의에 영향을 준 역사연구자 8인을 해부한다. 블로트가 다루는 여덟 사람에는 사회학의 태두 베버, 중세기술연구자인 린 화이트 주니어,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로버트 브레너, 근세 유럽 농업사 연구자 에릭 존스, 역사사회학자 마이클 만, 정치학자 존 홀, 생태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 경제사가 데이비드 랜디스를 포함한다. 책에 거론된 학자들 중 가장 중요한 몇 사람의 이론을 골라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무엇보다 책의 맨 첫 장은 막스 베버가 차지하고 있다. 막스 베버라면 근대 사회학의 태두이자 인문사회학계의 파천황과 같은 존재다. 책에서 베버를 발견하고 어리둥절할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 소개되는 다른 학자들은 자신들 주장의 상당수를 베버의 권위를 빌려와 정당화 하려 한다. 즉, 현대적 의미의 유럽중심주의는 베버로부터 시작한다.

베버가 살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제국주의가 노골화되던 시대였다. 제국주의는 제국주의를 정당화해주는 새로운 관념적 방패가 필요했다. 제정신으로 약소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도륙하는 행위를 옹호하기란 어려웠다. 강대국의 확장을 사악한 욕망이 아닌 합리성의 결과로 미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헤겔이 세계역사를 자유의 확대과정으로 이해했듯이 베버는 '합리성'의 확장으로 역사를 이해했다. 베버가 합리성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 생각한 서구 자본주의사회는 합리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블로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베버는 근대 유럽 사회는 모든 사회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사회이며 동시에 인간의 의식적 선택의 산물 곧 인간의지의 산물이라고 단정 지었다."

베버의 역사 서술은 '터널식 역사관'이었다. 차를 타고 가다 터널 안으로 진입하면 주위는 깜깜해지고 출구 하나만 환하게 보인다. 복합적 고려 대신 하나에만 집중해서 현상과 사건을 해명하는 것을 터널식 역사관이라고 한다. 유럽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해명하는 것이 베버의 주요 목적이었는데, 베버는 유럽에만 존재했던 '합리성'을 자본주의를 촉발한 원인으로 보았다. 베버에게 유럽의 합리성은 유럽만의 내재적 특성이었고 비유럽의 비합리성은 그들의 특성이었다. 베버가 중국인의 특질을 설명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눈에 띌 정도로 성질이 없고", "관습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며", "철저히 순응적이며", "비할 데 없이 부정직하고". 익숙한 표현들이다.

베버의 이론 중에서 영향력의 측면에서 무엇보다 컸던 것은 환경결정론과 이에 따른 동양적 전제주의 가설이었다. 이집트와 아시아는 비가 부족했다. 비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개농업을 시작했다. 관개시설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일사불란하게 동원하는 과정에서 전제주의가 뿌리내렸다. 이런 생각은 베버 이전에 이미 넓게 퍼져있었다. 베버는 이 아이디어를 채택해 '동양적 전제주의'라는 가설을 정립한다. 베버는 중국의 국가가 합리성을 결여한 원인을 동양적 전제주의에서 찾고 있다. 중국과 달리 유럽에서 합리적 국가가 출현한 이유를 베버는 이렇게 설명한다. "관개 체계가 필요했던 점이 근동지역이 (그리스와는) 그토록 다르게 발전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이 필요 때문에 운하를 건설하고 호수와 하천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일에 도시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인데 이 과정들 하나하나가 결국 전일적인 관료제가 생겨나도록 강제했던 것이다. 이런 식의 발전에는 불가역적인 성격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개인의 예속도 이루어졌다."

동양적 전제주의라는 개념을 근거로 '개인이 예속된 동양'과 '개인이 자유로운 서양'을 대비시킨다. 과거 수백 년, 수천 년 전에 발생한 특정 문화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베버의 생각은 지독히 정태적이다. 베버 이론의 내용보다도 이런 정태적 사고방식이 후대의 학자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수백 년 전 특정한 요인 하나가 복잡다기한 현재 문제의 원인이라는 이런 식의 설명을 후배 학자들도 베버의 유명세에 기대어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다.

