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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최초의 성공적 비밀공작...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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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CIA 최초의 성공적 비밀공작...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막아라

[전쟁국가 미국·4강-③] "세계를 지배하려면 에너지를 지배하라"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를 확보했다. 그 결과는 군사적 일방주의였다. 외교나 협상 대신 군사력에 의한 일방적 강제가 대외정책의 핵심 수단이 된 것이다. 그 첫 사례가 1953년 8월 중앙정보국(CIA)의 이란 모사데크 정권 전복이다. 이는 미국 최초의 비밀공작이었고, 이후 아이젠하워 행정부 8년 동안 48개 국가에서 170차례의 비밀공작을 벌였다.

케네디 행정부 출범 직후인 1961년 4월 쿠바 피그만 침공의 실패로 CIA 비밀공작의 실체가 처음으로 일반에 알려졌다. 그러나 케네디 행정부는 이후에도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위한 비밀공작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여기에 핵전력의 치명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소련의 쿠바 핵무기 배치가 맞물리면서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인류 최초의 핵전쟁 위기였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주로 비밀공작에 의한 대외 개입을 추진한 반면 케네디 행정부는 재래식 군사력을 추가하면서 더욱 적극적인 대외 개입에 나섰다. 남베트남에 대한 군사 지원 확대가 그것이다. 이후 존슨 행정부는 1964년 8월 베트남전쟁에 전면 개입했으나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으로 전쟁에서 손을 뗐다. 사실상 미국의 패배였다. 1953년 이후 20년에 걸친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은 실패로 드러났다. 군사주의는 미국의 국제적 평판과 경제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미국은 스스로 외교의 최고 원칙으로 내세워온 '민족 자결'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란, 쿠바, 베트남의 민족적 자기 결정을 군사력으로 막거나 방해했기 때문이다. 자국의 석유자원을 국유화한 모사데크 정권을 전복시켰으며,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을 좌초시키려 했고, 베트남의 통일을 막고 분단을 유지하려 했다.

이들 국가들은 애초부터 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도움을 기대했고 미국과의 교류를 원했다. 미국의 '민족 자결' 약속을 액면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들 국가들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성향을 친소, 반공으로 몰아 그들의 '민족 자결'을 무산시키고 방해했다. 그 결과는 세계 평화의 파괴다.

이란에 대한 비밀공작은 단기적으로는 정권 교체에 성공했으나 1979년 이슬람혁명 및 반미 정권 탄생의 빌미가 됐고 오늘날 대중동지역이 세계 최대의 분쟁지역이 되는 최초의 도화선이 됐다. 카스트로 정권 전복 시도는 인류 최초의 핵전쟁 위기를 불러왔다.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은 1956년 남북 총선거로 진즉에 마무리됐어야 할 베트남 통일을 20년 가까이 늦추면서 동아시아를 30년 전쟁에 몰아넣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미국 군사주의의 성적표다. 이란을 시작으로 베트남전쟁까지 미 군사주의의 실체를 알아본다.

이란의 석유 국유화와 좌절

동아시아에서 한국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중동의 이란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총성 없는 전쟁이었다. 1950년 6월 이란의 민족주의 정치가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자국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제안한 것이다. 모사데크는 1951년 4월 석유 국유화를 단행했지만 1953년 8월 미국의 비밀공작으로 축출됐고, 석유자원 국유화도 실패하고 만다.

이란의 석유자원 국유화 실패는 미국이 내세운 민족 자결 원칙의 허구와 기만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자국의 석유를 자국의 필요에 맞게 사용하려는 이란 정부의 정당한 노력을 불법적 방법에 의해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은 공산화의 위협을 이유로 모사데크 정부를 전복했다. 그러나 속내는 중동에서의 미국 패권 유지와 미영 석유 카르텔의 세계 석유자원 독점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미국에게 민족 자결은 허울 좋은 수사에 불과했다.

1951년 4월 28일 이란 의회가 석유자원 국유화를 단행했다. 1901년 이후 이란 석유를 독점 개발해 온 영국 국영 영국이란석유회사(AIOC; Anglo-Iranian Oil Company)를 국유화 한 것이다. 같은 날 석유자원 국유화를 주도해온 모사데크가 총리에 취임했다. 자원민족주의의 시작이다.

