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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는 영화, <블랙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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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는 영화, <블랙머니> [김민웅의 인문정신] 영화 <블랙 머니>가 보여주고 있는 블랙코미디 한국의 속살
이 글엔 <블랙머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정지영 감독의 <블랙머니>, 또 하나의 폭탄

정지영 감독이 또 사고를 쳤다. 70대 중반에 접어드는 노장이 이런 식으로 후배 감독들 기를 죽여도 되나 싶다. 아니, 기를 죽인다기 보다는 더욱 분발하도록 만든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돈줄을 움켜쥔 권력 카르텔의 음모를 파헤친 영화 <블랙 머니>, 우선 무엇보다도 재미지다.

다루고 있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속도에 긴장감 넘치는 박력이 영화 전편에 출렁거린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정지영 감독 영화의 최고작이다. 결코 썰레발이 아니다.

<블랙머니>는 기본이 추리영화다. 그래서 영화의 얼개가 매우 촘촘하다. 영화를 보는 이들이 자기 나름의 추리력을 자신 있게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그 정도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하나 타짜가 카드 패 까듯이 보여준다.

관객을 존중하면서도 관객을 들뜨게 하는 감독의 작전이다. 게다가 전문용어가 나오니 일반이 이해하기 간단치 않은 경제사건을 알기 쉽게 풀어가는 솜씨가 “그동안 공부 좀 했네”, 이다. 6년이라는 시간이 시나리오 작업에 쏟아졌으니 그럴 만 하다.

겁도 없는 영화

전문용어라는 게 사실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걸로 사기 치기 딱 좋은 물건인데, 영화는 그 용어에 가려진 민낯의 현실을 드러내준다.

“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 비율”은 은행이 가진 자기자본이 어느 정도인가를 따지는 기준으로, 이게 낮으면 부실은행 취급받고 관리대상이 되어 헐값으로 새 주인에게 넘겨진다. 그런데 이게 만일 조작된 수치라면?

그 조작의 과정이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자들이 한통속이 되어 벌이는 일, 그것도 최고 권력층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이걸 밝혀서 잡아낸다는 건 자칫 목숨 거는 일이 된다. 영화는 그렇게 목숨이 사라지는 비극의 주인공들을 보여준다.

돈과 권력이 한 몸이 되면, 그건 이미 “제도화된 폭력”으로 군림한다. 이걸 다루었으니 영화 <블랙 머니>는 도대체가 겁도 없다. 감독이 그러니 배우들도 겁도 없이 연기한다.

그런 까닭에, 빈틈없이 펼쳐지는 장면이 관객을 숨 막히지 않게 하는 것은 주인공들의 개성강한 캐릭터로 치고 나가기 때문이다. 팽팽하게 조였다가 느슨하게 여지를 주고 다시 죄는 방식보다 윗길이다. 감독은 영화 속의 현실을 관객과 함께 밀고 나간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어느새 영화 속에서 자신이 주역이 된다.

그건 정의를 짓밟는 세력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짜릿한 쾌감이 동시에 폭발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영화와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지점에서 영화는 이미 성공한다. 픽션과 팩트가 한 몸이 되는 예술이 바로 대중예술이다, 감독과 배우는 관객을 위해 다른 모든 걸 뒤로 하고 여기에 집중한다.

▲ 영화 <블랙머니> 포스터

권력 카르텔의 정체를 밝힌다

그러나 무게 있으면서 가벼울 수 있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성 높은 영화가 오락과 문제의식을 함께 거머쥔다는 건 한국영화의 사활이 걸린 관건이다. <블랙머니>는 그걸 해내고 있다. 최근 영화의 수준이 우려되고 있는 한국영화의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칭찬이 그치지 않아도 될 만 하다.

분단의 역사를 가로지른 <남부군>(1990년), 사법피해를 다룬 <부러진 화살>(2011년), 권력의 야만을 폭로한 <남영동 1985> 등 그때마다의 금기 영역을 과감하게 파고들어 영화의 역사성과 정치적 의지를 보인 정지영 감독은 <블랙머니>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의 야만성을 다루고 있다. 이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현실이다.

영화는 외환은행 헐값 매각을 소재로 한국의 권력 카르텔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잘 알지 못했던 것들을 노련하게 배치, 우리가 그 정체를 포착해야할 자들이 누구인지 하나씩 밝혀낸다.