블로트에 따르면, 베버가 말하는 동양적 전제주의 가설에 맞는 지역은 단 한 군데도 없다고 한다. 동양의 많은 지역에서도 천수농이 일반적이었고 관개농업도 불가피했다기보다는 더 많은 생산을 얻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라고, 블로트는 말한다. "관개는 하나의 문화적 양상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체제를 만들어낸 원인이 아니라 사회체제가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동양적 전제주의 가설은 서구의 제국주의에 면죄부를 제공했다. 자유를 상실한 불쌍한 폭군에게 고통받는 것보다 서구 식민지하에서 법적 보호를 받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농촌으로부터 뿌리 뽑혀 삶의 근거가 사라진 채 극단적인 장시간과 실업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당시 서구 하층민중들의 삶이 식민지 이전 비서구 민중들의 삶보다 나았다고 볼 수 있을까?

베버는 종교와 가치관을 사회발전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보았다. 서구가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원인도 자본주의 친화적인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의 가치관에 있었다. 직업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자본주의는 싹 틀 수 있었다. 베버의 기독교 미화는 식민주의의 핵심요소였다.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만든 진정한 원동력이라는 이 소설은 오랫동안 신봉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경제가 발전하면서 '유교 자본주의'라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되었다. 인도 경제가 비약적으로 치고 올라오면서 사회발전의 장애물로만 치부되던 힌두교에 대한 조롱도 차츰 수그러들고 있다. 종교는 사회의 한 요소이지 유일한 동력은 아닌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했던 근대화 이론은 비(非)서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구가 갔던 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구가 밟아간 과정을 고스란히 다시금 반복하기 위해서 서구의 가치관, 서구의 종교, 서구의 정치시스템을 그대로 이식해야 했다. 근대화 이론은 비서구 전통에 대한 완벽한 부정이었다. 근대화 이론이 이론적으로 가장 많이 기댄 언덕이 베버였다. 왜? 베버에 따르면 비서구는 당연히 전제주의로 고통받으며 기독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베버가 가치관과 종교를 토대로 유럽의 본질적 우월성을 주장했다면 과학기술의 관점에서 유럽의 탁월성을 설명한 학자가 있다. 중세사 연구자인 린 화이트 주니어(Lynn White Jr)였다. 화이트는 1962년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강일휴 옮김, 지식의풍경 펴냄)라는 책 한 권으로 지식계의 스타가 되었다. 베버식 종교결정론이나 인종주의로 유럽의 뛰어남을 설득하는 것이 머쓱해질 즈음 나타난 화이트의 기술결정론은 서구 지식 대중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화이트의 역사서술은 의외로 간단한 구조다. 중세 시기 유럽은 혁신적 발명품들을 만들어냈고, 이런 혁신은 중세 농업혁명을 촉발했다. 농업의 혁신은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달시켰고 이런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화이트의 주장이다. 화이트는 대표적 발명으로, 등자와 쟁기를 들고 있다. 등자 덕분에 효율적 형태의 기마전이 가능해졌고, 결국 기마전을 전문으로 수행하는 중세 기사단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기사단이 지방 영주가 되면서 봉건제가 탄생했다. 봉건제는 자본주의의 예비단계였다. 화이트는 또 다른 혁신으로 무거운 쟁기의 발명을 거론한다.

쟁기의 혁신은 농업혁명을 가져왔다. 쟁기 덕분에 농업혁명은 중세 유럽에서만 일어났다. 8세기 무렵 퍼져나간 무거운 쟁기는 특히 북유럽에서 농업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화이트는 쟁기의 혁신이 엄청난 인구증가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쟁기의 효율적 사용에 따라 생산성이 달라졌으므로, 개방경지 경작제를 토대로 농민들 간 협업공동체가 생겨났다. 이 협업공동체가 이후 장원제로 이행하게 된다. 화이트는 장원경제의 본질을 "넓은 개방경지를 공동으로 이용하고 공동의 의사결정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화이트가 전개하는 논리를 따르면 결국 쟁기 하나가 이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화이트는 말굴레를 통한 마력(馬力)의 발견을 높이 평가한다. 9세기경 유럽에서 완성된 말굴레를 통해 말이 소를 대체하면서 곡물 수송을 획기적으로 전환시켰다고 주장한다. 운송 수단으로서 말이 소보다 더 효율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화이트는 단순한 사실로 출발해 무리수를 둔다. 말 수송으로 상업이 번창하게 되고 촌락은 도시로 확대되었다. 도시는 외부와의 상거래를 더욱 활발히 하게 되면서 '도시적 삶'이 싹트기 시작했다. 말굴레 하나가 이런 변화를 가져왔다고, 화이트는 이야기하고 있다.