당시 이란은 세계 최대의 유전지대였다. 세계 최대의 아바단 정유공장도 이란에 있었다. 또한 AIOC는 영국 최대의 외화(달러) 수입원이었다. 영국으로서는 결단코 국유화를 막아야 했다. 영국 정부는 군사력을 동원해 국유화를 저지하려 했으나 미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한국전쟁을 치르던 미국은 영국의 군사 개입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소련의 군사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예상했고, 그 경우 승리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다. 1951년 5월 미국은 만일 소련이 이란 사태에 군사 개입한다 해도 이에 맞대응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확정한다. 이란을 지키기 위해 소련과 전면전을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영국과 이란에 대해 협상에 의한 해결을 촉구했다. 실제 1951년 7월부터 중재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2년 이상 지속되던 대치 상태는 1953년 8월 모사데크의 실각, 그리고 자원 국유화의 실패로 마무리된다. CIA 최초의 비밀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당초 협상에 의한 해결을 추구하던 미국이 비밀공작에 의한 외국 정부 전복에 나선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대적 군비 증강에 따른 미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 확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대대적 군비 증강에 나선 미국은 1952년 중반이 되면 소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신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52년 7월에는 모사데크 제거를 고려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이란을 지키기 위해 소련과 전면전도 불사한다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다. 트루먼 행정부 말기인 1953년 1월 8일 모사데크 정부 전복을 위한 비밀공작 계획이 확정된다. 즉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가 군사적 일방주의를 추동한 것이다.

이란, 중동 최초의 거대 유전

1901년 호주 출신의 영국인 광산부자 윌리엄 녹스 다시는 이란 정부로부터 60년 간의 석유개발권을 획득한 후 7년 간의 탐사 끝에 1908년 5월 이란 남부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했다. 그는 1909년 영국페르시아석유회사(APOC)를 설립한 후 은퇴했고 이 회사는 1913년 영국 정부 소유가 된다.

석유의 미래 전략적 가치를 꿰뚫어본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의 강력한 요청으로 영국 정부가 지분 51%를 매입한 것이다. 1935년 페르시아의 국호가 이란으로 바뀌면서 회사 이름은 영국이란석유회사(AIOC)로, 모사데크 실각 후인 1954년에는 브리티시페트롤륨(BP)으로 바뀌었다.

▲ 영국이란석유회사(AIOC) 관계자들 ⓒ위키피디아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 유전이 개발된 나라다. 그러나 석유자원의 과실은 온전히 영국 몫이었다. 이란 정부는 석유 이익의 16%를 로열티로 받게 돼있었지만 실제로는 영국 정부가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란 정부 대표가 AIOC 이사회에 참여할 수 없었고, AIOC는 경영 상황을 이란 정부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란이 보다 정당한 배분을 요구할 때마다 영국은 군사력으로 억눌렀다.

AIOC의 영국인 경영진과 기술자들은 수영장이 딸린 호화주택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동안 이란 노동자들은 하루 50센트의 임금을 받고 상수도, 전기, 하수시설도 없는 집단주거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이란은 영국 정부에 대해 석유 이권 분배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란 측 계산에 따르면 1948년 AIOC가 3억 2천만 달러의 이익을 올린 반면 이란에 지불된 로열티는 3600만 달러에 불과했다. 1948년 이란의 로열티 수입은 917만 파운드, 영국 정부가 AIOC로부터 거둬들인 조세 수입만 1803만 파운드였다. AIOC의 1950년 한 해 이윤이 지난 50년간 이란 정부에 지불한 로열티보다 많다는 평가도 있다.

특히 1938년 멕시코가 석유산업 국유화를 단행한 데 이어 미국 석유기업들이 1949년 베네수엘라와, 1950년 말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석유 이윤을 50 대 50으로 나누기로 하면서 이란의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50 대 50 배분은 2차 대전 후 발언권이 강해진 산유국들을 달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문제는 미국 기업은 정부의 도움으로 이를 감당할 수 있었지만 영국 정부는 감당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스탠다드 등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은 그동안 미국에 내왔던 법인세를 사우디에 납부하는 방식으로 사우디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반면 단 1달러의 외화 수입이 아쉬웠던 영국 정부로서는 AIOC에서 최대한의 수입을 올려야 했다. 따라서 이란에 양보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모하마드 모사데크

결국 당초 50 대 50 수입 배분을 요구했던 이란은 1950년 6월부터 석유자원 국유화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1951년 4월 마침내 이를 단행한다. 국유화는 이란 의회(majlis), 그중에서도 모하마드 모사데크(1880~1967년)라는 늙은 애국자의 주도에 의해 이뤄졌다. 그가 석유 자원 국유화의 선봉장으로 떠오르는 과정은 당시 이란의 민족 자결 움직임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다.

