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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생일>을 보자, 4월엔 맘껏 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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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생일>을 보자, 4월엔 맘껏 울자 [리뷰] 여기,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가 있다
슬픔은 때때로 세탁기 앞에 쪼그려 앉는다. 때 묻은 일상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몸을 빨래처럼 웅크린다. 그렇게 일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낀다. 위안을 얻거나 상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다. 상처의 무게에 짓눌린 순간, 살아갈 이유의 벽돌 하나를 시간의 틈새 안으로 간신히 밀어 넣는다.

영화 <생일>(이종언 감독)은 소중한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니, 살아남은 가족들은 아직 수호를 떠나보내지도 못한다. 순남(전도연)이 수호의 생일 모임을 꺼리는 이유다. 모임으로 떠남을 기정사실화하기 싫은 것이다. 점멸등에서 수호의 귀환을 보고, 수호의 옷을 사고, 토라진 동생 예솔을 윽박지른다. 순간순간 수호의 부재를 참을 수 없다. 순남은 완강하지만, 이미 깨어진 완강함이다. 사람은 심장이 깨져서 죽는다.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으깨어진 심장은 심지어 그 아이와 운명을 같이 하고 싶을 정도로 위태롭다. 순남을 지탱하는 유일한 것은 반복할 일상과 살아남은 가족이다.

감독은 순남의 한복판으로 직접 들어가기가 두려워 정일(설경구)을 불러왔다. 베트남에서 사업하던 정일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들의 죽음을 지키지 못했다. 2년 혹은 3년 뒤에 돌아온 정일은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주변인이다. 그의 쭈뼛거림은 거리 두기다. 그는 슬픔의 중앙을 맴돈다. 관객의 시선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일의 어깨를 타고 순남에게 향한다. 정일은 세월에게 두들겨 맞은 남자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떠났다가 정작 아들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우리 시대의 아버지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버지의 후회는 조용하지만 뼈아프다. 낚싯대로 건져 올린 건 물고기가 아니라 회한과 그리움이다.

하지만 정일은 무너질 수 없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무너지기 직전의 순남이 기댈 등이 돼야 한다. 아득한 오빠의 부재를 감당해야 할 예솔의 마음을 꼭 안아줘야 한다. 그러려면 조심스러워야 한다. 부드러워야 한다. 존재의 거처를 가득 채운 절망을 조금씩 비워야 한다. 후회조차 사치인 순간이 있다. 돈을 벌어오겠다고 큰소리칠 수도 없다. 그러기엔 너무 절박하지 않은가.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상처를 가진 부모라면 대체로 그럴 것이다. 그들은 깨어지기 쉬운 관계의 살얼음판 위에서 최선을 다한다. 단지 최선을 다한다. 우리가 순남의 모습에서, 정일의 모습에서 문득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이유다.

▲ 영화 <생일> 스틸컷.

이 영화가 호명한 것은 세월호라는 거대한 이름이 아니다. 단지 상징이나 주장이 아니다. 304명의 희생에 304개의 사건이, 304개의 생명이, 304개의 우주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영화다. 일상을 통해 유가족이라는 이름의 상징을 넘어 순남을, 정일을, 예솔을, 그리고 순남의 오열을 견디는 이웃의 실체를 보여준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켄 로치 감독)가 보여준 자존심처럼 제도나 체제에 부속된 피동적 인간이 아니라 여전히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들)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주장 너머에 삶이 있음을, 슬픔이라는 단어 이전에 그 단어조차 담을 수 없는 일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세월호 이야기를 가장 세월호답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해 역설적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과 공감의 폭과 깊이를 확장한다. 이것이야말로 <생일>이 빛나는 이유다. 전도연과 설경구는 마치 손에 잡힐 듯한 감정 연기를 보여준다. 오열의 순간에도 여백을 놓아둘 줄 아는 두 배우의 빛나는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를 놓치는 것은 아깝다.

이 영화는 슬프다. 나는 시사회를 보면서 맘껏 울었다. 세월호라는 컨텍스트(context) 때문에 두려움을 가질 관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일>은 가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끝날 때쯤 작은 위로의 물결을 만날 수 있다. 그 위로는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전하는 위로가 아니다. 덮어 두었던 깊은 상처를 조금씩 어루만져주게 만드는 그런 위로다.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위로다. 30분 롱테이크로 찍었다는 생일 장면은 영화적으로도 놓칠 수 없는 명장면이다. 화면은 선명하지만 우리는 흐릿해질 것이다. 눈물의 필터를 통해 관객이 바라보게 될 수호의 생일모임은, 순남의 가족이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우리가 흘린 눈물은 잠시 밀쳐두었던 슬픔을 와락 안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작은 힘을 주는 그런 눈물일 것이다. 그러니 맘껏 울어도 된다.

다시 일상이다. 세탁기 앞에 쪼그려 앉았던 슬픔이 부시시 일어나, 남은 가족들의 공간에 햇살을 드리운다. 햇볕 한 줌 손에 쥔 가족, 그 사라질 수 없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수호의 생일을 계기로 서로를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된 가족은 어제와는 조금 다른 오늘을 맞이한다. 내일은 더 그렇게 될까? 이 영화가 그려낸 단면이 그것까지 장담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우리의 삶이, 살아남은 가족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워주기엔 충분하다. 빛바랜 팽목항의 리본처럼, 조금씩 얇아진 기억의 시간, 세월호 5주기에 영화를 보며 맘껏 우는 것도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유가족들을 생각하며 나아가 우리 자신을 위로할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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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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