발명품 한두 가지가 거대한 사회구조의 변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하는 화이트는 인류 역사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기술발전이 왜 유럽에서만 발생했는지를 묻고 스스로 답한다. 화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생태계는 상당 부분 우리가 우리의 자연과 우리의 운명에 관해 품고 있는 신념에 의해-다시 말하면 종교에 의해-상태가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화이트가 말하는 종교는 기독교만을 의미한다. 화이트는 기독교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진보에 대한 믿음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이다. "우리의 과학과 기술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식 이해 위에서 발달했다." 자연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와 달리 유럽인은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유럽에서 혁신이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기술결정론자로 출발한 화이트는 결국 종교결정론으로 빠진다.

블로트는 무거운 쟁기가 유럽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말굴레의 경우도 유라시아에서 훨씬 오래전부터 사용되고 있었거니와 말은 소에 비교해 유지비용이 훨씬 많이 들었다. 말 사료용 건초를 얻기 위해 경작지를 따로 떼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세 유럽의 삼포제와 콩 재배의 확대 덕분에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는 화이트의 주장은 거의 학문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블로트의 평가다. 화이트는 왜 논리적 무리수를 두는 것일까? 결국 유럽은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욕심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중심주의가 서구의 식민주의에 면죄부를 주는 프레임이기에 유럽중심주의 학자들의 대부분이 보수적 연구자들이지만, 특이하게 로버트 브레너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다. 평등을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어떻게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자로 평가받게 된 것일까? 브레너의 등장은 진보 쪽보다 보수 쪽 학자들을 열광시켰다. 어떤 내용이기에 앨런 맥팔레인 같은 학자는 브레너 덕분에 프랑크, 스위지, 월러스틴의 이론이 파탄 났다고 들떴을까?

브레너에 앞선 경제사가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중세 번영기 동안 인구가 급팽창하게 되었고 인구 팽창은 자원 부족을 가져왔다. 마침 이때 찾아든 흑사병으로, 14세기 중반 유럽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 이용할 노동력이 너무 줄어든 나머지 지주들은 농노를 해방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후 농민들은 신분이 자유로운 차지농이 되었고, 지대를 화폐로 내게 된다. 화폐의 보편화는 상업경제를 발전시키게 된다. 상업경제는 또한 도시를 발전시켰다. 도시는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 기존 이론을 반박하면서 브레너는 농노 해방의 주된 원인은 농민들의 계급투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저런 사회적 변화 때문에 저절로 농노 해방이 된 것이 아니라, 농민층의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계급투쟁이 해방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왜 농민들의 계급투쟁이 중요한 것일까? 유럽, 특히 잉글랜드 농촌에서의 계급투쟁이 자본주의를 촉발했다고 한다면 식민지 착취로 발생한 잉여 덕분에 자본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혐의를 털어버릴 수가 있게 된다. 브레너의 원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식민주의에 면죄부를 제공하는 이론이다.

브레너의 주장은 이렇다. 14세기 잉글랜드 농민들은 투쟁을 통해 농노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손에 넣었다. 신분상의 자유는 토지소유에도 영향을 끼쳐 농민층이 분화되었다. 약간의 땅을 가진 농민은 자급농이 되고, 토지가 없던 이는 농업노동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지주/영주로부터 토지를 임대해 대규모 농업을 시작했다. 이들이 차지농(yeoman)으로 부를 축적해가면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가 싹텄다. 신분의 구속에서 해방된 농민들은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되고 더 높은 임금을 찾아 이리저리 이동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사회적 변화가 자본주의를 가져오게 한 동력이다. 브레너는 프랑스와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농노해방까지만 성공했고, 토지의 완전한 보유를 획득하는 것에는 실패했다고 본다. 이런 실패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로 귀결된다. 모두가 고만고만한 소농이 된 프랑스와 달리 부농인 차지농이 등장해 기존 농업경영을 자본주의적으로 변모시켰다. 이들은 지주로부터 빌린 경작지를 이용해 노동자를 고용하고 농업경영자가 되었다. 이들이 '농업 자본주의' 실현자들이었다. 초기자본주의는 농업 자본주의였다.

서구 지식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애초에 식민지지배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유럽에서 출현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와 동전의 양면이었다. 식민주의는 서구 지식인에게 원죄와 같았다. 만약 자본주의의 탄생이 식민주의와 분리되면 원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유럽의 번영이 제3세계에 대한 착취와 별개의 사건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브레너는 이 작업을 수행했다.