모사데크는 카자르왕조(1779~1925년) 시절 20년간 재무대신을 지낸 아버지와 공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프랑스, 스위스에서 유학했고 이란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1906년 카자르왕조가 입헌군주제로 바뀐 이후 국회의원(1915년), 법무장관(1917년), 재무장관(1921년) 등을 역임했다.

1921년 코사크 사령관 레자 칸이 쿠데타로 카자르왕조를 무너뜨린 뒤 1925년에는 스스로 왕이 되어 팔레비왕조를 창건했을 때 모사데크는 이에 반대한 의원 4명 중 한 명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해외로 추방됐고 1941년 8월 레자 샤가 연합군에 의해 강제 퇴위된 후 귀국해 1944년 다시 국회의원이 됐다.

이란은 1907년부터 북부는 러시아, 남부는 영국의 간접 지배 아래 있었다. 이 때문에 이란 국민의 영국, 러시아에 대한 반감은 대단했다. 특히 AIOC의 석유 이권 침탈로 영국을 더욱 미워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레자 샤는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1941년 6월) 직후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침공해 각각 남부와 북부를 군사 점령하고 그를 퇴위시킨 후 아들 모하메드를 왕위에 앉혔다. 핵심 전략자원인 이란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사람이 팔레비 국왕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말하자면 그는 연합국의 꼭두각시인 셈이다. 그 후 연합국은 이란을 통해 180억 달러 상당의 미국 렌드리스 군수물자를 소련에 수송했다.

전시 중립을 선언한 이란을 군사 점령한 것은 불법적 조치였다.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이란 의회는 1944년 12월 모든 외국군 철수 때까지 의회를 열지 않겠다며 자진 해산했다. 또한 향후 외국과의 석유 협상은 반드시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모사데크다. 그는 민주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1947년 12월 이란 의회는 외국과의 기존 석유 계약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1948년 8월 이란 정부는 AIOC와 협상을 시작해 1949년 4월 이른바 '보충조약(Supplement Agrement)'을 타결했다. 하지만 로열티를 약간 상향 지급하는 내용의 이 조약은 이란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1949년 9월 영국이 파운드화를 평가 절하했고, 베네수엘라에서는 미국 기업이 석유 수입을 50 대 50으로 배분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평가 절하는 이란이 받는 로열티의 감소를 뜻한다. 이란 정부는 최소한 평가 절하 분만큼은 보전해 주길 요구했으나 AIOC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의회 비준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1949년 10월 총선을 앞두고 모사데크는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연좌농성을 벌였으며 석유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 결과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의원이 여럿 당선됐다(당시 팔레비 국왕은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받기 위해 방미를 앞두고 있었다. 미국의 환심을 사려고 총선에 대한 불법 개입을 삼갔기 때문에 선거는 공정하게 치러졌다. 팔레비는 수개월 동안 미국에 머물며 원조를 위한 로비 활동을 펼쳤으나 실패한다). 모사데크 등 8명의 의원은 '인민전선'을 결성했고 이후 이들이 석유 국유화의 선봉대가 된다.

1950년 6월 모사데크가 석유 국유화를 제안하자 영국은 이를 막기 위해 팔레비국왕에게 친영파인 알리 라즈마라 장군을 총리에 기용할 것을 권유한다(1950년 6월 26일 취임). 그는 보충조약의 의회 비준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석유사업과 같이 복잡한 산업을 이란 독자적으로는 운영할 수 없다며 국유화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12월 모사데크가 의회 석유위원회 위원장에 오른다(인민전선 의원 4명 참여). 12월 30일 사우디가 50 대 50 배분에 합의하면서 이란의 민족주의 열기는 끓어오른다. 뒤늦게 영국이 50 대 50을 제안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라즈마라는 1951년 3월 7일 이슬람 세력에 의해 암살됐다. 이제 국유화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정치인은 살아남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1951년 4월 28일 모사데크가 총리에 임명되면서 국유화가 단행된다. 1944년 단기필마로 시작한 석유 국유화 운동이 의회 내 동조세력을 규합한 데 이어 그가 석유위원장, 총리에 오르면서 7년 만에 그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슬람 세력을 비롯한 이란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가 원동력이었다.

