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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가슴, 조국의 머리, 그리고 윤석열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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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가슴, 조국의 머리, 그리고 윤석열의 손 [김기협의 퇴각일기]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당 태종(唐 太宗)이 어느 날 위징(魏徵)에게 경의 소원이 무엇인가 물었다. 위징이 서슴지 않고 대답하기를 "신(臣)은 충신(忠臣) 아닌 양신(良臣) 되는 것이 소원이나이다." 충신과 양신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어 물으니 대답하기를, 폭군에게 충성하다가 억울하게 죽는 것이 충신이고, 현군을 만나 표 안 나게 묻어가는 것이 양신이라고 했다.

위징은 중국의 역사를 통해 바른 소리, 쓴소리로 명성을 남긴 인물인데 이 문답도 그의 걸작품의 하나다. 자기 소원을 묻는 황제에게 대답이 "폭군 노릇 그만 하세요. 나는 충신 하고 싶지 않아요"라니.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실린 이런 이야기가 실감 나는 것은 태종이 폭군의 소질을 다분히 보인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즉위부터 폭력으로 이뤄졌다.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이라는 쿠데타로 태자였던 형 건성(建成)과 아우 원길(元吉)을 제거하고 아버지 고조(高祖)를 강박해서 황제가 되었다.

위징은 원래 태자의 막료로서 건성에게 동생 세민(世民), 즉 태종을 경계하도록 여러 번 권한 일이 있었다. 쿠데타 성공 후 태자가 된 세민이 위징을 꿇려놓고 "네가 왜 우리 형제를 이간시켰느냐!" 호통칠 때 주변에서 모두 그를 죽일 줄 알았다. 위징은 "옛 태자께서 소신의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의 화(禍)는 없었을 것입니다." 태연히 대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뜻밖에도 그가 소임에 충실했다고 칭찬하며 중용했다. 충신 노릇 그만하고 싶다던 위징의 마음은 참으로 절실했을 것 같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한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며 충신 노릇 싫다던 위징 생각이 난다.

위징이 충신 노릇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처한 환경 때문이었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과 남북조(南北朝)의 기나긴 난세(亂世) 끝에 천하가 통일되기는 했지만 아직 치세(治世)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치세를 가져올 희망을 태종이 보여주고는 있었지만 불안한 요소가 여전히 많았다. 충신의 역할이 필요했다. 18년 후 위징이 죽자마자 태자의 폐립, 고구려 정벌 등 태종이 파탄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치세란 누구에게도 특별한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 세상이다. 재산이 있으면 있는 대로, 재주가 있으면 있는 대로, 자신과 가족을 위해 누리면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윤석열 총장이 자기 태도를 밝히는 말에서 굳이 "충성"이란 표현을 쓴 것은 이 사회가 처한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 같다. 그런 위기감이 있다면 엘리트의 권리보다 엘리트의 의무를 더 많이 생각할 것 같다.

<사기(史記)> 열전(列傳) 중에는 "순리(循吏) 열전"과 "혹리(酷吏) 열전"이 있다. 순리는 너그러운 자세로 일에 임하여 사회의 긴장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치세에 바람직한 도가적(道家的) 공직자상이다. 혹리는 엄격한 자세로 일을 처리해서 긴장을 높이는 역할이다. 난세에 필요한 법가적(法家的) 공직자상이다.

한(漢)나라 초기에는 진(秦)나라의 법가 경도를 꺼려서 유가(儒家)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제국 운영에 유용한 법가를 많이 등용했다. 특히 사마천(司馬遷) 당시인 무제(武帝) 때 혹리의 역할이 컸다.

이 시기의 대표적 혹리인 장탕(張湯)은 법체제의 정비와 집행을 엄혹하게 한 공로로 크게 출세한 인물인데 후에 모함에 걸려들어 엄혹한 법 집행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결백함을 밝히려고 발버둥 칠 때 오랜 동료 조우(趙禹)가 타일렀다. "자네의 고발로 신세를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자네가 쓰던 법망에 이제 자네가 걸려들었는데 이 법망을 어떻게 무너뜨리겠단 말인가?" 이에 장탕은 체념하고 자살했으며 덕분에 그의 명예와 자손은 보전되었다고 한다.

