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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부대'와 손잡은 불관용 세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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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태극기 부대'와 손잡은 불관용 세력들 [휴먼 라이츠 브리핑] 민주주의, 인권, 관용의 사회
최근 한국 사회는 전에 보지 못했던 유형의 인권에 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거 한국에서 인권을 회의하던 많은 이들은 문제되는 법이나 관행 등이 인권 이념이 발생했던 서구에서와는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서 발전한 것임을 강조하곤 했었다. 그래서 가령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다른 유교적 공동체주의나 무슨 '아시아적 가치' 같은 것을 내세우든가 아니면 한국 사회가 처한 분단 현실 같은 것을 내세우며 인권을 유보하거나 제한하는 일을 정당화하곤 했다. 이런 유의 인권에 대한 반대가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보기 힘들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 일반화된 반인권의 목소리들은 그런 과거의 도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단 이 새로운 도전의 기원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서구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신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매우 '극우적'이고 '근본주의적'이다. 그런 도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성경에 적혀 있다는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아주 적극적으로, 때로는 물리적 수단까지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차별금지법'이나 각종 '인권조례' 같은 법령들 그리고 이를 추진하는 정치인들을 막겠다고 그악스럽게 실천적 행동에 나선다. 어떤 경우에는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결합하여 극단적인 우익 정치 세력과 손을 잡기도 한다. 이 도전의 핵심에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가 있다.


이런 불관용의 선동과 실천에 우리는 어떻게 맞서야 할까?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불관용 세력이 그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런 극소수의 극단주의 세력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극렬한 반인권적 행태는 불가피하게 견뎌야 할 실천적 에피소드 정도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이 드러났다. 몇 몇 지자체에서는 그들의 준동에 겁먹어 인권 관련 조례들을 폐지하거나 개악하는 일이 일어나고, 보수 정부에서도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포기되지 않았던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가 촛불 혁명으로 탄생했다는 진보 정부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꺼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가 그 동안 그런 불관용의 목소리들을 작다고 그저 묵인하고 방조했던 결과는 아닐까?


'열린 사회'를 역설했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이런 상황을 두고 '관용의 역설'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지금 우리는 관용이 결국 관용 자체를 위기에 빠트리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포퍼에 따르면 제약 없는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을 피하려면, 우리는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천명할 때에만 관용의 사회가 지켜질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도 이제 이런 '불관용의 불관용'을 제대로 실천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이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의 실천은 관용의 정신에 맞게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는 '칼 대신 말(words instead of swords)'이라는 관용의 대원칙에 최선을 다해 충실해야 한다. 불관용을 선동하는 이들에 동조하는 많은 개신교인들은 우리가 조금만 더 성실하게 관용의 가치를 호소하고 설득한다면 자신들의 불관용의 태도와 실천을 부끄러워 할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관용이라는 인권적 가치는 너무도 기독교적인 기원을 갖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부터 그렇다. 그 사건은 결국 당시 로마 제국의 불관용의 실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도들에게 관용은 그 만큼 절실한 정치적 가치가 아닐 수 없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최초로 합법화시킨 계기가 되었던 갈레리우스 황제의 칙령은 다름 아닌 '관용 칙령'으로 불린다. 그리고 오늘날의 개신교도 관용을 향한 투쟁 속에서 신앙의 힘을 키워왔다. 프랑스의 칼뱅주의 위그노들 역시 루이 16세 때의 '관용 칙령'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물론 이렇게 역사적으로 기독교, 특히 개신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확립된 관용은 결코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관용이라는 가치 속에는 그 표현이 쉽게 짐작하게 하는 것처럼 단지 '허용'하고 '용납'하는 계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용의 대상이 잘못되거나 틀렸다고 보는 '반대' 또는 '거부'의 계기도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홍세화가 관용이라는 역어 대신 '똘레랑스'라는 프랑스어 유래 외래어를 그대로 쓰자고 하고, 박동천이 '관인(寬忍)'이라는 역어를 제안하는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래의 서양어도 우리말과 비슷한 함의를 갖고 있다. 말이 문제가 아니라 그 핵심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짜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관용은 중국집에 가서 나는 자장면을 시키지만 다른 이는 짬뽕을 시키는 걸 허용하자는 정도를 촉구하는 가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볼 때 어떤 신념이나 실천이 틀림없이 틀렸는데, 그래서 나로서는 정말 싫고 참기 어려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납하고 허용하자는 게 관용이라는 가치의 요점이다. 우리는 그저 다른 취향이나 의견에 대해서는 관용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그냥 흥미롭게 여기거나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해보려 한다. 관용은 내가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관점에서는 반대하고 거부해야 할 좋은 이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용납하고 허용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내가 반대하는 의견이나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힘이 세거나 하는 사정도 중요한 이유일 수 있다. 그들에 맞서 끝까지 반대하고 싸우자면 나에게도 큰 희생이 불가피한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서 말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확립된 많은 관용의 체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반대하고 거부하는 신념이나 실천을 관용해야 하는 '이성적'이고 '정의로운' 이유도 있다. 누가 어떤 신념을 가지거나 실천을 행하는 것은 누구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임을 인정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기독교적 관용의 가치는 '천부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이 명분을 내세우며 확립되었다), 사실은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내가 반대하는 상대방이 옳을 수도 있다고 여기는 태도가 진짜 올바르고 이성적이라 여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우리는 이를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라 부른다).


나로서는 '동성애 반대'가 근본적인 성경적 가르침이어서 반대해야 마땅하다고 굳게 믿는 기독교도들을 어떤 논리로 설득해야 좋을지 잘 모른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도들이라고 관용이라는 어쩌면 본래적으로 기독교적인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리라고 여길 아무런 합리적 이유는 없다. 문제는 관용의 가치가 사람들이 그저 자연스럽게 내면화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인권이 존중되는 다원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른 믿음이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정의롭게 살아가기 위해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계속해서 배우고 실천하며 '제2의 본성'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민적 덕성'이다. 시민사회와 국가적 차원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한국 개신교가 스스로 이런 시민적 덕성을 위한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관용을 선동하고 실천하는 세력에게는 민주주의와 정의와 인권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맞설 필요가 있다. 사용할 수 있는 법이 있다면 그 법의 엄정한 적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최근 영국 버밍햄 고등법원은 성 소수자 포용 교육을 반대하는 시위대에 영원히 집회를 금지시키는 판결을 내리기도 하고, 일본의 오사카 시는 혐오 발언을 일삼는 인사들의 실명을 공개하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 사회가 불관용 세력을 어떻게 불관용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무제한의 관용은 관용의 질서 자체를 위기에 빠트린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과 정의를 위해, 그리고 다름 아닌 관용의 사회를 위해, 불관용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불관용해야만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과 정의를 위해, 관용의 사회를 위해, 불관용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불관용해야만 한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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