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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백두산, 중국의 창바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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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백두산, 중국의 창바이산 [김기협의 퇴각일기] 스물한 번째 이야기
백두산 천지를 가본 사람이 많지만 달빛 아래, 그것도 대보름 달빛 아래 그 호수를 밤새도록 내려다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청복(淸福)을 나는 2003년 추석날 누렸다.

천문봉(天文峰) 기상관측소의 직원숙사 숙박은 당시에도 불법이었으리라 생각되므로 어느 패거리에 묻어간 것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연변에 살러 가서 첫 추석에 어느 단체에 동행할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백두산 첫 등반이었는데 환상적인 경험이 되었다. 얼마 후 공원의 운영 주체가 상급으로 옮겨가고 관리가 엄격해진 뒤로는 다시 누릴 수 없게 된 경험이다.

그런데 백두산의 진짜 모습에 접하며 충격을 받은 것은 날이 밝은 뒤였다. 안개가 걷히는 데 따라 조금씩 드러나는 봉우리들의 모습. 그렇게 험악한 풍경을 나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꽤 큰 사진도 많이 봤었다. 하지만 넓은 경치를 담은 사진에는 봉우리들의 거친 질감이 제대로 나타날 수 없었다. 천지를 둘러싼 삐죽삐죽한 능선은 거대한 그릇을 누군가가 막 깨트려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달빛 아래 신비로운 정적에 잠겨있던 호수면보다 사나운 싸움의 현장 같은 봉우리와 능선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 수십만 년 전 마구 때려 부순 자리가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 천지 분화구 모습. ⓒ바이두백과

천지의 거친 풍경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잔상(殘像)으로 남아있었다.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하는 순진한 믿음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을 침략한 일이 없는 민족이라고 하는 표현에 베트남 참전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예외적인 일이라고 애써 제쳐놓을 수 있다. 하지만 민족의 큰 상징의 하나인 백두산이 이렇게 험상궂은 모습이었다니!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경위를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고대사와 신화에서 백두산이 가졌던 역할은 인정할 수 있지만, 삼국시대 이후 농업사회의 발전 단계에서는 접근이 힘든 백두산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19세기 이전 문학작품에는 백두산이 등장하지 않고, 지리서에 기본 정보가 실려 있을 뿐이다. 단군신화가 민족사회의 위기 속에서 나타난 것처럼 20세기에 들어와 민족의 위기 앞에 백두산이 부각된 것 아닐까?

최남선은 <백두산근참기>(1927)에서 단군 신시(神市)의 자취를 삼지연 고원지대에서 찾았는데, 허황한 생각이 아니라고 본다. 농경문화가 자리 잡기 전 수렵과 채취를 일삼던 단계에서는 사람이 비교적 많이 살만한 지형과 위치였을 것 같다. 그러나 농경사회가 성립한 뒤에는 경제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농업국가의 관리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712년 정계비 설치 때 그런 상황이 보인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창바이산(長白山)이라 부르고, 특히 청(淸)나라를 지배한 만족(滿族)의 발상지로 여긴다. 백두산은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에서 제일 높고 큰 산이다. 쳐다본 사람들이 남쪽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조선시대를 놓고 본다면 농업에 열중하던 남쪽 사람들보다 수렵과 채취에 아직 종사하던 북쪽 사람들이 더 많이 쳐다봤을 것 같다. 사냥꾼이든 약초채집인이든 조선사람보다 북쪽 사람들이 천지 물가에 더 많이 나타났을 것 같다.

우리 역사에 북방민족으로 숙신, 말갈, 거란, 여진 등 많은 이름이 나오는데, 만족은 이들을 포함해서 만주 지역의 토착 민족을 거의 모두 망라한 존재로 보인다.('만주'라는 지명도 '만족의 땅'이란 의미로 만들어진 것이다.)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는 연장선 위에서 지역의 모든 부족을 통합해 '만족'의 깃발을 내걸었던 것이다.