당시 이란의 한 라디오 방송은 "지난 50년간 이란의 모든 고통과 비참함과 부정부패는 석유, 그리고 (영국) 석유기업의 착취 때문이었다"며 석유 국유화를 축하했다.

모사데크는 영국 외교관들에게 자신은 영국과 똑같은 정책을 펴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의 석탄, 철강 산업 국유화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석유 국유화는 이란의 자원을 국민 복지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나아가 폭력 혁명을 막기 위해 필요한 개혁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냉소와 경멸이었다. 한 영국 외교관은 "우리는 지난 수 백년간 원주민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경험을 쌓아왔다"면서 "영국에서 사회주의는 괜찮지만 해외에서 우리는 주인이 돼야만 한다"고 말했다.

미국, 이란과 영국 사이에서 줄타기

주권 국가인 이란은 자국 영토 안의 어느 회사든 국유화 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이란은 국유화법에 따라 영국에 정당한 보상을 한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국유화 이전 영국이 가져갔던 만큼 석유 공급을 계속할 것임을 영국에 보장했으며 AIOC 근무 영국인의 고용 승계도 제안했다.

하지만 영국은 군사력을 동원해 국유화를 무산시키려 했다. 1951년 6월말 영국 전함이 이란 해안에 출동했다. 영국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아바단 정유공장을 탈취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이 강력히 반대했다. 이란에 대한 군사행동은 물론 비정상적 방법에 의한 총리 교체에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군사 개입이 소련의 군사개입을 불러오고, 그 경우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데 당시의 미국 전력으로는 승리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소련은 1921년 이란과의 우호조약으로 외국군이 이란을 침공할 경우 군사 개입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를 갖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전쟁을 국지적 내전이 아닌 소련의 군사력에 의한 세계 공산화 음모의 시작으로 보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이 3차 대전을 각오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소련의 다음 공격 대상이 어딘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서독, 유고슬라비아, 이란 등이 대상으로 꼽혔다.

특히 이란은 거대 산유국인 데다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란이 공산화되면 사우디를 비롯해 세계 산유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중동 전체가 소련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게다가 3차 대전이 일어나면 개전 초기 서유럽을 소련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이 미 군부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소련과의 전면전을 치르려면 이란을 비롯한 중동지역을 미국의 영향권 아래 두어야 했다. 중동지역이 소련 공격의 교두보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 말 미 군부의 판단은 이란을 지키기 위해 소련과 전면전을 치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NSC-68에 의한 미국의 군비 증강은 1950년 12월에 시작됐다. 완료 목표는 1952년 말까지. 당시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는 미국의 군사력 증강이 아무리 빨라도 18개월이 걸릴 것이라면서 1952년 중반까지는 소련과의 전면전을 피해야 한다고 밝혔다.

즉 이란은 석유 국유화를 단행했고, 영국은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무산시키려 했으며, 미국은 이란이 소련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란을 지키기 위해 소련과 전면전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미국의 해법은 이란과 영국을 중재해 협상에 의한 해결을 시도하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애치슨 국무장관은 1951년 3월 라즈마라 총리가 암살된 직후 영국과 이란이 합의만 한다면 국유화도 받아들일 수 있는 해법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합법, 불법을 막론하고 석유 국유화를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국인 은 어리석다고까지 말했다. 1951년 7월 그는 트루먼 대통령을 설득해 소련 및 영국 대사를 지낸 민주당의 정치 거물 에이브럴 해리먼을 이란과 영국에 대통령 특사로 파견했다.

