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9300만 유권자의 인도네시아 선거는 우마르 하디(Umar Hadi) 주한인도네시아대사의 표현처럼 “물류조달의 악몽”(logistics nightmare)을 겪는다. 커다란 투표용지와 투표확인용 잉크를 마련하고 바다 건너 강과 산을 넘어 동네 투표소마다 배달했다가 현장 개표를 마친 투표용지를 선거관리위원회로 가져와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투표물품이나 투표함을 옮기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경찰관이 15명 이상이고, 과로로 사망한 투표관리원이 304명에 달하여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이들을 '선거 영웅'으로 추모하고 있다.
표본 개표 결과는 조코위(Jokowi: Joko Widodo) 현 대통령과 이슬람 지도자 마룹 아민(Ma'ruf Amin) 부통령 후보의 팀이 54.5% 득표하여 특전사령관 출신 프라보워 수비안토(Prabowo Subianto)와 억만장자 산디아가 우노(Sandiaga Uno) 팀보다 9%포인트 이상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변은 없었던 것이다. 민주투쟁당을 비롯한 조코위 지지 정당들도 54.1%를 득표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패배한 프라보워 진영이 선거불복을 시도하지만, 5년 전에 그랬듯이 5월 중에 최종 결과가 발표되고 대통령 취임식이 임박하면 수그러들고 다 정리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도네시아 국민들도 참여한 선거
한국에 거주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투표에 참여했다. 본국보다 4일 전에 전국 십여 개 투표소에서 7094명이 투표권을 소중하게 행사했다. 재외국민의 참정권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헌신적 자원봉사자들의 노고가 투여되었다. 개표는 서울에서 본국과 동시에 진행하였는데, 유튜브로 중개하고 집계결과를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그들의 표심은 어디로 향했을까? 대통령 선거에서는 조코위-마룹 팀이 67.62%를 얻어 32.38%에 그친 프라보워-산디아가 팀을 압도했다. 조코위 팀의 승리라는 점은 전체 집계 예상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35.24%포인트 격차는 우리나라의 인도네시아 유권자가 조코위 팀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총선 결과는 더 흥미롭다. 한국 거주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얻은 3개 정당은 민주투쟁당(PDIP, 25,80%), 복지정의당(PKS, 20,92%), 연대당(PSI, 18,55%)이었다. 놀라운 점은 인도네시아 전체에서 2% 정도 얻은 신생정당 PSI가 한국에서 19%에 육박하는 표를 획득한 것이다.
김해에서 투표관리 자원봉사를 수행한 유학생 지코 물리야(Zico Mulia)는 PSI의 약진을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는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덕분으로 추정했다. 김해에서 많은 표를 얻은 국회의원후보 차마라 아마니 알라타스(Tsamara Amany Alatas)는 소셜 미디어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23세의 매우 젊은 후보였다. 한국에서 PSI의 높은 득표는 우리나라 인도네시아 유권자의 다수를 점하는 청년노동자들이 청년후보들을 앞세워 혁신적 세대교체를 제안한 '젊은 정당'에 호감을 표한 결과로 볼 수도 있겠다.
'조코위 모델'과 인도네시아 정치의 지방시대
주한인도네시아대사관은 4월 25일에 산업연구원과 함께 인도네시아 선거평가와 한국-인도네시아 관계를 전망하는 세미나를 서울의 롯데호텔에서 주최하였다. 자카르타의 유력한 싱크탱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Centre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의 필립스 베르몬테(Philips J. Vermonte) 소장이 선거 평가를 들려주었다.
선거 정당연구 전문가인 베르몬테 박사는 인도네시아 선거의 여러 부족한 면모를 먼저 열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몬테 소장은 주목할 만한 뚜렷한 경향을 읽어낼 수 있는 선거였다고 강조하였다. 지방자치단체장 출신이 국가수반이 되는 “조코위 모델”이 바로 그것이다. 조코위는 중부 자바의 솔로(Solo) 시장을 두 번 성공적으로 연임하고 자카르타 주지사로 선출되어 업적을 내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번에 재선까지 성공하였다. 이러한 조코위 모델은 다음 2024년 선거 때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 때가 되면 현재 67세인 프라보워는 나이가 너무 많아 출마하기 어렵고, 대통령 3선은 금지되어 있기에 조코위도 출마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2024년 대선은 현역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작년에 인구가 많은 지역들의 주지사 선거에서 주민문제와 도시문제 해결능력을 앞세운 '전문가형' 후보들이 주지사로 당선된 점은 인도네시아 정치에서 고무적인 현상이며 2024년 대선이 매우 흥미로운 선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베르몬테 소장은 이런 경향에 바탕을 두고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의 발전을 위한 하나의 제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당연히 지방정부 간의 교류를 더욱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코위 대통령도 중부자바 솔로시장 시절에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참석차 한국을 처음 방한하여 한국과 교류관계를 맺었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베르몬테 소장의 권고는 아주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사람 중심'의 관계 발전을 향하여
이번 세미나에서 필자는 양국관계 진전을 위하여 여러 가지 제안을 발표하였다. 기업인과 예비투자자들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세미나였기에 기업 활동과 관련된 제안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세 가지만 추려서 강조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인도네시아 정치의 '지방시대'에 대처하는 지침으로서, 인도네시아의 한인기업들이 지역주민관계를 더 세심하게 고려하는 경영활동을 전개할 것을 주문하였다. 기업 활동이 주민들에게 피해를 줄이고 혜택이 가도록 노력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활동(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도 지역주민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 사업장 운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주민들의 복지를 먼저 고려해야 도의적으로 마땅하고, 주민들의 삶과 밀접한 생활정치에 깊은 관심을 지닌 지방정부수반들과 좋은 관계를 일구는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선거 4일 전에 공개되어 큰 이슈가 되고 젊은이들 사이에 '함께 보기'(nobar) 선풍을 일으킨 섹시 킬러스(Sexy Killers)라는 다큐멘터리는 인도네시아에서 석탄광업과 석탄화력발전이 어떻게 주민들을 위험과 질병 속으로 밀어 넣고 경제적 피해를 안겨주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유튜브에서만 2000만 명 넘게 시청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우리 기업 경영자들도 필히 시청하고 사업장과 주민관계에 대해 되돌아볼 기회를 갖길 바란다.