조국 법무장관과 관련된 수사에서 검찰이 관행을 깨트리는 적극적 태도를 보이자 윤 총장이 충성한다는 "조직"이 과연 무엇인가, 뒷말이 무성해졌다. 정치계와 언론 일각에서는 검찰조직의 조직 이기주의를 떠올린다. 조직폭력의 ‘조직’을 연상하는 모양이다.

이것은 "뭐 눈에 뭐만 보이는" 격이다. "사람"과 "조직"을 대비시켰을 때 사람은 ‘개인’을, 조직은 ‘시스템’을 뜻하는 것 아니겠는가. 특정 인물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타당성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윤석열에게 어떤 조직보다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검찰조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문제는 검찰조직에 대한 그의 충성이 공익을 위한 것이냐, 사익을 위한 것이나 하는 데 있다. 양승태의 법원조직에 대한 충성(?)은 사익을 위한 것이었다. 법원에 자리가 많이 생기고 그것이 자신의 개인적 이득으로 돌아오기 바란 것이다. 그래서 국가사회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일으켰다.

과연 윤 총장이 자신의 말대로 "검찰주의자 아닌 헌법주의자"인지는 앞으로 확인될 일이다. 내 생각으로는 검찰주의자라도 괜찮다. 제대로 된 검찰주의자이기만 하다면. 요즘 세상에는 무슨 주의 무슨 주의 하고 떠받드는 시늉을 하면서 실제로는 이용만 하려 드는 사이비 주의자들이 너무 많다. 투철한 검찰주의자라면 동시에 헌법주의자이기도 할 것이다. 검찰의 유아독존이 아니라 헌법 체계 안에서 검찰의 가치를 추구할 것이므로.

다른 어느 국가기관보다 검찰의 개혁이 시대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 진정한 역할, 법치 원리의 실현이 이 사회에서 너무나 아쉬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혹리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혹리의 역할을 맡을 제일 적합한 제도가 검찰이다. 필요한 검찰개혁의 핵심은 검찰의 힘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남용을 막도록 운영 방법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공직자비리수사기관(공수처) 설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설치로 개혁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공수처에 일부 업무를 넘겨주더라도 많은 업무와 권한을 지키고 있을 검찰을 제대로 된 국가기관으로 만드는 데 개혁의 본질이 있다.

이 사회에 혹리의 시대가 열리기 바란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청와대고 언론이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가차 없이 다스리는 사정기관을 보고 싶다. 공수처라도 좋고 검찰이라도 좋다. 이 사회가 번영을 추구하든 평등을 모색하든 모든 일에 앞서 법치(法治)의 원칙을 세워놓을 필요가 있다.

법치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한 가지 법치에 관한 오해는 짚어놓고 싶다. 법치를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법이 다스리는 것"으로 보는 견해다. 인치(人治)에 하도 시달리다 보니 사람 아닌 법에 매달리고 싶은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눈도 없고 마음도 없는 법이 어떻게 사람을 다스려 주겠는가? 진 시황(秦 始皇)이 죽었을 때 환관 조고(趙高)가 권력을 농락한 것이 사람을 빼고 법만 남겨놓았기 때문이었다.

당 태종이 법치의 좋은 모범을 보인 고사가 있다. 오랜 심복 당인홍(黨仁弘)이 독직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를 차마 죽일 수 없었던 태종은 신하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법이란 하늘이 임금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사사로운 정으로 당인홍을 풀어주고자 하니,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남교(南郊)에 멍석을 깔아 하늘에 죄를 고하고 거친 밥을 먹으며 사흘 동안 근신하여 이 죄를 풀고자 한다." 그리고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같은 처벌을 자신에게 내렸다.

현무문의 쿠데타 이전부터 목숨을 자신에게 맡겨놓았던 최측근 인물의 재판에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엄정한 판결이 내려진 뒤에 지금 세상에서도 ‘특별사면’으로 통할 만한 조치를 취하면서 스스로에게 상징적 처벌을 가한 것이다. 이 조치가 어떤 효과를 일으켰을까? 황제의 측근들은 당인홍이 처형당했을 경우보다 더 애통해하며 처신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황제의 측근들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황제의 엄정함에 승복했을 것이다.

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회에도 법치다운 법치가 세워질 때가 된 것인지, 그 일에 나설 법률가 세 사람의 모습이 두드러져 보인다. 문재인의 가슴(도덕성), 조국의 머리(기획력), 그리고 윤석열의 손(실천력)이 합쳐지는 것이 법치 확립의 필요조건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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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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