미국의 중재 실패

하지만 이란이 국유화를 고집하는 한, 협상에 의한 해결은 실현 불가능한 과제였다. 국유화란 산유국이 스스로 석유를 생산하고 가격을 매겨 시장에 판매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산량과 가격 결정의 권리를 산유국이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1930년대 이후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해온 이른바 '세븐 시스터즈' 즉 미영 석유 카르텔의 독점체제를 파괴하는 행위다. 즉 미국과 영국의 거대 석유기업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해리먼이 모사데크와의 수 차례 면담에서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그는 국제석유체제(International Oil System)의 실상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설명하면서 그를 설득하려 했다. 국제 석유시장에서 수요 공급의 법칙 따위는 없으며 석유 가격은 카르텔이 마음대로 정한다는 것, 이란의 석유 국유화는 현행 국제석유체제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므로 이윤 배분을 늘리는 선에서 만족하라는 것이었다. 모사데크는 거부했고 협상은 실패했다.

모사데크의 가장 큰 정치적 실수는 전략적 석유 지배권을 지키려는 미영 석유 카르텔의 의지와 능력이 얼마나 강고한가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다.

1951년 9월 12일 모사데크는 AIOC의 모든 영국인 직원에 대해 15일 이내 퇴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영국은 이란의 석유 수출을 금지하고 군대를 동원해 해상봉쇄를 단행했다. 경제 목조르기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석유 메이저들이 금수조치에 참여했고, 미국 정부는 자국 중소 석유기업의 이란산 석유 구매를 금지했다. 1952년 2월 이탈리아가 구매한 석유는 예멘 근해에서 영국군에게 압수당했다. 석유 판로가 완전히 막힌 것이다.

이란의 석유 수입은 1950년 4억 달러에서 1951년 7월에서 1953년 8월 모사데크 축출 때까지 2년 여간 2백만 달러로 급감했다. 나아가 1952년 2월 양국 국교가 단절되면서 영국은 자국 내 이란의 파운드화 자산을 동결하고 설탕, 철강 등에 대한 금수조치를 내렸다.

1951년 9월 모사데크는 유엔 안보리 연설을 통해 유엔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정부의 협조를 구했으나 별무소득이었다. 석유 국유화는 미국도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국무부로부터 들은 유일한 제안은 영국계 석유 메이저인 로열더치셸을 이란쪽 경영회사로 지명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안보리 연설은 전 세계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1952년 1월 <타임> 선정 올해의 인물에 뽑히기도 했다. 1951년 10월 총선에서 6년 만에 총리에 복귀한 영국의 처칠, 20년 만에 백악관을 탈환한 아이젠하워, 전격 해임으로 미국을 충격에 몰아넣은 맥아더 등을 제칠 만큼 그의 석유 국유화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사건이었던 셈이다. <타임>은 모사데크가 '완고한 기회주의자'이긴 하지만 '이란의 조지 워싱턴'이자 '지난 수 세기동안 이란이 낳은 가장 세계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처칠의 총리 복귀로 협상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는 AIOC의 국영화와 1차 대전 후 중동 지역 장악 등 영국의 석유 패권을 확보한 핵심 주역이다. 또한 이를 자신의 주요한 업적으로 여겼다. 그는 총리로 복귀하기 이전, 이란의 석유 국유화에 대해서 '총알 몇 방이면 끝날 문제'라며 제국주의적 야만성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확보한 석유 패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는 영국 병사 7만 명을 동원해 이란의 유전과 아바단 정유시설을 장악할 계획이었다. 이에 반대하는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 '영국이 한국전쟁을 지원한 답례로 영국의 대이란 군사행동을 지원하라'고 맞받았다. 심지어 "이란은 한국보다 중요하다. 이란을 통해 석유의 안정적 공급을 확보하는 것은 소련의 침략을 저지하는 중요한 요소다"라고까지 말했다.

1952년 7월까지도 교착 상태는 지속됐다. 영국이 이 문제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재정 신청을 제기했지만 7월 22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영국의 재판 관할권을 부인하고 사안을 이란 국내 재판 관할권에 회부했다.

