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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은 왜 북쪽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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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은 왜 북쪽에 있을까? [김기협의 퇴각일기] 스물두 번째 이야기
화하(華夏)를 천하의 중심으로 보며 사방의 오랑캐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부른 것은 중국문명 초기부터의 일이다.

사방의 오랑캐 가운데 동이는 얌전했다. 천하체제에 큰 문제를 일으킨 일이 없다. (임진왜란 전에는) 남만은 춘추시대에 초(楚), 오(吳), 월(越)의 세 나라가 천하를 한 차례씩 흔들다가 중원에 끼어든 후로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서융은 춘추시대 이전에 주(周)나라를 뒤집어 동쪽으로 옮겨가게 한 일이 있으나 그 후에는 북적(北狄)의 한 종속변수처럼 되어 독자적으로 중원에 위협을 가하는 일이 없었다. 중화제국 2000년 역사를 통해 제국에 거듭거듭 큰 위협을 가한 것은 북적이었다.

북적의 존재는 흉노(匈奴)라는 이름으로 진 시황 때부터 부각되어 나타났다. 통일된 천하에 대한 유일한 위협으로 남아 있는 것이 북방의 흉노라고 생각해서 명장 몽념(蒙恬)을 태자 부소(扶蘇)와 함께 보내 장성(長城)을 쌓게 했다. 만리장성 얘기를 꺼내고 보니 생각나는 책이 있다. 줄리아 로벨의 <만리장성(The Great Wall)>(국내 미번역). 오늘 정리할 생각의 범위에도 관계되는 내용이 많은 책인데, 마침 곁에 없다. 집에 돌아간 후 그 책을 보며 이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게 될 것 같다.

▲ <예기> 천하관의 약도. 엉성한 그림이지만 중국 본토의 황해 연안을 동이 지역으로, 양쯔강 이남을 남만 지역으로 그린 것은 춘추시대 이전의 상황을 그럴싸하게 나타낸 것이다. ⓒ바이두백과


▲ 만리장성의 전형적인 풍경. ⓒ바이두백과

로벨의 중요한 논점 하나를 언급해 둔다. 장성의 실제적인 방어 기능보다 문화적 상징의 의미를 크게 보는 점이다. 참신한 관점이고 장성과 관계된 역사 해석의 길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중국사 연구의 큰 전환점을 만든 것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 책이 막 나왔을 때 읽고도 내 손으로 번역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각의 방향을 바꾼 점은 좋은데, 바꾼 방향에 안정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장성에 실제적 방어 기능이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그 기능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긴 역사를 통해 몇 차례 뚫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몇 차례의 상황만을 놓고 방어 기능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일이 아니다. 방어 기능을 넘어서는 다른 의미를 추구하는 노력은 지지해 마지않지만, 그 다른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엄연히 존재한 기능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장성은 돌로 쌓은 구조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제도로서 의미를 가진 것이다. 구조물 자체가 방어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구조물을 이용하는 군사제도가 효능을 가진 것이었다. 제국을 옹위하는 제도는 일시적 상황이 제국을 무너트리지 않도록 막아준다. 그러나 제국의 근거가 무너질 때는 제국의 한 부분인 제도가 어떻게 혼자 버틸 수 있는가? 명(明)나라가 망할 때도 북경이 반란군에게 유린되는 시점까지는 오삼계(吳三桂)가 산해관(山海關)을 잘 지키고 있었다. 장성이 무너져 명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망해서 장성이 뚫린 것이다.

만리장성을 놓고 첫 번째 생각할 문제는, 왜 이것이 북쪽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동서남북이 모두 오랑캐인데 왜 북쪽 오랑캐와의 사이에만 장성이 필요했던 것인가?

동쪽으로는 지금의 산둥(山東)성과 장쑤(江蘇)성 지역의 '동이'가 머잖아 중화문명에 포섭되고 나면 바다로 막히기 때문에 장성 같은 것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농업 기반의 중화문명이 계속 확장되어 나갔기 때문에 '문명의 충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특정한 경계선이 없었다. 농업문명을 확장하기 힘든 북쪽과 서쪽 초원지대와의 사이에 지속적 경계선이 형성될 수 있었다.

로벨의 훌륭한 지적 중 하나가 장성에 방어적 기능만이 아니라 공격적 기능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쪽으로는 농업지역을 유목지역으로부터 보호하는 취지가 분명하다. 그런데 장성의 서쪽 끝은 유목지역 안으로 깊숙이 뻗어 들어가 있다. 이것은 중화제국에게 서역(西域)과의 교역이 중요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북적의 배후에는 서역 같은 큰 경제권이 없었기 때문에 단순한 방어로 충분했던 반면 서쪽으로는 서역과의 교역로를 적극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장성의 서쪽 일단(一段)은 이 교역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 장성 축조의 역사를 표시한 지도. 노란색 선이 전국시대의 성이고 주황색 선이 한나라 때 쌓은 것이다. 제일 북쪽의 두 가닥 연한 보라색 선은 요-금(遼-金) 시대의 성이고 짙은 보라색 선이 명나라 때의 장성이다. 서쪽 부분은 서역과의 교역이 중요해진 한나라 때 쌓은 것이다. ⓒ바이두백과