지금의 만족은 등록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좡족(壯族)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집단이다. 그러나 등록인구 200만 명이 안 되는 조선족만큼 존재가 뚜렷하지 않다. 한족문화에 동화되어 자기네 말과 글을 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만주어 문자는 청나라 건국과정에서 몽골어를 토대로 만든 것으로 청나라의 관용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중엽의 만족 작가 조설근(曹雪芹)이 <홍루몽>을 한어로 쓴 것을 봐도 만주어의 사용이 그리 활발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복식과 음식을 비롯한 '만족문화'는 일반 만족의 생활에 별로 남아있지 않고 관광자원으로만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민족정체성이 흐려졌는데도 많은 등록 인구가 유지되는 것은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중국의 정책 때문이다. 많은 자치향(自治乡)이 1980년대 이후 만들어진 데서도 이 점을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57년에 베이징시 구역 내에 몇 개 만족 자치향이 설치되었다가 그 이듬해 대약진 운동 속에 인민공사로 바꿨던 것을 개혁개방으로 접어든 후에 다시 자치향으로 복원시킨 곳들이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은 건국 때부터 내건 것이지만 장기간 안정적으로 시행된 것은 개혁개방시대에 와서의 일이다.

다시 백두산으로 돌아와서 2003년에서 2006년까지 연변에 체류하는 동안 백두산에 여러 번 갔다. 당시에는 바이산(白山) 시 쪽의 서파(西坡) 관광구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아서 대개 안도(安圖)현 관내의 북파(北坡)에 다녔지만 한 번 힘들여 서파에도 간 일이 있고 두만강 발원지 쪽의 용암대지도 여러 번 찾아갔다. 두만강 발원지에 특별히 관심이 컸던 것은 정계비와 관련된 의혹을 풀고 싶어서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1년에 한 번 잠깐씩 연길에 다니러 가면서는 백두산 갈 틈을 내기 어려웠다. 그러다 작년부터 연길 체류를 늘리면서 다시 다니게 되었다. 작년에는 서파에 올랐다. 10년 전과 달리 북파 입구에서 서파 입구까지 시원한 포장로가 깔려 있고 등산로도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는 것을 보며 금석지감을 느꼈다.

▲몇 해 전까지 서파 올라가던 길. ⓒ바이두백과

금년에는 남파(南坡) 쪽을 살펴보고 싶었다. 바이산 시 관하의 장백조선족자치현은 압록강이 수원지로부터 백여 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곳에 있다. 이곳에서 백두산 남쪽 기슭으로 올라가는 관광구가 개발 중이어서 아직 산에 올라갈 형편은 못 될 것 같지만 장백현을 한번 보고 싶었다. 연변 이외의 조선족 자치구역을 잘 살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 천지의 옛 도면. 북쪽으로 열려 있는 흐름이 장백폭포를 통해 북파로 내려가는 길. 남쪽의 봉우리들 밖에서 정남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압록강 상류. 압록강 상류의 서쪽 기슭이 지금의 장백현이다. ⓒ바이두백과

금요일 오전 7시 네 가족이 떠났다. 간단한 점심 외에는 부지런히 달렸는데, 장백현에 도착하니 오후 3시였다. 강 건너 혜산시가 마치 한 도시의 다른 구역처럼 가깝게 보였다. 이쪽 강변에는 두만강변 같은 엄중한 철조망이 없고 공원이 많이 조성되어 있었다. 경찰이나 군인이 특별히 배치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도중에 검문소가 한 곳 있었지만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탈북자가 중국 내부로 빠져나가는 것만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저쪽 강변에는 철망이 있지만 허술해 보였고 아이들이 그 밖의 강가에 나와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단둥(丹東)이나 도문(圖們)에서보다 훨씬 가까이 느껴졌다. 내키는 대로 서로 나들이도 하며 지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공원에서 노인들이 편안하게 놀고 있었다. 외부 사람들 모습에 긴장하거나 호기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연변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조선족과 한족을 (특히 노인들) 가려서 알아보게 되었는데, 한족만 있는 것 같았다. 눈빛이 각별히 맑아 보이는 한 어른에게 아내가 말을 걸었다가 몇 가지 그곳 사정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장백현 쪽에서는 탈북자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국어와 중국 사정에 어두운 탈북자가 의지할 만한 조선족사회가 연변처럼 크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두만강변처럼 경계가 삼엄하지도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장백현의 조선족이 근년 큰 도시로 많이 옮겨가서 인구비율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을 이 노인은 체감한다고 했다. 어울려 놀던 조선족 친구들이 이제 몇 안 남았다고. 연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곳에서는 더 빠르게 느껴지는 듯.