이와 관련, 1952년 12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네드 러셀 기자는 영국이 감행하고 미국까지 가세한 엄청난 금융 및 경제 봉쇄로 고난을 겪으면서도 트루먼과 처칠에게 '아니라'로 말할 수 있는, 모사데크처럼 용기 있는 약소국 지도자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러셀은 "미국과 영국이 함께 모사데크에 맞서는" 것이 처칠의 책략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의 군사력 증강과 정책 전환

1952년 여름이 되면서 미국의 태도가 변화한다. 이란과 영국 간 공정한 중재 대신 모사데크를 협상의 걸림돌로 간주한 것이다. 1952년 7월 24일 미 국무부가 작성한 비망록은 "모사데크가 권좌에 있는 한 국유화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사라진다면 양측은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이고 석유 문제도 타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7월 29일 국무부는 국가안보회의(NSC) 보고에서 "공산 세력이 단독으로 또는 인민전선 내 좌익 세력과 연합하여 정권을 장악할 위험성이 있다"면서 "그 경우 미국은 영국과 함께 이란 내부 세력의 반란을 조장해 이란이 소련 세력권에 흡수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란 문제 해결의 초점이 석유 문제 타결에서 모사데크 제거로 옮겨간 것이다. 이란 공산화의 위험이 그 근거였다. 1952년 8월 미 공군은 이란이 공산화의 위협에 처해 있다면서 이란을 서방 진영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보다 과감한 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유사시 이란 전쟁 계획도 작성됐다.

1952년 10월 24일 로버트 로벳 국방장관은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제 상황은 우리의 전략적 결단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란을 구원할 책임을 받아들이고 즉각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1952년 11월 20일 채택된 NSC-136/1에서 최종 확정된다. 첫째, 소련이 이란을 침공할 경우 이는 교전 원인(casus belli)으로 간주한다. 즉 소련이 이란을 침공하면 전면전을 벌인다는 뜻이다. 둘째, 이란의 안정을 위해 영국과 함께 특수 정치 공작을 벌인다. 모사데크 제거를 위한 비밀공작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란에 대한 CIA 비밀공작은 1953년 1월 8일 백악관의 승인을 받는다. 아이젠하워 취임 열이틀 전이다. 그리고 아이젠하워 행정부 들어 본격 추진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인 커밋 루스벨트를 책임자로 한 비밀공작 팀은 1953년 8월 15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친 작전 끝에 결국 8월 20일 모사데크를 권좌에서 끌어내린다.

1952년 7월을 고비로 미국의 이란 정책이 전환된 결정적 원인은 미국의 대대적 군사력 증강에 따른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 확보다. 1949년 GNP 대비 4.9%였던 미국의 국방비는 1952년 17.8%로 치솟는다. 1953년 1월 미국의 군수물자 생산량은 1950년 6월의 7배에 이른다.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에 따른 자신감이 비밀공작을 가능케 했다. 소련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흔히 공산주의 격퇴(Rollback)를 내세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공산주의 봉쇄( Containment)를 기조로 한 트루먼 행정부보다 더 공격적이었기에 모사데크 제거에 나섰다고 말하지만 이는 틀린 얘기다. 앞에서 본 것처럼 미소 군사력 균형의 변화가 핵심 변수였다.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가 군사적 일방주의를 초래한 것이다.

모사데크는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였다. 그의 민족주의는 자국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지향했고, 민주주의자로서 팔레비국왕의 독재에 저항했다. 그는 미국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철저하게 배신당했다. 미국은 이란 공산화의 위험을 이유로 그를 제거했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석유 국유화였다. 미국의 세계 석유자원 통제에 대한 치명적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지배하라. 그러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헨리 키신저의 말은 이러한 미국의 태도를 잘 말해준다. 미국의 석유 지배권에 대한 도전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분쇄해야 했던 것이다.

모사데크의 등장은 자원민족주의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란의 첫 시도는 비록 실패했지만 20여년 후 이라크 등이 주도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의해 비로소 완수된다.

모사데크 정권 전복은 CIA 최초의 성공한 비밀공작이다. 이후 CIA는 모사데크 제거를 자신들의 최대 업적으로 자랑하면서 제3세계의 여러 민주 정부를 전복시킨다. 언제나 그 명분은 반공이었다. 맹목적 반공을 앞세워 민족 자결을 분쇄하려 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실패했다. 미국의 비밀공작은 제3세계의 민족자결에도, 미국의 민주주의와 안보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음 회부터는 미국은 왜 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저지해야만 했는지, 미국 비밀공작의 실상은 어떠했는지를 차례로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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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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