▲ 중국 역사부도에 나오는 한나라 강역. 하서주랑(河西走廊 또는 甘肅回廊)을 거쳐 사막지대에 이르는 서쪽 영역은 서역과의 교통로로서 군사적 관리의 대상이었다. ⓒ바이두백과

로벨의 또 하나 중요한 지적은 오랑캐가 못 들어오게 막는 기능만이 아니라 중국인이 못 나가게 막는 기능도 장성에 있었다는 것이다. 백성은 국가의 중요한 자원이므로 백성이 마음대로 떠나서는 국가에 손실이 된다.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전에 유목지역이던 지역도 농지 개간이 가능해지면서 농경지역이 북쪽으로 확장되는데, 그 확장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면 인적 자원이 유출될 뿐 아니라 국가 외부 인접지역에 큰 경제권이 자라나 국가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중화제국의 역사를 통해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이 거듭거듭 심각하게 제기된 중요한 까닭이 농경 지역의 확장에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화제국에 대한 북방의 위협을 전혀 이질적인 세력들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중화문명 발전-확장의 어느 단계에서 문명의 서로 다른 구성 요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의 변화로 보는 동태적(dynamic) 관점을 나는 취한다. 북방 유목민족도 중화문명에 어느 정도 포섭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일반 중국사 연구자들처럼 특정 시대를 집중해서 공부하지 않았지만, 석사논문의 배경인 진-한(秦-漢)시대와 박사논문의 배경인 명-청(明-淸) 교체기를 비교적 넓게 파악했다. 두 시기 모두 이 동태적 관점의 타당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먼저 명-청 교체를 간단히 살펴본다면, 청나라가 강성해서 밀고 들어왔다기보다 명나라 체제가 무너진 공백으로 끌려 들어왔다는 인상이다. 1616년 후금(後金)을 선포할 때까지도 누르하치에게 천하를 노리는 야심이 없었다. 후금을 조공국으로 품지 못한 것은 명나라가 천자국 노릇을 잘하지 못한 것이고, 1619년 무리한 정벌에 나섰다가 사얼후(萨尔浒)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막장에 접어들고 말았다. 명나라 체제가 그 오래 전부터 한계에 이르러 있었던 상황은 레이 황(黃仁宇)의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국내 미번역)에 잘 그려져 있다.

사얼후 전투 이후 많은 명나라 장수들과 관리들이 후금에 투항, 귀순했다. 1636년 청 왕조를 선포하고 1644년 입관(入關)하기까지, 나아가 수십 년에 걸쳐 청나라 체제를 안정시키기까지 이 투항자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을 한족 입장에서는 배신자(漢奸)로 여기기도 하지만, 그중에는 능력과 도덕성이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 투항자들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 명나라가 천자국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에서 천하의 혼란과 인민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청나라에 귀순해 청나라가 천하를 수습하도록 도와주는 길도 생각할 만한 것 아니었겠는가? 결과로 보더라도 청나라의 입관은 혼란을 줄이고 명나라 체제를 많이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화제국의 성립단계인 한나라 때의 흉노도 당시 중화문명의 한 부분이었다고 나는 본다. 진 시황이 흉노의 위협을 크게 봤다고 하는데, 그리고 한 고조가 흉노에게 포위당해 위기를 겪은 일이(平城之困) 있었는데, 그 직전의 전국시대에는 흉노가 그리 큰 세력이 아니었다. 인접한 조(趙)나라와 연(燕)나라가 오랫동안 그럭저럭 통제하던 작은 세력이었다. 그런데 진 나라의 통일 무렵에 갑자기 중원 전체를 위협하는 큰 세력으로 나타난 것이 어찌 된 일일까?

전국 말기 중원의 대혼란을 피해 많은 인구가 흉노 지역으로 넘어갔다.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넘어온 것도 그런 상황 속에서였다. 망명자 중에는 큰 세력을 이끈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있었다. 한나라 초기에는 한왕(韓王) 신(信)과 연왕(燕王) 노관(盧綰) 같은 제후들까지 흉노로 넘어갔다. 그런 망명자들이 많은 선진기술을 가지고 갔을 것이다. 제철(製鐵)을 비롯한 생산기술부터 정치기술과 병법(兵法)까지. 대규모 기술 유입이 아니라면 이 시기 흉노의 급속한 세력 확장을 설명할 수 없다.

<사기> '흉노열전'에 중항열(中行說)이란 인물이 보인다. 문제(文帝) 때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에 귀순한 환관인데 그의 논설에서 망명자들이 흉노에 공헌한 전형적 방식을 읽을 수 있다.

처음 흉노는 한나라의 비단, 무명, 음식 등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중항열은 그 점을 들어 선우(單于)에게 진언하였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군(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한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풍습을 바꾸어 한나라 물자를 좋아하시게 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서 채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게 되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은 점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한나라의 음식을 얻게 되시거든 이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젖과 유제품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그는 선우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인구와 가축의 통계를 조사하여 기록하도록 시켰다.