서파 입구인 숭장허(松江河)에서 장백현으로 넘어오는 도중에 북파로 빠지는 길이 갈라진다. 예전에는 장백현의 압록강변까지 왔다가 강을 따라 올라갔는데, 도중에 능선 하나 넘어가는 길을 내서 거리를 줄인 것이다. 어딘가에서 막힌다는 그 길을 막히는 데까지라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눈치를 보고 참았다. 예약해 놓은 숭장허의 5성급 온천호텔이란 곳에 얼른 가고 싶은 마음이 나도 바빴다.

지린성 바이산시 푸숭현 숭장허진(吉林省 白山市 抚松县 松江河镇). 18만여 평방킬로미터 면적에 2700만 인구의 지린성은 중국 밖에서라면 당당한 국가 규모다. 1개 자치주(연변)와 8개 지급(地級) 시로 구획되는데, 그중 하나인 바이산시는 1만7000여 평방킬로미터 면적에 120만 인구로, 우리나라의 1개 도 크기로 볼 수 있다. 백두산의 서쪽 기슭은 바이산시 구역이고 장백현도 그 일부다. 장백현이나 푸숭현은 우리의 시-군 단위에 비슷한 것이고 숭장허진은 푸숭현 관내의 1개 읍-면 격이다.

숭장허진이 서파 입구의 관광도시로 자라난 것은 최근 10여 년 내 일이다. 선양(瀋陽), 창춘 방면에서 들어오는 고속도로가 깔리고 비행장이 만들어졌다. 호텔과 상점과 식당으로 채워진 신도시가 만들어졌는데, 새로 만들어진 거리치고는 썩 자리 잡힌 모양이라서 설계가 잘 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백두산 산정에서 직선거리가 약 60킬로미터, 바라보이지도 않는 곳인데,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입장권을 사서 관리국 운영의 버스를 타고 등산로 입구로 간다. 1990년대에 개발되어 천지 턱밑에까지 호텔과 상가가 들어선 북파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설계와 운영이다.

▲ 천문봉에서 내려다보는 북파 관광단지. 오늘 점심에 만난 이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북파의 기존 호텔과 상가도 철수시키는 정책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더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약 100리 밖의 이도백하진(二道白河镇)에 관광시설의 건설이 집중되어 온 것을 보면 사실인 것 같다. 앞으로는 관광객이 천문봉 꼭대기 위에서는커녕 산꼭대기가 보이는 곳에서는 일절 숙박하지 못하게 될 듯. ⓒ바이두백과

중국 경내의 백두산 일대에는 1960년에 창바이산보호구가 만들어졌고 1986년에 국가급 자연보호구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는 지린성의 관리조례(吉林长白山国家级自然保护区管理条例)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관광개발이 지방정부의 손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관리에 혼선을 빚고 제일 먼저 개발된 북파에는 난개발의 경향까지 나타났는데, 2005년 관리국과 관리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일원적 관리, 개발과 통제가 시작되었다.

▲ 창바이산자연보호구 지도. ⓒ바이두백과

1990년대 북파 구역 운영의 주체는 안도현이었다. 한국 관광객의 증가가 안도현의 큰 수입이 되었으므로 한국 손님의 편의 위주로 산속에 서둘러 시설이 개발되었다. 대우호텔도 그때 지어졌다. 관리국이 생겨 운영권을 넘겨받으면서 바뀐 개발 방식을 보여주는 곳이 서파다. 관광의 편의보다 자연보호를 앞세우는 방식이다. 남파의 개발 방식도 비슷할 것을 기대한다.

숭장허에서 밤을 지낸 후 아이들만 산에 보내고 아내와 나는 숭화강(松花江) 쪽으로 바람 쐬러 갔다. 작년에 서파에 올랐기 때문에 다른 쪽을 좀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후에 아이들이 돌아와 사람이 바글바글했다고 한다. 계절이 맞고 토요일이니까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입장권이 8000매나 팔렸다더라"는 말에 생각이 잠깐 머물렀다. 8000매면 약 100만 위안, 우리 돈으로 2억 원이 안 된다. 연중 손님이 제일 많은 날 관리국 수입이 그 정도라면 목적이 돈 버는 데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존재다. 그런데 우리가(대한민국이)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대략 4분의 3은 중국이, 4분의 1은 북한이 관리하고 있다. 중국의 관리정책은 대단히 훌륭하다. 우리의 국립공원 관리 수준보다 훨씬 낫다. 중국 입장에서도 소중하게 여기는 산이기 때문에 관리를 잘하는 것이다. 이 산 아끼는 마음을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이웃나라끼리 잘 어울려 지내는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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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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