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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세대의 갈림길, 건물주 편인가? 영세자영업자 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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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86세대의 갈림길, 건물주 편인가? 영세자영업자 편인가? [기자의 눈] 김의겸 '부동산 논란'을 보면서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왜 잇따라 패착을 둘까. "반민특위로 국민분열" 발언에 이어, 지난 27일에는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고 했다. 일제 강점기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이 1948년 월북해서 북한 노동상 등을 지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은 억지다. 김원봉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실각 이후 감옥에서 자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북한 측이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향후 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 진상 규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분명한 건, 김원봉이 1956년 8월 종파 사건 이후 권력에 밀려났다는 점이다. 8월 종파 사건 이후 1인 지배 체제를 완성한 김일성 측은 김원봉에게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명을 붙였다고 한다. 요컨대 김원봉은 남에선 친일파에게 모욕당했고, 북에선 김일성에게 버림받았다.

나 의원의 역사 관련 발언이 어리석은 건, 단지 고증 오류 때문이 아니다. 불과 5년 전만해도, 김원봉과 의열단은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만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2015년 영화 <암살>이 흥행몰이를 하고, 이듬해 영화 <밀정>이 개봉하면서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름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김원봉에게 근거 없는 색깔론을 덧씌우는 발언은, 고립을 자초하는 짓이다. 나 의원의 발언은 그래서 어리석었다.

자기보호 본능과 덜 발달한 시대 감각

이는 지식 및 지능과는 다른 차원이다. 판사 출신인 나 의원은 똑똑한 사람이다. 그러나 시대를 읽는 감각은, 반공 교육 받던 유년기에서 발달이 멈췄다. 지식, 지능과 시대감각의 불균형. 사회건 개인이건, 문제는 늘 불균형이다.

엘리트 가운데서, 단지 시험만 잘 친 게 아니라 실제로 총명하고 유능한 이들 가운데서도 나 의원 같은 사람이 흔하다. 다만 그들은 정치를 하지 않아서, 눈에 안 띌 뿐이다. 비슷한 이들끼리 대화하고, 협력하고, 사귀고, 결혼한다. 그 범위 밖에 있는 이들은 정물화의 배경, 혹은 '투명인간'이다.

나 의원을 포함한 이 나라 엘리트들은 왜 시대감각이 유년기 수준일까. '자기보호 본능'이라는 설명이 있다. 다들 알다시피, 나 의원이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는 대학생이 한 눈 팔면 죽는 시대였다. 비유가 아닌 진짜 죽음이다. 대학을 마치고 좋은 직장을 잡아서 순탄하게 살 수 있는 궤도가 있다. 옆길로 빠지면, 수배와 구속, 고문과 죽음이 기다린다.

많은 이들이 삶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틀어 고난을 자초했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은 궤도를 그냥 따라갔다. '자기보호 본능'에 충실했다. '옆을 돌아보면 죽는다'라는 내면의 명령을 따랐다.

그러자면 시대를 살피는 감각이 둔한 쪽이 편했다. 감각이 무디게끔 방치하고, 감각 신호를 외면하는 논리를 스스로 개발했다. 진보적인 이념, 비판적인 역사 인식 등에 대해선 스스로 벽을 치는 버릇을 들였다.

나 의원 유형의 엘리트 가운데 유독 역사의 상처에 냉소적인 이들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감각을 포기한 대가로 집중력을 얻었다.

이제 그들은 옆을 돌아봐도 죽지 않는다. 아니, 옆을 돌아보는 쪽이 더 유리하다. 그런 시대가 됐다. 예컨대 나 의원이 역사의 상처를 예민하게 느끼는 감각을 지녔다면, 그의 정치적 전망이 더 밝을 테다. 적어도 온라인상의 조롱은 피했을 게다. 하지만 그들의 습속은 그대로였다. 평생 쌓아온 인식의 벽, 그 덕분에 눈 앞의 과제에만 몰두했고, 그래서 성공했다.

벽을 깨 부수고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일은 낯선 모험이다. 이미 충분히 누리고 사는데, 굳이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들이 다시 다수파가 되려 한다면, 습속을 바꿔야 한다. 김원봉 관련 발언이 왜 중요한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감각으론, 소수파를 면치 못한다.