'흉노열전'에는 묵특(冒顿, '묵돌'로 읽기도 한다.) 선우(单于)가 흉노의 세력을 크게 일으키는 과정도 적혀 있다. 진나라에서 한나라로 넘어오는 무렵의 일로 보인다.

묵돌이 선우에 올랐을 당시 동호(東胡)가 세력이 강하였는데, 묵돌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듣자 묵돌에게 사자를 보내 말하기를 두만(頭曼, 묵돌의 아버지)이 가지고 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청하였다. 이에 묵돌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였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그들에게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돌은 이렇게 말하였다. "서로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천리마를 동호에 보내주었다.

얼마 뒤에는 묵돌이 자기들을 무서워하고 있는 줄로 안 동호가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연지(閼氏 선우의 부인과 첩) 중에 한 사람을 얻고 싶다고 청하였다. 묵돌이 또 좌우에 물었다. 좌우는 모두 성을 내며 말하였다. "동호는 무례합니다. 그러기에 연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병해서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묵돌은 이렇게 말하였다. "남과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사랑하는 연지 한 사람을 골라 동호에게 보내주었다.

이로써 동호는 더욱 교만해져서 서쪽으로 침략해왔다. 당시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천여 리에 걸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황무지가 버려져 있었다. 쌍방은 각각 자기들의 변경의 지형에 따라서 수비 초소를 세워놓고 있었다. 동호는 사자를 보내 묵돌에게 이렇게 전하였다. "흉노와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수비초소 이외의 황무지는 흉노로서는 어차피 무용지물이니까 우리가 차지하였으면 좋겠소." 묵돌이 이 문제를 대신들에게 묻자 몇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이건 버려진 황무지 땅입니다.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묵돌은 크게 성을 내며 말하였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그들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이냐?" 그리고는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참수한 다음 곧 말에 오르며 전국에 명을 내렸다. "이번 출전에서 후퇴하는 자는 즉시 죽이겠다." 동호는 처음에 묵돌을 업신여겨 흉노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묵돌이 군사를 이끌고 습격하여 순식간에 동호를 대파하였고 그 왕을 죽였으며 백성을 사로잡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묵돌은 돌아오자 이번에는 월지(月氏)를 쳐서 패주시켰고, 남쪽으로 누번왕, 백양 하남왕 등의 영지를 병합하였다. 또 연(燕)과 대(代)를 공격하여 일찍이 진나라의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사기열전>(정범진 외 옮김, 까치 펴냄) 803~804쪽)

가치관의 전환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여자도 버릴 수 있고 명마도 버릴 수 있지만, 땅은 버릴 수 없다는 묵특의 관점, 이것은 유목민의 관점이 아니다. '영토' 국가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전환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죽은 신하들은 '영토' 같은 것 생각지 않고 마음대로 옮겨 다니며 살던 시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춘추전국시대를 지내는 동안 흉노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들에게 남쪽 농경사회로부터 압력이 늘어났다. 우월한 무기와 전술을 가진 농경민이 유목민을 핍박하는 장면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떠올리면 되겠다. 인디언이 소총을 구해 백인에게 대항한 것처럼 화살촉 등 철제 무기를 구해서 전투력을 늘리고, 대규모 공격에 맞서기 위해 조직 확장에도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단계에서 고급 기술과 큰 조직을 가진 중국인 집단이 대거 유목민 지역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중원의 전란이 극도에 이른 때문이었다. 이 망명집단이 가져온 지적-물적 자원을 발판으로 남쪽의 제국에 대항하는 북쪽의 제국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북쪽 제국은 자체적 존재 이유(raison d’etre)를 갖지 못한 '그림자 제국'이었다. 유목사회의 속성은 제국 수준의 거대한 정치조직을 스스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남쪽 제국의 위협 때문에 거대한 군사조직을 만든 것이고, 남쪽 제국과의 관계에서 얻는 이득으로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유지된다. 그런 중에 남쪽 제국이 무너지면 북쪽 제국이 천하 전체를 위한 대안(代案)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천하를 화하(華夏)와 이적(夷狄)으로 구분했지만, 이적에게도 중화문명의 한 부분으로 볼 측면이 있었다. 천하의 주변부에서 화하와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을 뿐, 그 존재 양식은 중화문명에 의해 규정된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중국 역사에서 치란(治亂)의 반복을 천하시스템의 구조조정 패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적의 존재는 시스템의 한계를 표시하는 것이고 그 한계가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면 난세가 온다. 난세에는 시스템의 재조정 과정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새외(塞外)의 오랑캐는 중화제국에게 귀찮은 존재였고 때로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제국보다 상위의 천명(天命), 천하 시스템의 실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은 존재였다. 역사를 통해 정복왕조를 세운 오랑캐 중 누구도 애초부터 천하를 탈취할 야욕으로 세력을 키운 자가 없었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기존 제국이 무너져 천명을 대신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진한제국의 통일 과정에서 흉노에 투항한 사람들, 명나라 말년의 절망적 혼란 속에서 청나라에 투항한 사람들은 대안(代案)의 천명을 찾아간 것이다. 만리장성에는 대안 천명의 인큐베이터 기능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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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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