두 번째 제안으로 우리 기업이 고용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에게 전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 기업은 한국과 현지에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거주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투표경향에서 읽을 수 있듯이 조코위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한국의 자국 노동자들의 처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대통령으로서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노동자들과 대규모로 회합하는 이벤트를 개최하고 우리 정부에게 각별한 관심도 누차 요청한 바 있다.
지난 3월에 인도네시아의 한인기업들이 임금체불 문제로 현지에서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수개월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도주한 한인 경영자로 인해 암담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의 처지가 크게 보도되었고, 이어서 임금을 체불한 한인기업이 15개나 된다며 현지 노동자들이 항의시위를 전개하였다. 국제민주연대를 비롯한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과 민주노총이 광화문에서 현지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항의시위와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던 것 같다.
우리 정부와 현지 공관은 이번 사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진전된 모습을 보였는데, 이러한 변화를 계기로 더 개방적인 조기대응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수억 원의 임금을 체불한 버카시 한인공장 문제는 현지에서 수개월 전부터 제기된 문제였고 수차례 항의시위와 관련보도가 이어졌던 사안이기에 우리 대통령까지 나서기 전에 적절한 해결책이 찾아졌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신남방정책'의 구호처럼, '번영', '평화'와 함께 '사람'을 중시하는 양국 관계가 발전하길 바란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동반자 관계
조코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인도네시아와 한국 관계를 “특별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격상시켰다. 10년 전에 만난 인도네시아 외교관은 양국관계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충분히 좋다고 했는데 상상초월의 수준으로 나날이 더 좋아지고 있다. 양국 정상은 오랜 친구처럼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조코위 대통령은 카트차를 직접 몰며 안내를 했고, 조코위 대통령이 한국을 답방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은 환영식을 창덕궁에서 개최하며 각별히 환대하였다.
특별 전략적 동반자관계는 동아시아 지역과 지구적 수준에서 전략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지역과 세계의 인간적 삶의 증진을 위한 양국 간의 협력은 경제통상의 영역을 넘어서 평화와 민주주의 증진을 위한 노력을 포함해야 한다. 중국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인도네시아의 “포용적”(inclusive) 지역전략은 한국의 지역전략과 상통한다. 더구나 인도네시아의 포용적 지역전략은 통 크게 북한까지 포괄하고 있다.
조코위 대통령은 한아세안대화관계 30주년을 기념하여 올해 11월에 부산에서 개최되는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에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하자고 제안하였다. 작년 7월에 문재인 대통령이 싱가포르 강연을 통하여 “아세안이 운영 중인 여러 회의체에 북한을 참여”시킴으로서 북한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아세안 측에게 요청하자 아세안의 중추국가인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화답한 것이다. 그리고 북핵협상의 교착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아이디어까지 제안해준 것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는 역내 민주주의 증진을 위한 최고의 파트너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는 이번 선거의 평화적 성사와 조코위의 연임으로 '동남아 민주주의 챔피언'으로서 위상을 다시 각인시켰다. 우리 정부는 소위 '신남방정책'을 핵심적 외교전략으로 일찍이 표방했으나 남방의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을 위한 내용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외교관계에서 부정적인 발언을 회피하려는 한국 정부가 미얀마, 캄보디아, 태국 정부에게 어떤 식으로든 민주주의 관련하여 발언하는 것은 아직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긍정적인 찬사는 능히 가능할 것이고 이를 통해 신남방정책의 민주적 함의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정부가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진전을 축하하고 기념하고 공유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선거 제도, 의회 및 정당 발전을 위한 협력부터 민주주의를 실질적인 가치로 만들어가는 보건 복지 협력에 이르기까지 양국 간의 민주주의 협력을 입안하고 강화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나라와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연대를 위한 작은 제안 하나를 덧붙이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것은 한국정부가 인도네시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Indonesia Democracy Foundation)의 설립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작년에 민주화 20주년을 맞이했으나 아직 이를 상징하고 기념하는 중심적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에게 해마다 수천만불의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 공공행정역량강화, 경제인프라확충, 환경·자연관리강화 분야에 지원되는데, 여기에 민주주의 진흥 분야가 추가되면 더욱 좋겠다.
조코위 대통령 제2기 끝자락에 인도네시아는 민주화 25주년을 맞이한다. 한국정부가 인도네시아의 4반세기 민주화 역정을 기념하는 재단을 자카르타에 설립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이 기관은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는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포괄적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기념비가 될 것이다. 나아가 인도네시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동남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을 바라는 세계의 모든 이들이 주목하고 지지하는 중심으로 자리할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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