86세대도 노후 대책은 건물주?

다른 편에는 나 의원 부류의 낡은 감각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이 있다. 그들 역시 습속이 낡았다. 이미 소수파가 된 극우를 그저 조롱하는 것만으로도 반사이익을 얻는다. 굳이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기득권을 누린다는 점에선, 나 의원 부류와 닮았다.

과거 극우 진영은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자신들의 기득권을 정당화했다. 자신들의 허물에 대해선, 그래도 북한보다는 낫지 않느냐며 방어했다. 비교 기준을 늘 북한에 고정했다.

이제는 비교 기준이 늘 적폐 세력인 이들이 있다. 적폐가 부활하는 게 싫다면, 자신들에게 힘을 싣는 길밖에 없다고 한다. 허물을 지적하면, 그래도 적폐 세력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한다. 그들은 평가 기준을 높이는 게 두렵다.

'적폐냐, 아니냐' 구도에선 적폐 세력만 청산 대상이다. 그러나 기준이 높아지면, 자신들 가운데 일부도 청산될 수 있다. 따라서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근거와 논리에 따른 평가를 하기보단, 막연한 공감에만 호소한다.

나 의원과 비슷한 시기에 대학에 다녔던 이가 28일 내내 도마 위에 올랐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다. 김 대변인은 나 의원처럼 법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나 의원처럼 사법시험 준비라는 궤도를 따라가지 않았다. 학생운동을 했고, 고려대 법대 학생회장이던 1985년 구속돼 2년 넘게 감옥에 있었다. 그 뒤, <한겨레> 기자가 됐고, 현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대변인이 됐다.

대변인 재직 중인 지난해, 서울 흑석동 재개발 지역에 25억 원짜리 건물을 샀다. 재개발이 완료되면 아파트와 상가가 생긴다. 25억 원짜리 자산에서 부채가 11억 원이므로, 부당한 대출압력이 있었을 리는 없다. 따라서 법적 문제는 없다.

상가 구입은 노후 대책이라고 한다. 이 대목이 아쉽다. 1980년대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진보매체 기자 출신 청와대 대변인마저, 노후 대책은 부동산 투자다. 이 점에선 나 의원과 함께 태극기를 흔드는 그 윗세대와 마찬가지다.

무리한 빚 낸 건물주와 영세 자영업자의 충돌, 매일 보면서도…

역사의 상처를 헤집은 나경원 의원의 발언이 안타까웠던 건, 그게 고도로 계산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시대감각 자체가 덜 발달한 탓처럼 보였으므로, 답답했다.

김 대변인의 재개발 지역 건물 구입은 투기가 아니라서 문제 없다는 해명이 답답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시대감각이 발달을 멈춘 듯 보인다. 한국경제의 대표적인 뇌관이 영세 자영업자 문제다. 건물주와의 갈등이 첨예하다. 궁중족발 사건은 지금도 생생하다.

흔한 갈등 유형은, 자기 형편으로 감당하기 힘든 차입을 해서 건물을 산 측과 영세한 임차인 사이의 충돌이다. 건물주가 무리한 갑질을 한 경우 가운데 다수가 이런 유형이다.

추락을 피하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이 있다. 그래서 무리한 빚을 낸 건물주가 흔하다. 그들은 상가 임차인의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다. 게다가 재개발 사업은 고유의 논리보다는 부동산 소유자의 차익 실현 욕구에 따라 움직이곤 한다.

그래서 벌어지는 갈등을 곳곳에서 보면서도, 청와대 대변인이 재직 중에 빚을 내서 재개발 지역 건물을 샀다. 그러고도 정치적인 비난을 사지 않으리라고 여겼다면, 시대감각이 무뎌져 있다고 봐야 한다. 현실경제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무관심하다는 뜻이다.