어쩌다 사건과 관련된 인물의 죽음으로 성추행 검사로 몰린 평검사 양민혁(조진웅 배역)은 상황파악 능력이 단순명료하다. 그래서 사건의 중심으로 돌진해서 까발리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 이런 힘 앞에서, 그동안 못된 짓을 하면서도 존경을 받고 있는 자들의 은폐된 정체는 더는 자신을 숨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권력 카르텔의 맹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는 당연하다. 의문사, 직위박탈, 회유, 협박은 기본이다. 이들의 정체에 다가가는 것은 그토록 위험하고 이들의 동맹체제 방어 전략은 오랜 세월 굳혀온 인맥이 움직이면 해결완료이다. 여기에 외국자본의 손까지 가세하면 사기는 글로벌 수준이 된다.

조진웅, 이하늬, 강신일 그리고 양기환

양민혁 검사와 공동주연을 이루는 김나리 엘리트 국제 변호사(이하늬 배역)는 바로 그 글로벌한 권력 카르텔의 법과 세련으로 포장된 현실을 보여준다. 조진웅과 이하늬의 조합은 이 영화를 긴장도 높게 끌고 나가는데 최적의 선택이었고, 둘 다 영화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연기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도록 해준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배우란 이런 거구나 라는 걸 유감없이 과시한다.

이 권력 카르텔의 지배전략에 도전하는 장 수사관(강신일 배역)과 인권변호사 서권영(최덕문 배역)등은 극 전체의 대치점을 명확히 드러낸다. 강신일의 연기야 이미 정평이 나 있고 최덕문도 이번 영화에서 얼핏 유약한 듯 하지만 강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을 잘 보여주었다. 이들의 탄탄한 연기력 못지않게, 김나리의 아버지 역으로 나온 남명렬을 비롯, 정지영 영화의 단골연기자 문성근, 이경영 등의 출연은 영화의 다채로운 개성을 발휘해주고 있다.

여기서 하나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다. 영화 <블랙머니>가 나오기까지 그 출발점에는 양기환 질라라비 대표가 있다. 그는 스크린쿼터 운동 당시부터 영화판에서 문화다양성 확보의 선두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고 (목소리가 또 좀 커야지) 외환은행 노조와 함께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

이번 영화의 제작자로 변신한 그는 거대자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한국의 현실을 어떻게든 깨보겠다는 생각 하나로 이 영화제작에 몰두했다고 하는데, 작은 거인답다.

스포일러 몇 개

정지영 감독은 아주 작은 장치에도 예리한 관객은 알아차리도록 의미를 부여한다. 장 수사관이 입원하면서 읽고 있는 책은? <사람이 사랑이다>이다. 전태일 재단 이사장 이수호 선생의 시집이다.

그는 정지영 감독 영화에 몇 번 카메오로 출연한 경력이 있다. 누구도 하기 어렵다는 이른바 “뒷통수 연기” 뒷통수만 나온 장면이 있기에. 이번에는 그의 시집이 대신 출연한 셈이다. 사람이 사랑이라는, 그 제목대로의 세상을 갈망하는 감독의 희망이 담겨 있다.

이 단락의 제목을 “스포일러”라고 했는데 사실 그럴 만 한 것은 아니고, 굳이 밝히자면 한국사회에서 내로라는 자들이 벌인 파티장면에 내가 나온다. 이게 진정한 스포일러가 아니겠는가? 진보 지식인이라고 알려진 인사의 정체가 다름 아닌 권력 카르텔의 멤버였다니!

물론 나라는 걸 알아보기 쉽지 않은 장면이기는 하나. 이 영화평을 쓰는 가장 절실한 목적도 바로 이 장면때문일 수도 있겠다. 내친 김에 하나 더 밝히자면, 이 영화의 영어대사는 내 손을 거쳤다.

가령, 처리, 제거하라는 말은 죽이라는 “kill”이 초안이었는데 중립화시킨다라는 뜻을 가진 neutralize로 바꾸었다. 이는 제거하라는 명령의 의미를 슬쩍 은폐하고, 알아서 잘 처리하지, 라는 뜻이 된다. 영화 구성상 이 용어가 맞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런 식의 용어가 진실을 가린다. 중립인 척 하면서 사실 나쁜 짓은 다 하는 자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스포일러 하나. 이 영화는 검찰개혁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대박이다. 이 영화 보는 건, 그래서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도 이런 영화로 사고 한번 치자, 천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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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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