유럽만 자본주의적 발전, '산업 자본주의'를 거쳐 제국까지 경영했다. 그러나 나머지 지역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블로트는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서유럽의 발전은 그저 아메리카에 가까웠다는 '근접성'에 기인한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금광, 은광, 플랜테이션으로부터 부가 흘러들어왔고, 이들 지역의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 봉건주의를 완전히 해체하고 다른 지역의 초기 자본가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는 유럽 합리성의 결과나 농촌 지역 계급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블로트의 단언이다. "확신하건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있는 이 초기 과정이 유럽에서 일련의 내적 변화들을 불러일으켰고, 이 변화들은 17세기의 정치적 전변으로 이어졌고, 다시 최종적으로 산업혁명과 산업 자본주의를 낳았다. 자본주의의 수립은 세계적 규모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세계적 규모란, 세계적 착취를 의미한다. 인류 역사에서 수천만 명이 노예가 된 사실과 자본주의의 출현은 연동된다.

블로트가 소개하는 학자들의 주장들은 결국 하나의 명제로 귀결된다. "자본주의는 역사의 발전이다"라는 것이다. 베버가 개신교로부터 '합리성'을 추출하고자 애쓴 의도는 자본주의라는 발전을 유럽의 내재적 논리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쟁기와 말굴레가 자본주의를 촉발했다는 화이트도 자본주의가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축복이라고 전제한 뒤, 유럽만 축복을 받게 된 원인에 대해서 여러 학자가 자신들의 이론을 제시한다.

육체적 쾌락에만 탐닉해 아시아인은 인구통제에 실패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데 실패했다는 에릭 존스, 기독교라는 단일 종교 아래 있었기에 서로를 신뢰할 수 있어서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고 말하는 마이클 만, 제국에 신음하던 중국과 달리 경제에 개입하지 않는 정치 권력 덕분에 자본주의가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존 홀, 지중해의 환경적 우월성에 푹 빠져 있는 환경결정론자 다이아몬드, 자연환경도 좋은데 기독교까지 있어서 유럽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랜디스, 이들 모두의 주장에는 자본주의란 좋은 것이라는 암묵적 전제가 깔려 있다. 이들의 생각은 제3세계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 역사학의 거목 김용섭이 일평생 연구한 것은 조선 후기에 이미 잉글랜드 차지농과 비슷한 계층이 조선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었다. 김용섭은 차지농에 해당하는 조선의 경영형 부농층을 봉건적 생산관계를 타도하고 새로운 생산양식을 수립할 잠재력을 가진 사회집단으로 보았다. 외부의 압력이 없었다면, 우리의 힘으로 자본주의를 달성했을 것이라는 내재적 발전론이다. 탁월한 연구자 김용섭이 떨쳐버리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적 맹아를 가지고 있어야만 좋은 사회라는 선입견이다. 자본주의는 아메리카 발견이 초래한 역사적 돌출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역사적 진보라는 선입견은 상식처럼 존재한다. 중국학 연구자 이인호 한양대 ERICA 교수의 책 <중국-이것이 중국이다>를 펼쳐보자. '유가사상의 역사적 득실'이란 제목 아래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유가사상에서는 법치가 아니라 덕치를 주장하기 때문에 통치자의 도덕적 수양을 우선했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자본주의의 발달을 저해하는 이러한 법치 관념의 부재는 중국이 근대까지 근대화되지 못했던 걸림돌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주장은 BBC가 제작한 영국 드라마 <배니쉬드(Banished)>를 한 편만 봐도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18세기 영국을 무대로, 사소한 죄로 호주로 떠나야 했던 죄수 유배자들을 다룬 드라마다. 소유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은 사소한 잘못 하나에도 유배를 떠나야 했다. 생명권은 없고, 소유권이 존중받던 사회였다. 유교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지 못했다는 탄식이 태연히 책에 적힐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는 좋은 것인데, (중국을 포함한) 우리는 왜 빨리 못했느냐라는 잘못된 자책감에서 기인한다.

블로트 책의 원제목은 '8인의 역사학자들(Eight Eurocentric Historians)'이다. 식민지 착취와 상관없이 자본주의가 독자적으로 출현했다는 명제를 끈질기게 붙잡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유럽중심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중심주의가 식민주의에 대한 면죄부라는 것을 이들이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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