'포용적 복지국가' 청와대 대변인도 노후는 '각자도생'

김 대변인은 1990년 12월 <한겨레>에 입사했다. 초기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중위 소득 이상의 정규직으로 30년 가까이 지냈다. 김 대변인 부인은 교사로 30년 가량 재직했다. 소득 및 교육 수준 기준으로 이들 부부는 명백히 상위 계층이다. 그런데 복지가 아닌 부동산 수입에 기대서 노후를 준비하려 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열악한 복지 현실을 답답해하고 끝낼 일이다. 하지만 '포용적 복지국가'를 내건 정부의 핵심 인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각자도생'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 됐다. '포용적 복지국가'는 그저 구호일 뿐이라는 신호다. 아울러 부동산 불패 신화에 힘을 보탰다. 그 후폭풍이 곧 몰아닥칠 게다.

86세대 중산층의 미래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준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그들은 대기업 취업이 쉬웠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도 적었다. 따라서 대기업 정규직을 보는 시각이 아래 세대와 다르다. 상대적으로 쉽게 얻은 일자리였으므로, 큰 기득권이라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86세대를 싸잡아 기득권층으로 모는 논리가, 그들에겐 어색하다. 그래서 생긴 갈등이 크다.

86세대가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다. 김의겸 대변인 사례에 눈길이 가는 또 다른 이유다. 전형적인 86세대 중산층 부부 사례다.

적어도 노후 준비만 놓고 보면, 그 윗세대와 마찬가지라는 점이 드러났다. 결국 부동산이다.

이는 정치적 결속력이 강한 86세대 역시 경제적 이해관계는 그 윗세대와 겹치리라는 전망으로 이어진다. 정규직-노동조합에 기반한 이해관계가 아닌, 자영업자 또는 건물주 입장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새로운 균열을 예고한다. 함께 대학을 다니고, 함께 촛불을 들었지만, 향후 벌어질 사회-경제 정책 논쟁에선 입장이 충돌할 수 있다. 같은 86세대인데, 한쪽은 노후 준비가 안 된 영세 자영업자, 다른 쪽은 건물주다.

더구나 과거 군사 정부의 잔재가 씻겨나가고, 남북관계까지 풀린다면, 86세대를 한데 묶을 정치적 목표도 사라진다. 전대협 강령이었던 '자주, 민주, 통일' 이후의 정치적 목표는 제대로 토론된 바 없다. 따라서 합의나 공감대도 없다. 그리고 86세대 가운데 상당수의 은퇴 시기가 현 정부 임기 말과 겹친다.

한국 정치의 핵심 변수였던 86세대의 에너지는 어디로 흐를 것인가?

건물주의 이익을 지키는 길인가?

그렇다면, 나경원 의원을 닮아야 한다. 사회적 통증을 느끼는 감각은 죽이고 살아야 한다. 대신 자기보호 본능에 더 충실해야 한다.

영세 자영업자 편에 서는 길인가?

그렇다면, 또래 중산층과 부딪혀야 한다.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기 위해 세금을 더 내자고 해야 한다.

중산층 신화 무너지는데, 복지도 열악하면?

한 편의 글에서 김의겸 대변인과 나경원 의원을 함께 거론했다. 두 사람을 같은 선 위에 올려놓고 비교하는 건 잘못이다. 누렸던 기득권의 크기, 정의를 위해 희생한 정도가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무리한 비교를 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1960년대에 태어난 이들 가운데 '86세대'는 소수다. 나머지 다수는 8로 시작하는 학번이 없다. 대학 진학률이 낮던 시절이다. '86세대'는 같은 세대 가운데서 소수임에도, 세대 전체를 과잉 대표했다.

예전에는 '학번 없는 세대'도 중산층이 될 길이 있었다. 양승훈 경남대학교 교수가 쓴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 잘 묘사된 대우조선해양 작업장 엔지니어(현장 노동자)들이 대표적이다. 1987년 6월 항쟁이 이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다. 적어도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은 혜택을 누렸다. 김 대변인 또래인 '학번 없는 60년대 생'들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대학에 가지 않아도 중산층이 되는 길을 열었던 '중공업 가족 유토피아'는 무너지고 있다. GM 공장이 떠난 군산이 대표적이다.

이는 '86세대'와 '학번 없는 60년대 생' 사이의 갈등도 예고한다.

김 대변인처럼 은퇴 이후에도 중산층 생활을 유지하는 '86세대'가 있다. 반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학번 없는 60년대 생'은 산업 구조 변화에 따른 후폭풍을 더 세게 겪는다. 그런데 진보를 자처하는 '86세대' 정치인들은 사회, 경제적 불평등보다 다른 쟁점에 더 열정을 쏟는다. 그조차 '86세대'끼리만 공감하는 쟁점이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계층에겐 낯선 논란이다.

'학번 없는 세대'가 보기에, 역사 인식을 놓고 다투는 나경원 의원과 김의겸 대변인이 과연 얼마나 다를까. 나이가 비슷한 엘리트인데, 한쪽은 이미 건물주인 이들 편, 다른 쪽은 곧 건물주가 될 이들 편. 이 정도 차이 아닌가.

사실 미국, 유럽 등이 먼저 걸었던 길이다. 이들 나라에서도 대학에 가지 않고서는 중산층 진입이 몹시 어려워졌다. 미래가 불안한 이들은 극우로 쏠렸다. 전통적인 수구-보수와는 다른 유형의 극우였다. 이런 극우는 기존 정치문법을 깨면서 갑자기 등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한국이 굳이 예외가 되리라는 법은 없다. 만약 은퇴를 앞둔 86세대의 정치적 선호가 건물주의 이해과 겹치는 쪽이라면, 경제정책에선 우경화가 필연이다. 여기에 중산층으로 향하는 길이 좁아진 하위 계층의 분노까지 겹치면, 새로운 극우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예컨대 역사 인식은 나경원 의원과 정반대지만, 정규직 기득권과 중산층의 위선을 격렬히 비난하는 극우다. 현 집권층이 앞으로 상대할 세력이 꼭 지금처럼 시대감각이 둔한 극우라는 법은 없다는 뜻이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일종의 풍선 효과다. 인구가 많은 86세대가 영세 자영업자 혹은 건물주가 된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태극기를 흔드는 그 윗세대와 같지만, 평생 충돌했던 정치적 입장까지 뒤집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경제, 사회적 불평등 해결과는 동떨어진 쟁점이 과잉 대표될 수 있다. 갈등의 총량은 그대로인데, 한쪽에서 닮아가면 다른 차이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것이다. 풍선을 바닥에 대고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예컨대 역사인식 논쟁 등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정치 쟁점이 될 수 있다. 극우적인 역사 인식을 하는 나경원 의원 부류와 그 반대 세력이 적대적 공생을 할 수 있다. 정치적 관심의 총량이 그대로라면, 조세와 분배 문제는 그만큼 밀려난다. 역시 풍선 효과다. 상위 10~20% 중산층이 아닌 계층의 불만은 그저 쌓이기만 하는 구조다.

건물주 편인가? 영세 자영업자 편인가?

2016~2017년 촛불 정국은 최순실, 이재용 등이 상징하는 극소수 특권층과 나머지 다수 시민의 싸움이었다. 승자는 후자였다.

그 빛이 찬란한 만큼, 승리한 다수 안의 간극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흔히 중산층으로 불리는, 상위 10~20% 계층과 나머지 사이의 간극이다. 중산층과 서민의 간극인 셈이다. 전자는 주로 대기업 정규직, 공공부문 종사자, 고학력 전문직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86세대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중산층에 진입했었다. 그들이 지금 갈림길에 섰다.

김의겸 대변인 사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고려대 법대 학생회장, <한겨레> 기자, 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변인. 86세대를 대표하는 이력을 지닌 중산층 가장이 은퇴를 앞두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줬다.

건물주가 되는 선택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다만, 선택이 지닌 의미에 대해선 사회적 고민이 필수적이다. 건물주가 된 86세대는 어떤 정치적 입장을 택할 건가.

나경원 의원 부류와 과거사 논쟁하는 것으로 남은 삶의 에너지를 쓸 건가?

건물주가 아닌 영세 자영업자가 된 다른 86세대, 혹은 학번 없는 60년대 생 등과 연대해서 중산층과 서민의 간극까지 줄이는 싸움에 나설 건가?

우연히 불거졌지만, 역사적 갈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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